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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첫 표적 (요 02: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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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첫 이적입니다. 이 이적은 예수님의 이적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이적 가운데서도 특별히 기억되는 이적 중의 하나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기지고 계셨으며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첫번째 기적을 술을 만드는 일을 하셨을까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깊은 관심사입니다. 술뿐만 아니라 담배에 대한 의견도 분분한데 기독교가 술 담배를 하신다고 해서 천국 못 가는 것 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신자로서 절제와 덕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지 이것이 구원 문제와 직결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술 담배를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닙 니다.

왜냐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술 담배를 안 하는 것 으로 상표화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술, 담배를 공공연히 해버 리면 예수 믿는 것과 다른 종교를 섞어도 좋다고 할 만큼 혼돈을 하게 됩니다. 그 러므로 그같은 인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절제하여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 다.

이제 왜 예수님께서 그 첫번째 이적으로 술을 만드셨을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론> 성경에 보면 술은 여러가지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술 취해서 좋지 않 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술은 언제나 기쁨과 환희에 관한 상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잔치하는 날 술이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에 이적으로 포도주를 만드셨 다는 것은 기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죄인들에게 있어서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 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기대할 미래가 없으며, 기대할 축복이 없다 는 것입니다. 잔치가 끊어지고 기쁨이 끊겨진 절망적인 상태가 곧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우리 인생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찾아 오셔서 잔치를 회복시키시고, 기다릴 것이 있고 소망할 것이 있는 자로 고치시겠다 는 뜻으로, 그 첫번째 이적으로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말씀은 이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가운 데 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 2:3-4절에 보면;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 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는 좀 이해가 잘 안되는 말씀을 하시고는 이 이적이 행해집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을 보고 저들에게 술이 없는 모양인데 네가 좀 어 떻게 해 주어야겠다.하는 말을 합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의 모친께서는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에 뭐라고 대답을 하시느냐 하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말투를 보아서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의미인데 말은 그렇게 해 놓고서 이적은 어머니의 간구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이 상당히 까다 롭습니다.

이 까다로운 문제 속에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이 무었을 의미하는 지가 들어있습 니다. 그러므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 나이다.라는 이 두 마디를 풀지 않으면 본문의 기적의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우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하는 말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을 쉽게 보면 '포도주가 떨어진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로 보입니 다만 원문을 보면 '여자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즉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은 이렇 게 하셨지만 이적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더 어려워 지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내 때라는 때에 관한 기록이 일곱번 나옵니다. 그 중에 첫번 째 기록이 오늘 본문이고 그 다음 (두번째)가; 요7:30절,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 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다음 (세반째); 요8:20절,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 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다음 (네번째); 요12: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리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다음 요12:27절,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다음; 요16:32절,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일곱번째); 요17: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 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 소서.

이상이 때에 관한 일곱가지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때는 어느 때를 말하는 것일까 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는 때를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그 사건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지 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주께서 잡혀갈 것이고 제자들은 그 를 버리고 다 도망 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이렇게 때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과 때가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을 이런 각도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을 통하여 이 사건 때문에 예수님께서 결과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 무었이겠습니까 예수님게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으로 인하여 그 기적을 일으키기 전과 그것을 일으킨 후에 받으시는 대접 가운데서 가장 달라지는 것이 무 었이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유익이 있을 법도 한데 예수님에게 있어 서는 이 일이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같은 예수님의 입장을 이해하려면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시는 어떤한 기적듣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는 일차적으로 부 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명하시는데 사 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 러 오셨으며,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러 오신 것에 대한 증명으로만 사용되었 을 뿐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의 모든 이적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대 속자와 메시야로 오신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예수님 자신의 명예나 영광 을 위하여 기적을 일으키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나 혼인 잔치는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써 드러내 놓고 예 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증명하는 첫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광과 갈채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는 길의 첫 발자국을 내 딛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은 축복과 영광과 갈 채의 시작이 아니라 죽음과 고통과 어려운 일로 들어서는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이 것을 바로 이해 하기를 바라는 의도로서 예수님의 대답이 좀 특이하게 나타난 것입 니다.

