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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구원 받을뻔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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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이 하는 농담 중에 “죽을 뻔한 것이 좋으냐. 살 뻔한 것이 좋으냐.”고 묻는다. 성급한 어린이는 생각도 없이 살 뻔한 것이 좋다고 대답한다. 그것은 살 뻔하였으나 아쉽게 죽은 사람이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설명하자 그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였다고 했다. 이는 영적으로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믿을 뻔한 것은 소용이 없다. 못 믿을 뻔했어야 한다. 말구유의 아기를 못찾을 뻔했어야지 찾을 뻔했었다면 안 된다. 그런데 성경에 구원받을 뻔했으나 구원받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들이 노아의방주를 지은 목수들이다. 길이는 300규빗. 넓이는 50규빗. 높이가 30규빗으로 3층으로 지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겠는가. 그뿐인가. 요즘처럼 기계가 발달한 때가 아니니 산에서 나무를 찍어 내려와 다듬는 데서부터 운반하는 데까지. 또는 그것을 잘라서 판자를 만들고 조립하고 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을 칠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겠는가.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은 방주에 들어가 보았을런지는 모르나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다. 다 구원받을 뻔한 사람들 뿐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교회건축에 참여하고 교회 강대상 밑에까지 가 보았으나 구원과는 먼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없이 여러 번 들었으나 아그립바 왕처럼 거의 구원받을 뻔하였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통령에 당선될 뻔했다 해도 당선이 아니면 낙선이요. 될 뻔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10년. 20년 동안 교회에 나가 구원받을 뻔했다면 그보다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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