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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아가 죽는 일 (요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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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에서 21장 끝장에 이르는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과는 특이한 점이 이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묘사들이 처절하기보다 오히려 자랑스럽고 밝을 정도 로 승리로운 색깔을 띄고 있습니다.

이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죽기 얼마 전에 기록한 책입니다. 요한이 자신의 인생 을 거의 다 살고 나서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셈입니다. 그리고 또한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제 구시 베드로와 함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 을 경험한 이후에 요한복음을 쓰게 되었습니다(행3:1-10). 그러니까, 요한복음 21장 끝부분에 나타나는 제자들이 실패감과 실의에 바져 고기잡이 하러 다시 바다로 되돌 아 가있는 부끄러운 모습과 실패한 경험만 가지고 있는 요한복음의 경험만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의 충만한 능력을 힘입고 난 이후에 이 대단한 승리의 기적들과 놀라운 감격들을 체험한 이후에 이 요 한복음을 기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생각 속에는 그같이 놀라운 대속의 은혜와 영광의 부활을 선물로 허락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서 철저히 자기 자신이 죄인이요, 문제투성이였음 을 반추하며 십자가 아래서 죽어진 옛사람 위에 새사람이 살아서 절대 주를 의지하 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것이 사도 요한의 놀라운 점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놀라운 변화, 즉 예사람의 자아가 죽어지고 새사람으로 태어난 그 요한의 모 습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본론> 사도행전 3장 1절 이하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보십시오. `은과 금은 내 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담 대히 외치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그리고 그 믿음은 곧 현실로 나 타났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한 번의 설교로 오천명이 넘는 사람 을 하루에 회개시키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들 앞에는 아무 세력도 가로막을 수 없었 습니다. 지금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담대하게 만들었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놀라운 기적과 영광과 승리로 말년을 장식한 요한이 어찌하여 요한복음의 결 론 부분에 이르러서 실패하여 실의에 가득찬 어두운 모습을 기록하는 것으로 그 결 론을 이끌고 갔어야만 했는가 하는 점을 살피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도 요한이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점을 먼저 살 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눅 9:51-56)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 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 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 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 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여러분 열 두 제자 이름을 다 외우실 수 있습니까 유명한 톰소여의 모험이라는 이야기를 보면, 성경 구절을 하나씩 외울 때에 주는 딱지를 10개 모으면 다른 색깔로 바구어 주고 그것이 몇장 모이면 성경책을 하나 줍 니다. 그런데 톰소여가 어느날 장난감을 주고 딱지를 여러개 모아서 드디어 성경책 을 탈 분량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순회 판사가 거기 왔습니다. 순회 판사 앞에서 시상을 하게 되는데 순회 판사가 시상을 하면서 묻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두 명만 대어 보아라!' 여러분 누구의 이름을 댓겠습니까 `다윗과 골 리앗이요!'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열 두 제자를 다 외울 자신을 가진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왜 어려우냐하면 복음서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나타나는 적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의 이름이 이러하다며 제자의 이름을 언급하는 본 문이 한번 나오고 그 다음 이후로는 항상 잘 나타나는 이름이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 고보입니다. 그외 에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많이 언급됩니다. 베 드로가 왜 자주 등장하는가 하면 많이 설치고 성급하게 앞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요한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방금 읽은 말씀에서 나온 바와같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시는데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 려고 하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합니다. 그러자, 이를 본 요한이 흥분 하여 말하기를 `주여, 제가 하늘을 명하여 불을 내려 저들을 사르라고 할까요'합니 다. 우리는 요한 그러면 사랑의 사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요한일서를 읽어보면 처음 부터 끝까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린 생각하기를 요한은 상당히 온유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감성이 부드러운 사람이었을 것이다는 상상을 하기 좋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뜻밖의 표편으로 되어있습니다.

마가복음 3:17절을 보면 열 두제자의 이름이 나오는데 거긴 다른복음서엔 없는 이 런 표현이 나옵니다. (막 3:17)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요한의 별명이 우뢰 의 아들이랍니다. 얼마나 목청이 컷으면 이런 별명을 가졌을까요! 목청이 큰 사람은 대개 혈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사도로 불리우게 되었으니, 사도 요한은 그리 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혈기의 사람이었는데 그 사건 이후에는 변화되어 사랑 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같은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요한은 자신을 통해 인간이란 자연인 그대로의 모습일 때에는 어떤 모습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것은 무 엇인가를 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치 신 교훈에 대한 영적인 내용들을 가능한 추적해 오면서 결국 결론에 가서는 인간이 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주님의 아름다운 영적인 가르침을 알아듣고 실천할 만한 능력 없는 사람들이요, 얼마나 한심한 사람인가 하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 니다. 더구나 사도 요한은 나도 바로 그랬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요한복음의 결 론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기에서만 그친다면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이같은 이야기 속에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도 옛날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 기서 사도 요한의 표현에서 지금 나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아야겠고, 나아 가서 거기에서 무엇이 달라져야 할 것인가 하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참모습과 변화되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뜻밖 에도 신자들은 신자 아닌 신자의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요한복음 지적하 는 이야기입니다.