그래서 여자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모친의 입장에서는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너가 좀 어떻게 해봐라는 아주 즉흥적인 발상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대답이 의 미하는 바는 나는 나의 영광을 드러내며 내 자신을 증명하려고 일을 하러 온 자 가 아니고 십자가를 지러 온 자입니다. 나는 병든 사람이나 고치고, 귀신들린 것을 쫓아주고, 죽은 자를 살려주고 하는 하나의 문제들에 대해 도움이 되려고 온 자가 아니라, 죽어 마땅한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된 인생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온 자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요구를 하려면 그런 차원에서 요구를 하십시오. 라는 말씀입니다.

여자여,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의 문제를 때우고 해결해 달라는 것 밖에 안 됩니다. 나는 그런 일을 위하여 온 자가 아닙니다. 여자여,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이 과연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지금 할 일이 포도주를 만들어 내 영광을 드러내고 그저 포도주가 없으니 요긴하게 포도주나 만 들어 주는 일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라는 뜻이 내포되 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포도주를 만들어 줄 수 없다는 뜻으로 하시고는 포도주를 만들어 줍니다.

결국, 이렇게 결국은 포도주를 만드실 양이면 예수님 어머니께서 포도주가 떨어졌 다고 하더라 했을 때 좋은 말로 아, 그 래요 그럼 제가 해결해 드리지요하면서 포도주를 만들어 주지 않고, 굳이 안들어 주실것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해 놓고서야 만들어 주셨겠습니까 어머니의 말씀에 '네, 알았습니다' 하고 포도주를 만든 것이나, 먼저 애매한 두마디 말씀을 하고 만든 것이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이 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결과는 똑같지 않는냐고 반문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 모친께서 처음에 요청해 왔을 때에 별다른 말씀 없이 기적을 나타내는 것과 예수님의 두 마디 반문을 통해서 기적을 나타내는 것은 우리가 신자가 된 다음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아주 큰 차이 가 생깁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신의 축복만을 추구하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섬 기는 자로서 예수님의 닮은 모습과 향기를 드러낼 것인가 하는 것이 예수님의 모친 의 관점에서 기적을 보느냐 예수님의 관점에서 기적을 보느냐에서 결정되는 것입 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사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러 오셨고 우리 영혼을 축복하러 오셨으며, 우리를 하 나님과 화해시키고 천국 잔치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가시밭 길의 그 첫 출발의 표시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그의 수난의 시작은 우리에게는 잔치가 시작되는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수난과 잔 치는 서로 엇갈려 쌍곡선을 이루면서 출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누구나 예수님을 알게 된 이후에 그가 가진 어떤 기적과 축복들도 남을 위해 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이나 자신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요 청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신자를 두번 다르십니다.

한번은 그 개인이 하나님 앞에 항복시키는 것으로 한 번 다루십니다. 우리가 하나 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의 자녀가 되는 것으로 항복 하는 것입니다.

또 한번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 살 때에는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이 세상적으로 볼 때에 행복도 아니요 평안함도 아닙 니다. 결국에는 십자가를 지는 자리에 까지 들어가는 일을 시작하는 길입니다. 그 에게 나타나는 모든 기적과 일들이 자신을 증명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화려하게 치장하기 위해서 허락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하자 최초로 하신 일 이 세례 받으신 일이고 그 다음이 40일 금식후 마귀에게 시험 받으신 일입니다. 두 번재 시험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명하여 떡이 되게하라.

고 했을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돌로 떡이 되게하라는 시험을 거부하 시고도 나중에는 무슨 기적을 일으켰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사 실은 서로 대치되는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마귀가 성전 꼭대기에 올려 놓고 뛰어내리라 하나님이 천사들을 명하여 너를 다 치지 않게 하리라.했을 때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셨습 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왜 마귀의 시험에 대해서는 일절 대꾸도 안 하시면서 그의 공생에서는 오히려 그 것보다 더 엄청난 일을 행하시느냐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마귀가 요구하는 시험들 은 모두가 자신을 증명하는 시험들이요, 자신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시험이었기 때 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부름 받지 않으셨습니다. 뒤에 행하신 모든 이적 들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행하신 것이 었습니다. 오병이어를 일으키심으로 예수님이야말로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시고 이어서 내 몸믈 먹으라는 말씀과 연결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 익한 기적이었습니다.

