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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은 두려움을 극복한다 (창 15:1-6)

첨부 1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나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은 말씀에 순종하면서 커 갑니다. 기근을 만나기도하고 갈등도 겪지만 믿음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합니다. 믿음은 위기에 도전하며 물질의 유혹을 극복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유혹과 의심과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믿음의 사람 아브람도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전까지 계속 믿음의 승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도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좌절합니다.
두려워하는 아브람
아브람도 믿음의 삶을 살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잘하던 일도 못하게 되고 절망의 늪으로 점점 빠지게 됩니다.
두려움은 미래의 문을 닫게 합니다. 사람은 미래가 보장될 때 소망이 있고 꿈이 있으며 생기가 돕니다. 미래의 문이 닫힌 사람은 절망합니다.
아브람도 순식간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왜 아브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너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너로 큰 족속을 만들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창대케 해주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10년을 기다려도 아브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6장 16절을 보십시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세이었더라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가 75세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였으므로 지금 일어나는 이 일은 85세 무렵일 것입니다. 그가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던 때입니다. 10년 동안 하나님만 믿으며 믿음 생활을 잘 해 왔습니다. 그러나 10년을 믿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마음속에 혹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혹시 하나님이 약속을 어기시는 것은 아닐까 아니, 혹시 하나님이 없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 신앙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지는 않습니까
불 신앙에 사로잡히면 지나온 과거에 있던 그 위대한 믿음의 행적은 다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장 2절에서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3장 15-16절에서 다시 한 번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큰 민족을 이루려면 먼저 아기가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들은 후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록 아브람은 아기를 갖지 못합니다. 아브람은 갈등을 겪기 시작했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으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람이 이런 두려움이 좀더 심해진 이유는 그의 나이 때문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조건이 있을 때에는 언젠가는 낳겠지라고 기대할 수 있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 경수가 끊어지고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되자 그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면 불안이 찾아오고, 불안이 찾아오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인간적인 생각을 합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생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믿음에서 현실로 돌아옵니다.
아브람의 인간적인 생각은 양자를 삼아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양자라도 삼아서 하나님의 약속과 복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절을 다시 보면 몇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필요한 때에는 꼭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지금 내가 나타나야겠다고 생각이 들 때에는 반드시 나타나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벙어리가 아닙니다. 숨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돌과 같은 물체가 아니라 말씀하시는 인격체이십니다.
야고보서1장 6-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으며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도, 복과 약속의 말씀이 현실에 일어나지 않아도, 비록 아무일 없이 10년이 지났다 하더라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아브람이 받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였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하는 사람이며, 믿음의 사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 속에서 항상 외롭고 고독하고 사막을 걷는 것과 같고 절벽에 부딪히는 것과 같은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의심하고 포기하고 싶고 뒤돌아 서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오늘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두려워 말고, 조급해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10년을 기다린 아브람에게 더 기다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아브람은 지금까지 기다린 기간의 배가 넘는 15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지 25년이 지나서야 응답을 받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은 조급한 마음 때문입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당장 달라고 조릅니다. 그래서 믿음이 익을 시간이 없습니다. 믿음이 성숙하지 않고 항상 설익은 상태에서, 아무 기적도 능력도 나타나지 않는 채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확실하게 말합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원수가 너를 공격해 올 때 나는 너의 방패가 될 것이다. 네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 때 내가 너의 상급이 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사야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며 패역하고 부도덕하고 하나님을 버렸을 때 그들에게 심판과 징계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심판 뒤에는 회복이 있고 죄 뒤에는 용서가 있는 법입니다.
심판의 때가 끝날 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의 복역의 때는 끝났다. 너의 죄는 지불되었으며 대가를 다 치루었다. 이제는 너에게 회복의 때가 올 것이다. 하나님이 오신다. 그분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이제 너는 눈물을 닦고 정신을 차리고 회복될지어다. 이것이 이사야 40장에서 66장까지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을 보십시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런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도 똑같이 하셨던 말씀입니다.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죽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때문이다. 그가 오면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며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그가 오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말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위로와 격려와 축복의 메시지가 오늘 성령님을 통해 여러분에게 전달되기 원합니다.