심방을 해보면 여러가지 신앙에 대한 문제로 상담을 하게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답답한 것은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내가 소원하고 욕심하는 바가 항상 하나님의 뜻과 소원하는 바보다 항상 앞질러 가 있다는 것입니 다. 이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것을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려서 내가 얻어 내려는 것을 얻어 내는 것이라고 여기는 위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자세히 살피면 예외가 없이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만 해도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와 복음서에 기록된 베드로는 너무 도 다릅니다. 그 중에서 마16장의 기록을 보십시다.

(마 16:13-2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 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더러는 엘리야,어떤이 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 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 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 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 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 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 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 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 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여기에서 베드로가 두 가지의 극과 극으로 치닫는 자리에 각각 서게됩니다. 하나 는 `복되도다! 이를 네게 알리신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니라' 라는 칭찬의 자리 에 섭니다. 그러나 조금 후에는 그것이 급반전 되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 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책망을 받습니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면 베드로는 이때 구원 얻은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구원을 한 번 얻었다가 취소될 수 있을까요 안됩니다. 구원이란 (요 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 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엇을 알게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구원 을 얻은 것입니까 못 얻은 것입니까 분명히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후 에 사단이라고 하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참으로 많은 신비로운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은 베드로임에도 사단이라는 망신 을 당합니다. 이런 망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베드로가 주가 누구신지를 알 뿐만 아니라 주를 위하여 열심을 품고 있었 다는 것이 모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이 결코 주에게 일어날 수 없습 니다.' 라는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 일을 저 지하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일이 일어난다면 내가 앞장 서서 그 일을 막아서 주 님에게는 그 화가 미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입 니다. 베드로만큼 이렇게 목숨을 걸고 주를 편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편든 것 을 뭐라고 하십니까 편든 것을 사단이라고 합니다. 어찌보면 어이없는 일이라고 여 겨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 중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베드로와 같이 주를 위해 편든다고 자부하지마는 그것이 주님을 앞질러 나가는 것이 가장 무서운것 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베드로가 지금 주님을 위하여 무엇할 준비까지 되어있다고 말합니까 목숨을 버리고 옥에까지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고 답변하십니까 사단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얼마나 기가막힐 노릇입니까 그러므 로 여러분, 절대로 여러분 자신의 신앙을 낙관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어, 주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있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 함부로 하기 시작하는 나쁜 근성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주를 위 해 죽을 각오를 하기만 하면 그 다음은 다 괜챦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책망하신 다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16:24절을 보십시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 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나온 말씀인지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주를 위하여 순교 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너희들은 내 말을 들어라!'는 식으로 설치는 베드로를 주 님께서는 그게 이니라고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순교의 신앙을 그런 식으로 써 먹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를 사랑하여서 목숨까지 내놓고 주를 위하여 앞장서서 단번에 주를 위 하여 큰 일을 이루고자 앞서 나가자, 그런 식으로 주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 16:25-27) 누구든지 제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 하여 제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 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에 대하여 자신이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신 앙에 있어서 가장 강한 점이며 자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자신감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베드로와 같은 열심이 있기 때문입니까 주를 향한 충성심과 정 열을 바쳤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을 마다하시고 도리어 사단이라고 준엄하게 책망하셨 습니다. 요한도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통과하려고 하였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서 제지를 당하시자 큰 열정과 충성심으로 화를 내며 저들을 불살라 진노를 퍼붓자 고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누구시관대 너희들이 감히 그 앞에서서 방자 하게 행동하게 할 수 있느냐 그렇게 무례하게 굴 수 있느냐며 주를 위해 편든 것 입니다. 이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 했습니까 도리어 요한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 그의 전신앙을 마무리 하는 말년에 이르러서 오직 사랑 이외에는 할 말이 없게 된 것입니다. 불같이 무서운 성미와 주를 위한다는 뜨거운 열정으로 저주와 징계를 서슴없이 휘두르려고 하였던 그에게 이제는 신앙의 최고 절정에 이르 자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다스릴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옳고 그른 것을 따 져서 벌 줄자에게는 벌을, 상 줄자에게는 상 주라고 하십니까 부지런히 그것을 가 려내라고 하십니까 도리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 가 할 일은 심판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진리들이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까지 십자가를 지고 당해주고 져주고 섬겨줌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라고 하십 니다.

마태복음 11:28-30절을 보십시다.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 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 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기서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대신 져 주겠노 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무엇만 가르쳐 준다고 하십니까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 준 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짐지는 법을 무엇으로 가르쳐 준다고 되어있습 니까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로 가르치십니다. 그렇게 배우면 너희가 쉼을 얻는답니다. 왜 쉼을 얻는답니까 그것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내 짐은 쉽고 가볍답니다.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진 짐을 가볍다고 할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럴 수 없습니까 예수님께서 얼 마나 그 짐이 어려우셨으면 게세마네 동산에서 담방울이 빗방울 되듯 세번씩이나 기 도하셨겠습니까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비켜 지나가게 하옵소 서'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에서는 뭐라고 울부짖었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니 참으로 쉬운 길이 아닙 니다.

