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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바로 알아감(5) (삿 0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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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빈곤하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신지식이 빈곤하면, 명의만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실상은 우상숭배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신지식이 빈곤하면 실상은 과거에 내가 생각해 오거나 섬겨오던 신개념을 가지고 명의만 하나님이라며 우상숭배하게 됩니다. 신지식이 빈곤하면 실상은 과거에 내가 생각해 오거나 섬겨오던 신개념을 가지고 명의만 하나님이라며 우상숭배하게 됩니다.
둘째로는 신지식이 빈곤하면, 인생관이 그글되어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큰 뜻이 있으셔서 나를 이땅에 보내셨는지를 알아야지만 그 본의에 합당하게 자기 인생을 드릴 수 있고 그래야지만 인생을 조금도 낭비하지 아니하고 가치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어떤 큰 뜻을 세워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쓰고 살아간다 해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땅에 보내신 본의와는 상관 없는 세계에서의 일이라면 그것도 역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지만, 인생의 길을 걸으며 새로이 당면하는 문제들 앞에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땅에 보내신 본의에 합당한 인생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떤 뜻이 있으셔서 자기를 이땅에 보내셨는지에 대한 지식이 빈곤하게 되면 직면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의 본의와는 딴 세계로 나아가서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실을 우리는 출애굽 1, 2세대들의 역사에서 보았습니다.
출애굽 1세대들에게는 신지식이 빈곤하여서 자기들이 왜 애굽에서 구원받았는지에 대한 지식이 빈약하였기에 가나안 족속들의 위세 앞에 직면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배회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속하신 본의와는 먼 세계에서 자기들의 생존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인생을 낭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2세대들 중의 상당수도 역시 신지식이 빈곤하여 자신글의 풍요한 삶에만 마음이 가있었고, 결국 반찬타박하고 과일이 없다며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려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신 본의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가치도 발휘하지 못하고 인생을 낭비하였던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땅에 보내셨고, 특별히 구원하여 주셨는지에 대한 지식이 빈약하면 자기 나름대로는 인생의 목표를 세워놓고 열심히 살아간다고 해도 하나님의 본의와는 먼 세계에서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오늘도 신지식의 빈곤이 가져오는 결과 한 가지를 더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 신지식(神知識)이 빈곤하면 배교(背敎:믿던 종교를 배반함. 다른 종교로 바꾸거나 또는 무종교자(無宗敎者)로 되는 일.)하여 다른 신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더욱 자세하고 치밀해져서 날로 날로 새로와지지 않고 차차 간소화되어 대강 큰 것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기묘한 부분에 대해서는 차츰차츰 다른 것으로 환치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배교의 자리에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슴을 여호수아 이후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보게 됩니다.
첫째, 여호수아 이후 세대의 배교까지의 여정

1. 기업을 나눠 받았고, 완전히 정복할 사명도 받았습니다.
