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의 사람도 실수를 한다 (창 16:1-6)

첨부 1


하나님은 다 알면서 용서하시고 인간은 다 알면서 죄짓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도 실수할 수 있으며 반복되는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에게 성자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용서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람도 실수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 전서 10장 12절의 말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은 어떤 특정인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아브람이 두려워 떨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해 주시는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다시 믿음과 용기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끌고 나가서 하늘의 셀 수 없이 많은 별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 별들처럼 네 자손이 많아지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은 감사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것은 배신과 불신이었는데 이렇게 끝까지 믿어 주시고 격려해 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격려에 힘을 얻어서 증거를 구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영적 증거를 달라고 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요구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짐승을 쪼개어 서로 마주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그 쪼갠 짐승을 보면서 기다렸습니다. 해가 질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타는 횃불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의 도장을 찍으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깊은 영적 경험이었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꿈쩍도 하지 않는 현실
우리가 마음이 답답하고 컬컬할 때 산으로 가서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말씀도 주시고 환상도 보여주시고 격려도 해주시고 용기도 주십니다. 우리는 영적 체험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산에서 기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짜증나는 일, 나로 하여금 산으로 갈 수밖에 없게 한 그 현실은 꿈쩍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타는 횃불로 나타나신 하나님도 경험했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고 환상도 보았고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여전히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아내 사래의 현실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녀가 생산치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사래의 고민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육체는 늙어 가고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있었지만 아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속으로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 사래뿐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의 고민은 좀 특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급기야 하나님은 살아 계실까 그분은 신실 하실까 그분의 음성과 약속대로 과연 이 약속이 지켜질 것인가 만약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도대체 내게 무슨 잘못이 있기에 나에게는 아기가 없다는 말일까 이렇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래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좌절감은 그녀에게 부정적인 생각과 인간적인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형편에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서와 감정에 잘 맞아떨어집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도 내 입장이 되 보시라고!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세속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별로 죄책감을 갖지 않고 쉽게 그 방법을 따라 행동합니다.
사래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 내가 이 나이에 육체적으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내 몸종인 하갈을 통해 자식을 번성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더 현명한 일 일거야. 사래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생각이거나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단지 답답하기 때문에 들었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래의 생각은 그녀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기가 없다고 하나님께 투정했습니다. 양자나 삼아서 약속의 자식으로 삼지요.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에 대해서 정면으로 양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태어날 씨가 약속의 자녀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처럼 사래도 임신할 수 없으니까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기를 낳겠다고 인간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마치 씨받이처럼 말입니다.
2절입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며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사래의 실수는 자신이 임신하지 못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한 것이었습니다. 사래는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을 정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아기를 못 낳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 같아라고 마침표를 찍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쉼표를 찍으십니다. 지금은 아기가 없으나, 곧 아기가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래는 아기가 없다, 하나님이 없다, 약속은 없다고 자기 마음대로 단정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앞지른 사래
저는 여러분이 어렵고 힘들 때 여러분 마음대로 단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셨다.라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아브람과 사래를 임신이 불가능한 나이까지 데리고 가신 후에 아기를 주셨을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는 아브람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정말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면 이 정도까지는 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먼 훗날 동정녀에게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을 아시고 먼저 아브람에게 이렇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 구속 사적인 가르침을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불가능해 보이고 이해되지 않을 때 단정하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는 쉼표이지 마침표가 아닙니다. 지금은 어둡지만 새벽이 올 것입니다.
모든 일이 불가능해지고 어려울 때 예수님께 찾아오십시오. 구속 사적으로 그것을 해석해 보십시오. 기적이 일어날 것이며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여러분의 생애에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2절에서 나타나는 사래의 또 다른 실수는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을 실행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아브람의 첩으로 준 것입니다. 이것은 극히 세속적이고 비윤리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씨받이 문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급하면 쉽게 원리와 원칙을 무시하고 편법을 씁니다. 편법은 쉽고 첩경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비극적이고 비참한 법입니다.
사래는 애굽에서 얻은 몸종 하갈을 통해 임신하게 함으로 자기의 모든 문제와 불만과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사래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면 사고가 생기고 후회하게 됩니다. 지금의 사래는 극도로 불안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행동은 실수할 확률이 높았습니다. 그녀는 판단력을 잃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마음을 곱게 써야 합니다. 사람이 급해지면 마음을 곱게 쓰지 않습니다.
사래의 실수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브람의 실수입니다. 아브람은 사래가 고통과 극도의 불안한 상황 속에서 내뱉었던 이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동의했습니다.
그가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사래의 제안을 거부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녀의 진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내 몸종을 통해 아기를 낳으십시오라는 말이 사래의 진심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투정이요 갈등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오죽하면 그런 말을 하겠소. 포기하지 마시오. 절대 그러면 안되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립시다.
