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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대로 이삭이 태어나다 (창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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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부터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햐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말씀대로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약속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라에게 방문하셔서 네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말씀대로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이 땅에 태어날 것이라는 말씀대로 이삭이 태어 났습니다.
하나님은 환경에 따라 말씀을 바꾸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환경이 바뀝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이란 말이 중요합니다. 이삭이 아무 때나 골라잡아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시간에, 정한 그 때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계산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정한 시간에 임신하게 하고, 정한 시간에 해산하게 하십니다. 예수님도 아무 때나 오시지 않고 하나님의 때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내 맘대로 인생을 살다가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간이 되어 태어나 살다가 하나님의 정한 때에 이 세상을 떠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인생 만사가 우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발전시켜 역사의 이해는 시간의 이해라고 말합니다. 역사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뤄집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내 인생을 주관하신다는 말은 내게 주어진 시간 이 육십년이든 팔십년이든 그것이 하나님의 계산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전도서에도 사람이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계산하고 있는 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우리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습니다. 모르면 불안하고 알면 안심됩니다. 모르면 조급하고 사물의 이치를 알면 여유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이해하면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때를 알면 안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에 여유와 안심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2절에서 또 한가지 발견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때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늙은 아브라함, 나이 1백세가 되어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셨고 시간 안에서 역사를 운행하시지만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시간 안에 사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많지만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내 시간 안에서만 살지 말고 하나님의 시간에 동참하게 되면 그분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믿음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다
2절에서 주목해야 할 세번째 말씀은 늙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3절에서도 이어집니다.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이라는 표현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여기서 우리는 아이를 낳는 것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를 여자가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남자가 아이를 낳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가정에 큰 문제가 생겨납니다.
여자는 아이를 임신하고 해산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남자가 씨를 줍니다. 그래서 그 자녀는 아버지를 닮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 히브리적 사고입니다. 아이들은 사상, 신앙 등 모든 것을 아버지를 통해 배웁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머니 중심입니다. 자녀 교육과 양육을 모두 어머니에게 맡긴 것은 기막힌 비극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해야 합니다.
가출한 자녀를 보신 적 있습니까 어머니 때문에 가출한 자녀는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두 술먹는 아버지,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 소리지르는 아버지, 밤 늦게 오는 아버지 때문에 가출합니다.
제가 3년 전에 약속한 일이 한 가지 있어서 지난 주에 미국에 다녀왔습니다. 교회라면 양해라도 구해 볼 텐데 교회가 아니어서 취소할 수 없는 약속이었습니다. 그것은 결혼 상담소 9주년 기념 예배겸 자금 모금 예배 설교였습니다.
그 때 제가 깜짝 놀란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분들이 상담한 자료들을 모아서 도표를 만들었는데 9년 동안 가정문제를 가지고 상담하러 찾아온 사람이 대부분 여자였고 남자는 20%가 못되었습니다. 그리고 80%의 여자들이 제일 많이 상담한 것은 남편의 외도였고 두번째는 자녀 교육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세번째가 부부간의 성격문제와 갈등이었습니다.
결국 여자들을 울게 하고 집을 떠나게 만든 것은 바로 남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남성들이여 회개하십시오!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자들이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자녀들이 방황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이 남편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여자들이 집 밖으로 나돌지 않습니다. 모두 아버지의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제 자리로 돌아오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 가운데 자녀교육 때문에 직업을 포기하거나 진급을 포기하는 그런 멋있는 아버지가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아버지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부인은 안정감을 되찾을 것이며 당신의 자녀들은 행복해지기 시작할 것이며 주변의 수많은 문제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은 이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이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었습니다.
창세기 17장 19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우리는 옛사람, 세상적인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이에게 기쁨을 준 이삭
이삭은 웃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창세기 18장 12-15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그 말씀을 비웃다가 하나님께 들켜 야단을 맞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이삭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라의 비웃음을 뜻한 것이었지만 이삭이 태어나자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기쁜 웃음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제일 처음으로 웃은 사람은 아브라함일 것입니다. 1백살의 나이에 아기를 낳았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우리가 정상적인 나이에 아이를 낳아도 얼마나 좋아합니까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물며 1백살에 태어난 아이를 가진 아브라함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보다 더 기막힌 사람은 사라였습니다. 나이 구십에 어떻게 젖을 먹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연세가 구십이신 분 계십니까 그렇게 많은 나이에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라에게는 상처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몸종 하갈 때문에 받은 상처였습니다.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을 하는 수 없이 길러야 했습니다. 결국 둘을 내쫓았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들여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때 사라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녀의 고통과 상처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이삭을 낳자 이 모든 열등감과 상처, 고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삭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모두 그 아이를 구경하러 모였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와서 한 번씩 안아보고 만져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삶에 기쁨을 주고 웃음을 주시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그분을 영접한 자마다 상상할 수 없는 생의 환희와 기쁨과 인생의 의미를 안겨 주셨습니다.