가데스 바네바 사건으로 인하여서 출애굽 1세대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배회하며 인생을 소모하였고, 출애굽 2세대들 중에서도 반찬타박하다가 불뱀에 물려서 죽은 사람도 있었고, 믿음으로 놋뱀을 바라 보았던 자들만이 살아남아서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B.C.1406). 그리고 약 6년 동안의 전쟁 끝에 가나안 땅 대부분을 정복하여 열한지파(레워지파는 예외)가 각각 기업으로 분배받았습니다(b.c.1400년경). 그러나 아직도 정복해야 할 땅은 많이 남아 있어서 각 지파는 자기에게 분배되어진 땅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정복해야 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특별히 남아있는 원주민들을 조금도 남겨둬서는 안되었고, 그들의 단도 헐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원주민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었고, 그들의 문화에는 우상숭배가 깊숙히 스며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원주민들 중의 얼마를 남겨두었다가는 그들이 나중에는 큰 세력이 될 것이고, 그들과 타협하거나 동맹을 하고 서로 연혼을 하여서 살게 되면 그글의 문화 속에 스며있는 우상숭배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고, 그들과 결혼하지 말고, 그들의 단을 다 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2. 각 지파가 반쪽 순종을 하여 가시와 올무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각 지파들은 나름대로 이유를 대면서 워주민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아니하고 남겨두었습니다. 사사기 1장을 보면 “쫓아내지 못하였으며”: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유다지파는 산지의 거민들은 쫓아내었지만,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鐵兵車:쇠로 만든 군사를 싣는 수례)가 있다는 이유로 쫓아내지 못했습니다(19). 그들이 철병거를 두려워하여 골짜기 거민을 그대로 둔 것은 하난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은 불신앙의 소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가나안족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보장해 주셨으므로(2절) 아무리 철병거가 강력한 무기라 하더라도 유다 군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전투를 벌였어야 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철병거를 가진 그들과의 싸움에서도 이길 것을 보장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수17:16-18).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21절) 요셉 족속은 처음 벧엘과의 전쟁에서는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 요셉 족속에 속한 므낫세와 에브라임지파가 제2의 원정인 게셀과 므깃도 정복전에서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처음에는 가나안 족속들이 결사적으로 저항하였기에 상당수를 쫓아내지 못하였지만, 나중에 강성한 후에는 능히 그들을 쫓아낼수 있었으나 그들에게 사역을 시키고 종으로 부려서 현실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쫓아내지 아니하였습니다(27-28절). 에브라임 지파는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29절). 스불론 지파도 처음에는 기드론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고, 나중에는 그들에게 사역을 시키기 위해서 쫓아내지 아니하였습니다(30절). 아셀 지파의 경우는 너무 많은 지역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해서 오히려 원주민들 가운데 둘러쌓여 거하는 꼴이 되었습니다(31-32절). 납달리 지파도 역시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처음에는 쫓아내지 못하였지만 나중에는 쫓아낼 수 있었는데도 그들에게 사역을 시키기 위해서 쫓아내지 않은 것 같습니다(33절). 정복전에는 가장 고전을 한 지파는 단 지파였는데 그들은 아모리 족속의 세력에 밀려 도리어 산지로 쫓겨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단 지파는 남방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고 북쪽으로 이주하여 정착지를 찾아야만 했습니다(삿18:1-31).
이러한 그들의 역사를 보면 그들이 순종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온전히 순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반쪽 순종’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적이 무서운 철병거를 가졌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유로, 혹은 능히 쫓아낼 수 있었는데도 사역을 시켜서 ‘현실적인 유익’을 얻겠다는 이유로 쫓아내지 아니하고 철저히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정황이 전개되고 있을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그들의 온전히 순종하지 아니하고 남겨둔 가나안 족속들이 올무가 되고 가시가 되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도다!”(2:2下-3절)
그들은 반쪽 순종을 하였고, 이 ‘반쪽 순종’이 나중에 배도하게 되는 길을 열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순종하지 않으면 작은 부분으로 인하여 나중에는 배도의 길로까지 나아갈 가능성이 생긴다는 큰 교훈을 얻습니다.