그러나, 여기 말씀에는 분명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에 내 짐을 지고 내게 배우면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힌트와 열쇠는 이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라면 마음이 어떻다 는 것입니까 쉽게말해 억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의 원 하시는 바요, 주님 자신도 십자가를 지는 일을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을 가로막는 것은 사단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꾸 중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되는 자들인데, 그 짐을 가볍게 여기느냐 아니면 무겁게 여기느냐 하는 싸움이 여러분 들에게 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나쁜 형태가 남에 게 짐을 지우고 자기는 뒤에서 따라만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짐 을 회피하는 바람에 그 짐이 나한테까지 넘어왔다는 아우성을 빼고나면 교회는 싸울 일이 없습니다. 참된 신자의 길에는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가 좀 더 잘했 더라면, 장로가 좀 더 잘했더라면, 집사들이 좀 더 잘했더라면, 누가 누가 좀 더 잘 했더라면...'하는 이야기는 요한복음서의 기록 방식대로 하자면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제자들의 부족한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알기는 알되 아직 제대로 알지 못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분이시며 무엇을 위하여 오신 것인지를 아직 제대로 잘 알지 못하는 어린 신앙입니다.

베드로의 아우성에 대하여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하나님의 일에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신앙입니까 고린도전서 6장에 가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전6:1-11)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 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 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 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 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 하는 자나 탐 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 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 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여기서 뭐라고합니까 서로서로 싸워 이기려 하지 말고, `당하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 만큼 놀라운 이야기도 없습니다. 싸움이란 본시 서로 부딪칠 때에 나는 법 입니다.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신자의 세상의 삶의 위치가 바로 하나 뿐인 손바닥인 것입니다. 다시말해, 세상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물거든 물리라 는 것입니다. 신자가 불신자를 낚아서 교회로 데려오는 방법이 기독교에서는 희한하 게되어 있습니다. 신자가 세상에 나가면 세상은 다 뭅니다. 물어도 비명을 지르지 않으니까, 언제까지 비명을 지르지 않나 보려고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그러면 우리 신자들은 자연히 교회로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교회까지 물은 것을 놓지않고 물고 늘어지다보니 결국 저들도 주님 앞에 잡혀 오는 것입니다. 마침내 자신들이 물 고 있던 것보다 더 놀라운 주님을 발견하고 물은 것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기만 하면 다 때려서 쫓아버렸으니 교회에 와보면 언제나 자신 밖에 없는 신자가 많습니다. 이것이 열매 없는 신자입니다. 바칠만한 무게를 지탱할 만한 일이 없다면 무엇때문에 기둥을 세웁니까 의자가 무거운 사람이 앉아서 힘들 다며 투덜거리다가 못해 밑에서 쿡쿡 찔러댄다면 내다 버리지 누가 그 의자에 앉겠 습니까 여러분, 신자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뒤를 쫓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와서 헌신하 신 일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처럼 당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변한 사건 중에서 사도행전 5장에 가보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 들이 예수님을 전하다가 잡혀서 옥에 갇혀 매맞고 놓여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 기서 뭐라고 묘사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 행 5:40-41)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아 당하는 일에 합격점을 받은 것을 기뻐하였다고 합니 다. 왜 이것이 기쁜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요, 하나님이 법칙이 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비밀일 안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생명을 만들어 내는 그 법칙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제 더 이상 자기를 보호하지 않아도 괜챦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쓰실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 자기 의 생각, 사람의 생각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사도 바울의 이같은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전4:9-13)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 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 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 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 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 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무엇을 하려는지 아십니까 우린 피 뭍히는 씨앗이요, 뿌 려지는 거름입니다. 이 영광된 직분을 아십니까 이 길은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감히 주께서 걸으신 길을 잇게 하시는 이 놀라운 사명과 축복에의 권면을 아십니까 신자의 제일 못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십자가의 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죽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머리를 쳐들고 기어 오르는 것은 뱀밖에 없습니다. 신 자는 그 머리를 수그리고 집어 넣는 양떼입니다.

<결론> (고후4:7-12) 우리가 이 보배를 질 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 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 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 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뽑은 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 의 죽음으로 이루십니다. 이러므로 주의 일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이나, 세상 것 이 아닌 것으로 이루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 교회 안에 들어올 때에 가지고 오 신 지식, 부, 권세나 그 무엇으로도 되지 않는 곳입니다. 잘 산다고 뽐내지 마십시 오. 잘났다고 우쭐거리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있으나, 없으나 매일반입니다.

왜 있는 것이 자랑이고, 없어서 야단입니까 왜 배운 것이 자랑이고, 못 배운 것이 또 아우성입니까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진심 하나 밖에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마 음을 내놓으십시오! 여러분의 욕심과 여러분의 잘난 것으로 하나님께 무슨 도움을 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칼을 빼어 든 제2의 베드로가 될 뿐입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죽는 일입니다. 제발 죽읍시다. 그것이 십 자가의 길이요, 주님의 뒤를 쫓는 자의 길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만이 열매가 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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