교회의 비극은 교회의 건물을 보여주고 기독교를 가르쳤지만 예수님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를 믿으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러 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당신에게 웃음과 위로를 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그분은 가난한 자의 친구였고 병든 자의 위로자였습니다. 소외된 사람들, 과부들, 세상에서 버림 받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만나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을 만난 자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머거리가 열리고 문둥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가고 새로운 삶을 찾았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삭은 세상에 태어날 때 말을 하진 못했지만 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어둠에 사로잡혀 있던 수 많은 사람들에게 광명을 주셨습니다.
왜 이삭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었을까요 첫째로,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태어났다면 그렇게 특별하게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가능성이 다 끊어진 절망과 불가능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이삭이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약속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약속의 자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이삭은 약속의 자녀라고 합니다.
약속의 자녀로부터 메시아가 태어났습니다. 그 후로 누구든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약속의 자녀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번째 이유는 그가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웃음이었습니다. 그를 본 사람들은 대화를 했건 하지 않았건 기쁨이 솟아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연히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약속의 자녀로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이 행복할 것입니다. 직장에 가면 직장이 행복해 질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즐겁고 기쁘게 해주십시오. 그들에게 웃음을 주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태어난 이유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요, 이삭이 태어난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참으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보통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참된 기쁨을 주러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를 치우고 모든 불의와 거짓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습니다.
메시아의 표상이었던 이삭
4-5절을 읽으십시오.
그 아들 이삭이 난지 팔일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성경에는 이삭의 어릴 적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8절에 이삭이 젖을 뗄 때 아브라함이 연회를 배설하였다는 기록이 유년기 시절의 기록의 전부입니다.
예수님도 유년기 시절의 기록이 없었습니다. 서른살이 되기까지 몇가지의 기록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육아일기를 씁니다. 하지만 서른이 넘어서도 기억할만한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거에 연연하며 사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사람은 서른 이후의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56-58절에서 이삭은 앞으로 올 메시아의 표상이었다라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그러자 유대인들이 당신이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어떻게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묻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삭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의 표상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도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는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류의 화목제물이 되었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화목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삭의 모습과 예수님이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그는 이 아이는 죽지 않는다. 다시 부활할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던지실 때 영원히 무덤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삼일만에 다시 부활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4절에는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약속의 자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1백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약속의 자녀요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메시지보다 더 큰 메시지가 뒤에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모두 약속의 자녀라는 메시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백세에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처럼 먼 훗날 메시아가 이 땅에 태어날 때 사람들이 전혀 믿을 수 없지만 예수님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낳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약속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의 자녀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6절을 보십시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참 재미있는 구절입니다. 사라가 여기서 경험한 하나님은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말이 중요한 이유는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시고 실수가 없으시고 근엄하여 감히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렵고 무섭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 하나님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와 가깝고 자상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여기 사라가 경험한 하나님이 웃기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분이라는 뜻입니다. 유머가 있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감싸주시고 나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던 놀라운 하나님이라는 뜻이 바로 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지만 사라가 경험한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삶 속에 개입하셔서 웃지 않을 수 없는 기막힌 일들을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너무나 좋고 신기해서 기절할 만큼 좋으신 하나님, 하루 종일 생각해도 좋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녀는 아기를 안고 있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사라의 그 기쁨을 표현해 봅시다.
1백5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 한 회사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은행에 가서 저축한 돈 중에서 몇십만원을 찾으려고 통장조회를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통장에 1백억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깜짝 놀랐지만 처음에는 뭔가 전산착오라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몇일이 지나자 그것이 정말 자신의 돈이라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순간 이 사람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때부터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 믿기지 않아 놀랍기만 합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고 그 다음 날이 되자 그 사실을 생각만 하면 실실 웃음이 나와 그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동차를 봐도, 집을 봐도 즐거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젠 그 자동차나 집을 아무 갈등 없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너무나 좋아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라의 기쁨이요 여러분이 받은 구원의 기쁨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 믿고 기절하지 않은 것이 신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는데도 어떻게 기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1년동안 쉬지 않고 와!라는 감탄사를 연발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강퍅하게 사는 이유는 그들 마음에 감동과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삭을 낳은 사라는 매일 그런 감동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젖을 먹일 때마다, 기저귀를 갈 때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이 일에 감격하며 기쁨을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니... 이것이 왠 은혜요, 왠 사랑인가... 눈물이 나서 어쩔줄 모르겠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사라가 아이를 낳아 젖을 먹일 것을 아무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한 노년에 아들을 얻었고 그 사실을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약속의 자녀로서 주변에 있는 모든 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들을 축복하며 기쁘게 해주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을 보기만 해도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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