3. 그러나 여호수아와 장로들의 생전에는 그래도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여호수아가 살아있는 동안과 여호수아의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 장로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 출애굽 시에 20세 이하였던 자들로서 장로가 되었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비록 20세의 장정은 되지 못했지만 어렸을 때에 애굽에서 행하신 열 재앙이나,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3개월 동안 시내산까지의 광야 여정에서 물과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언약을 세우셨던 일과 하나님의 영광을 뵈었던 일, 그리고 성막을 주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고하셨으며, 가데스바네아사건 이후에 1세대 선조들이 40년 동안 배회하면서 죽어갔던 일, 그리고 불뱀사건이나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6년 동안의 전쟁 끝에 각지파가 땅을 분배받았던 일들을 다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이후로도 각 지파에게 분배된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5년 이상 전쟁을 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었기에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래도 그들의 지도하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대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나, 장로들, 그리고 장로들과 같은 세대 사람도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4. 새 세대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하는 배도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이제 순수하게 광야 38년 동안에 태어난 새 세대로 완전히 세대교체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알지 못하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조들을 애굽에서 어떻게 건져 내셨으며, 홍해를 건너 광야 3개월 동안의 여정에서 베푸신 큰 능력을 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뵙지도 못하였습니다. 그저 38년 동안 광야를 배회하면서 인생의 가치를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인생을 낭비하며 죽어가는 부모님들의 불신앙의 모습만을 보고 자라왔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주 빈약했습니다.비록 그들이 여호수아와 장로들 세대(출애굽 때에 20세 이하였던 사람들)의 지도하에서 가나안 정복 사역에 어느 정도 순종하여 왔지만, 그들이 떠난 이후에는 곧바로 배도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둘째, 새 세대의 배교의 원인과 과정
오늘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볼려고 하는 요점은 여호수아와 장로들의 세대사 죽은 이후에 곧바로 새 세대들이 왜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룻을 섬기는 배도의 길로 치달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여 오던 그들이 왜 이렇게 속히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땅의 우상을 섬기는 배도의 길을 걷게 되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새 세대의 ‘배교의 원인’이 무엇이었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배도의 기로까지 나아갔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1. 배교의 원인
먼저 우리는 그들이 배교하게 되었던 원인에 대해서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 기자는 그 원인을 10절 말씀에서 잘 말씀해(기술하고) 주고있습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2:10)
배교의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렐을 위해서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들어보지도 못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에 대해서도 전혀 들은 적이 없어서 몰랐다는 이야기 이겠습니까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은 부모들의 불신앙으로인하여 광야에서 38년 동안 배회할 때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율례에 대해서 재 강론하는 내용들(신명기에 있는 내용들)을 들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정복사역에 참여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대해서 배워서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전 여호수아가 임종하기 전에 고별 멧시지에서 “우상을 섬길 것인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촉구를 받아야 했던 정도의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선조들이 애굽에서 섬기던 아피스심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자들도 있었고, 또 가나안에 들어와서 아모리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는 자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신 사이에 누구를 섬겨야 할지를 구별을 하지 못할 정도로 모호한 신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수24:14-15). 그래서 여호수아는 임종시에 하나님이 그들의 선조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고, 어떤 분이신가를 상기시키면서(24:1-13) 오직여호와만을 섬길 것을 촉구하고(14-15절), 장차도 그렇게 할 것을 다짐 받아야 했을 정도였습니다(19-28). 그때 그들은 여호수아의 촉구에 대해서 단호하게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이 믿기지 않아 제차(19-20절), 삼차 다짐을 받았습니다(22-23절).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라!”(24:16-18)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24: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24:24)
이러한 백성들의 고백이 있자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해서 율례와 법도를 베풀엇습니다. 그리고 언약의 증표로 큰 돌을 여호와의 전이 있는 상수리 나무 아래 세웠습니다. 이렇게 여호수아가 임종시에 큰 돌을 세워서 언약의 증표로 삼아야 할 정도로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서 온전히 섬길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이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뚜렷하였던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수아와 출애굽 시에 20세 이하로서 장로가 된 자들이나 그 세대 사람들이 떠나자 곧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길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미미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상태를 가리켜서 사사기 기자는 한마디로 “알지 못했다!”고 묘사했습니다.