임신하지 못한 사래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요 남자로서 할 일이었습니다. 그는 사래의 인간적인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 제안을 수락하고 맙니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년 후이었더라
아브람이 믿음의 여행을 시작한 때가 75세였고 지금이 85세였습니다. 이때 그가 실수해서 이스마엘을 낳을 때가 그의 나이 86세였습니다. 십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의 믿음은 성숙하지 않았고 완성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 넘어지고 실수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우게 되는 것은 사람이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든다고 해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사는 요령과 기술만 발달될 뿐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 한지라
아브람은 하갈과 동침하였고 쉽게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래가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임신이 하갈에는 너무도 쉽게 이뤄집니다. 임신한 것을 알게 된 하갈은 어떻게 변합니까 사래의 몸종이었으나 사래의 주인의 위치로 군림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의 속성입니다.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여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의 결국
이것은 사래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사래는 하갈을 단순히 임신의 도구, 즉 씨받이로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래 뜻대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은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딜레마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반대로 처음에는 어렵다가도 시간이 갈수록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몸종이 주인 행사를 하려 할 때 사래의 감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분하고 원통하고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살 만한 의욕을 느끼지 못했을 뿐더러 신경질적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5절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이 실수는 누가 저지른 것입니까 사래였습니다. 그런데 화는 누가 냅니까 사래입니다.
실수한 사람이 화를 내는 법입니다. 죄 지은 사람이 큰소리칩니다. 실수는 사래 자신이 하고서는 그 책임을 아브람에게 뒤집어씌웁니다. 죄는 변명하고 책임을 전가시키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담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고 하나님이 그런 아담에게 찾아 오셔서 누가 너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했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아담이 내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변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준 그 여자가 나에게 선악과를 먹게 하므로 내가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책임은 하와에게 있고,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책임전가와 변명이 죄의 독특한 특성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둑질을 하고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도대체 우리 사회에서 도둑질하지 않고 살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은 술을 먹고서 이렇게 시를 씁니다. 이 사회가 나를 술 먹게 한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책임전가입니다.
사래는 적극적으로 아브람에게 항의합니다. 그녀는 모든 실수는 다 당신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연 이 시점에서 항의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미 생긴 애가 지워질 수 있습니까 상황은 이미 쏟아진 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현명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대처해서 분노를 쏟아 놓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쏟아 놓으면 어려운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가장 지혜로와 보여도 결과를 보면 미련한 것이고 제일 빠른 길을 선택한 것 같아 보여도 막상 결과를 보면 자신이 제일 늦은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아브람은 거친 사래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그대 눈에 좋은 대로 그 여자에게 행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행했던 두 번째 실수였습니다. 아브람은 이미 사래가 몸종을 첩으로 줄 때 거절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벌어진 상태에서는 하갈을 학대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사래와 하갈이 싸울 때 사래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갈을 무참하게 버렸던 것입니다. 하갈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첫 단추를 잘못 끼면 계속 잘못 끼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람뿐만 아니라 사래도 계속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녀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하갈을 아브람의 첩으로 줄 때와 다른 태도입니다. 하갈을 아브람에게 준 것은 바로 사래 자신이었습니다. 따라서 하갈을 학대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래는 복수하듯이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하갈이 갈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사래를 떠납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잘못된 시작은 잘못된 결과를 낳고 잘못된 결과는 무책임과 학대를 낳고 결국 학대는 그의 곁을 떠나게 만듭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도망가는 사람들로 가득찬 세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끊임없이 도피하는 사람들이 가득 찬 세상입니다.
아내는 학대하는 남편으로부터 도망가고, 자식은 일 만하고 성공만 하되 사랑하지 않는 부모로부터 도망갑니다. 학생은 실력 없는 선생으로부터 도망가며, 노동자는 착취하는 주인으로부터 도망가며, 백성은 독재하는 정치가로부터 도망갑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으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피해 가고 도망 다닙니다. 이것이 1절부터 6절까지의 메시지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로마서 3장 10절 이하에서 의인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죄의 본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수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 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실수하지 않았고 완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수하고 부족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은 그가 믿음이 있어서나 그의 행동이 의로워서이거나 그가 실수하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형편없고 결정적인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의 실수를 관용하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의 남편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용서하십시오. 그 까닭은 우리도 용서받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실수를 저질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도중에 포기하지 않으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계속 이끌어 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하나님 앞에 계속 서 있을 수 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나는 나의 연약한 것을 자랑합니다. 나의 실수를 자랑합니다. 나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강하심과 위대함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인도하심과 붙잡힘 때문에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 끝까지 기다려 주시고 마치 항상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을 만나듯이 우리를 대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두 번째로 이 사건에서 배우는 사실은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인간적인 방법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방법을 흉내내서는 안됩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기보다 세상적인 방법을 택해서 양자를 삼으려 했고 사래는 몸종을 시켜서 아기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마십시오. 손쉬운 인간적인 생각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그냥 고난을 견디십시오. 고통을 당하십시오.
신앙의 위기는 한 번만 오지 않고 계속 옵니다. 고통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믿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쉽게 갈 것인가라는 두 가지 싸움은 우리 생애에 계속 됩니다. 그럴 때마다 어려운 길을 택하십시오. 좁은 길을 택하십시오. 고통의 길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택하십시오. 그것만이 여러분이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아브람이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을 택함으로 저지른 실수는 보통 실수가 아니라 주님 오실 때까지 겪어야 하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낳은 자식이 이스마엘이었고 그가 바로 아랍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교훈은 아브람이 회복할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수는 하나님의 계획을 포기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죄보다 큰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실수보다 큰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입니다.
믿음의 사람도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 선다는 사실을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어렵고 힘들 때 인간적인 방법을 택하지 마십시오. 그냥 믿음으로 계속 가십시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