왜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셨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그분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에 다윗이 싸우러 나갔지만 실은 다윗이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웠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 그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환란을 겪고 원수와 싸우지만 그 싸움의 배후에는 우리의 대장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친히 칼을 들고 싸우시며 결국에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게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보호하시는 방패가 되시기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이 없거나 건강이 나빠지거나 직장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방패가 되시기 때문에 당신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시기에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야 40장 10절을 보십시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 17절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최대의 적은 불 신앙과 두려움입니다. 여러분이 약속을 믿지 않고 의심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 모든 회의와 불 신앙과 염려와 근심들이 여러분 안에서 떠나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람의 인간적인 생각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고 절망과 좌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드디어 아브람이 두려움에 빠졌던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녀가 없는 것이 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식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바라던 자식은 보통 자식이 아니라 약속의 자식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제 몸은 늙고 해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 가는데 양자라도 데려와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인간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만큼 설득력 없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우리의 감정과 잘 맞습니다. 하나님도 내 입장이 되보시면 이해하실 걸...하며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자꾸 자기를 변명하게 만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 운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나이다
두려움에 잡히는 순간 아브람은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양자라도 데려와야 겠다는 인간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아브람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양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씨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분명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희미하지 않습니다. 양자는 양자인데... 혹은 아들은 아들인데...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십니다.
4절에서 더 깊게 봐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잘못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만들기 위해 자꾸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뜻을 바꿔서라도 내 뜻을 이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무서운 불 신앙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람들은 편안하고 넓은 길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길은 좁은 길이요 고통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넓은 길에는 멸망이 있으며 좁은 길에는 영생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가 가능한가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불가능 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에 관심이 있으실까요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1백세에는 해산이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 나이까지 약속을 이루지 않고 끌어 오셨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아브람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상황에서 아기를 낳는 것은 믿음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자연스런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는지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과연 믿음으로 행한 일이 무엇이며 과연 몇 번이나 믿음으로 행하셨습니까 혹시 다 여러분의 이성과 상식으로 한 것은 아닙니까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다면 기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가능한 상황까지 이끄셔서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 훗날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보낼 터인데 그 메시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하고 동정녀에게서 탄생될 것이기에 임신이 불가능한 사라도 임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여러분의 믿음을 키워주기 위해서요, 두번째는 여러분이 알지 못했지만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말씀의 약속과 현실의 부재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증거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5절을 보십시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은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아브람에게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망하는 여러분을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아브람아, 나랑 잠깐 밖에 나가 보자.시며 아브람을 밖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유난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봐라. 손에 잡힐 듯 쏟아져 내리는 저 별빛을 보느냐 그리고 바다의 모래알을 셀 수 있느냐 내가 그처럼 많은 자손을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실물 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순간에 아브람의 마음에는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찬란히 빛나는 별들을 보는 순간 그 동안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마음에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무엇이관데 내게 이렇게 하십니까 늙고 보잘 것 없는 한 노인네인데 이토록 친절하게 말씀하시고 호의를 베푸시고 사랑과 꿈을 주시니.... 이게 웬 사랑입니까 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눈물을 흘린다고 내일 당장 아이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감동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나이와 처지를 다 잊었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자신의 처지를 잊습니다. 비참한 생각, 열등감, 좌절감이 다 사라집니다. 그의 얼굴에는 찬란한 하늘의 별처럼 그 비전과 환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은 다시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은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사라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믿음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기에 위대한 진리가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로마서의 이 말씀이 어거스틴의 가슴속에 들어갔을 때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이 통합되었습니다. 또 이 말씀이 마틴 루터에게 들어갔을 때 어두웠던 중세가 무너지고 종교개혁의 밝은 빛이 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차원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어집니다. 누구든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이 사건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구원받은 축복이 여러분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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