2. 배교의 과정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완전히 우상을 숭배하는 배도의 길로 나아가기 까지의 과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대강 몇 가지만 들어서 알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선조들을 위해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도 대강은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며, 이방신들을 거부할 만큼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뚜렷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참으로 모호한 것이었습니다. 대강 몇 가지만 알고 있었지 세밀하고 자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원주민들과 섞여살면서 점차점차 신관이 희미해지고, 희미해진 그것이 다른 사상으로 대치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스다롯으로 완전히 대치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배도의 길로 치달아 갔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대강의 지식만 가지고 현실에 차츰차츰 도취되어 타성에 빠지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차차 간소화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세하고 치밀하게 생각하게 되지 아니하고 대강 큰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기묘한 부분에서 차츰차츰 다른 것으로 환치(換置:바꾸어 놓음)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하나님을 섬기다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을 때는 그렇게 전회(轉回:1)回轉, 2)악=자리바꿈-하다)되어가는 과정에는 중요한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 다리가 뭐냐하면 신관의 대강, 곧 그 큰 것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나, 그 자세하고 치밀하고 필요한 현실문제에 대해서는 차례차례 희미해지고, 희미해진 그것이 점차 다른 사상으로 대치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사상으로 대치되었으면서도, 그 대강과 본질이 바귀지 않았으니까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것으로 자신은 생각합니다. 다른 사상으로 바뀌는 과정의 처음에는 명의(名義)만 달라지고 내용은 먼저 것 그대로 있지만, 나중에는 달라진 명의 가운데서 내용도 바뀝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숭배하는 배도의 길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 다음 세대가 우상을 섬기게 된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야훼 하나님께 대해서 그 숭엄한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으니까 아도나이(:主, Lord) 또는 바알()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처음에 바알이라고 할 때에는 반드시 이교신을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그 하나님께 대한 생각으로 그런 개념에서의 神입니다. 그러나 신에 대한 분명하고 자세하고 발전해야 할 끝없이 창조적으로 새로 계시받아야 할 그러한 신관을 확호(確乎:변동될 염려없이, 든든하고 굳세계, 아주 확실하게-하다)하게 수립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받고 있던 큰 대강만 가지고 있었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자세한 부분은 점점 희박해지고 희미해졌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 처음의 신관은 바알과 여러가지 속성으로 대치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그 주위 가나안 바알 신 개념에 압도(壓倒굴복시킴)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의 바알을 섬겼든지, 또는 ‘바알’이라는 명의하에서 이스라엘의 신개념을 가졌으면서도 신의 속성만을 여러가지로 고쳐서 섬겼든지, 그것이 우상숭배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우상숭배하는 배교로 치닫기까지는 이러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배교의 과정에 나타난 것도 똑같은 형태를 가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대강의 지식만 가지고서 현실적인 문제에 빠져서 안주하다 보면 점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희미해집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부처를 믿으나 하나님을 믿으나 뭐 다를바 있겠는가 결국은 똑같은 것이지 하는 생각을 갖게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에게 유익할 것 같은 우상을 따라가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특히 요사이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 일각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꼭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냐, 어는 종교가 되었던지 길은 달라도 결국은 구원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배도의 길로 치닫게 되는 원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풍성하고 뚜렷하게 서 있지 못한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성경 계시의 말씀에 충실하게 알고 있다면 그런 배도의 길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맺 는 말
따라서 지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우리가 배교의 길로 치닫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날로 새롭게 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서 대강의 것, 묵은 것 하나만을 쥐고 앉아 있는 동안에 어느듯 중요한 것은 마치 흙으로 쌓아 올린것이 비나 눈이 오면 씻겨 가듯이 차례차례 씻겨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알려고 하지 않고, ‘이것만 쥐고 있으면 다 된다!’하고서는 주저 앉아서는 열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구안(苟安:한때 겨우 평안함, 잠시 동안의 안락함을 탐내는 일) 가운데 빠져 있엇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다른 것으로 다 대치되어서, 결국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배도의 길로 치달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는 일에 얼마나 열심을 내야 하겠는지에 대해서 큰 각성을 갖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고 왔던 대강의 것만 가지고 나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세하고 세밀하고 명확하게 새롭게 알아가야 합니다.
담임교역자 라황용
전북 김제 송상교회 /☏(0658) 542-5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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