바다 위를 걸으시는 것은 자연을 명령하시는 분인 줄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 기 위해서 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가나 혼인잔치에서 이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자 신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저 분을 보라,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분이다.하는 관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 서 갈채를 받고 추앙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해되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눅12:13절 이하의 사건입니다. 한번 찾아 보십시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토록 많은 기적을 보이신 것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우 리가 누구며 (죄인)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서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습니까 주여, 오셔서 우리 형이 아버지의 유산을 몽땅 차지하고서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 니다.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우리는 이런식으로 밖에 예수님을 초대하지 않는다 는 이야기 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초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제일 많이 부르는 것은 궁극적인 목표, 목적, 생명, 진리의 차원이 아니라 나의 게으름과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늘 예수님을 찾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생애를 사시는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좇았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는 다 도망가 버리고 사도 요한 한 명만 십자가 밑 에까지 따라왔습니다.

왜 아무도 그를 좇는 자가 없었습니까 마16:16절을 보십시다. 시몬 베드로가 대 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아주 유명한 신앙고백입니다.

21절을 보십시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 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 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를 붙 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 다.할 때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못하는 백성들입니다. 사람의 일 밖에 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이미 알고도 그가 무었을 하 러 오셨는지를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베드로를 보십시오.

우리가 베드로 보다는 좀 나을 것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가장 많은 일들이 무었인가를 스스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증명하고 싶은 일을 위해 얼마나 많은 기도 제목들이 나오고 있는 가를 보시면 확실해 집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신자란 신자로서 하나님께 항복한 순간부터 그에게 일어나는 어떤 기적도 어떤 사건도 자신을 위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신 적이 없었듯이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하며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신 것처럼 모든 신자는 부름받는 순간부터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할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말씀하셨습 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달콤한 사탕만을 나눠 주시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여러가지 부족한 것 중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기적이 점점 없 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기적은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 속에 서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등등의 기적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돌아온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안 생기는 기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겸손해 질 수가 있단 말인가 저렇게 짓밟히고도 저렇게 살 수 가 있는가 하는 기적이 없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 을 죽이고 십자가를 지고 복종하면서 걷는 길, 오로지 다른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 의 영광만을 위하여 자신의 명예와 건겅과 자존심을 묻어버리는 기적이 없다는 것 입니다.

모두가 바깥 세상에서 들어온 기적에 현혹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잡히지 않는 신기루입니다.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썩어빠진 세상 것이 아니라 거듭 난 영혼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매일 매일 잔치를 베누는 것과 같은 감격 과 보람으로 신앙의 길을 가야 합니다. 비록 힘이들고 피나는 전투가 있지만 이것 신자의 최고의 영광입니다.

<결론> 이제 우리 모두는 두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마리아가 될 수도 있고, 예수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미련하게 선택하지 말라고 기록된 말씀입니다.

사람의 미련한 것같이 한심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 을 두드리고 일깨워서 힘을 다하여 새 결심을 해야 합니다.

미련한 자의 삼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무식ㅎ야 합니다. 둘째, 고집이 세야합 니다. 자기보다 잘난 사람의 충고에 대하여 절대로 귀를 귀울이지 않을 만큼 고집 이 셉니다. 셋째, 미련한 사람도 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는 문제에 대하 여서는 게으릅니다. 이 세가지를 구비하지 않은 사람을 미련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바로 이 세가지를 골고루 구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미련해 지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그 말씀을 따르는 자에게는 축복이지만 반면 외 면하는 자에게는 저주와 재앙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여러분은 참으로 복된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 나, 초대 받은자답게 살지 않으면 이 모든 축복과 운명이 비참해 지고 맙니다.

이제 헌신과 순종과 섬김으로 주께서 기뻐하시는 깅르 걷기로 다짐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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