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 (요 03:16-18)

첨부 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피흘리며 살 찢기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무었에다 견주어 비교 하더라도 그 큰 사랑을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을 씌우시며 홍포를 입히시고 채찍에 맞게 하시며 피흘려 돌아가시게 하셨다는 이 엄청난 사실에서 우 리는 그 무었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 님의 사랑의 크기에 관해서는 성경에 여러가지 증거들이 있습니다만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살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롬5:6-8절 까지 보십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는 자를 위하여 죽으 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 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 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착하고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혹 죽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원수를 위해서는 죽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원수같은 우리들을 위하여 죽어 주신 것 입니다.

도대체 이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로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것입 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레미야 31장에서는 조금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렘31:31-33절을 보십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 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 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 었어도 그들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 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 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기에서 새 언약과 옛 언약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내용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하는 이 언약은 언제나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언약을 이루시는 방법에 있어서는 대단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 랑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남편이 되어 손을 잡고 인도하였어도 말 을 듣지 않더라.는 말씀에서 이 보다 더 가깝고 직접적인 간섭은 아마 없을 것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네 남편이 되어 손을 잡아 끌었는데도 말을 듣지 않았으니 할 수 없이 내가 너를 때릴 수 밖에 더 있겠느냐 우리 같으면 이렇게 말 이 나와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연히 저주가 내려지고 심판이 시작되어야 할 텐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더 강력한 방법으로 일을 이루시겠다는 결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부름받아 열방 중에서 하나님의 빼신 바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기억하신 바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하나님 앞에서 순종한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 습니다. 늘 배반만 일삼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내용으로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스데반의 설교가 있습니다. 스데반 이 뭐라고 설교했습니까 너희가 한번 이라도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들은 적이 있느냐 너희가 한 번이라 도 하나님 마음에 맞게 행동한 적이 있었느냐 옛날부터 온 선지자 중에서 너희가 기쁜 마음으로 '네'하고 항복하고 순종한 적이있었느냐 이사야를 톱으로 켜서 죽 이고 엘리야를 광야로 내 좇아 버렸고 언제 너희가 제대로 그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 그래도 안되니까 그의 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그 아들마저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리지 않았느냐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많 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신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꾸짖으시고 책망만을 계속 하신 것입니다.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참으 로 무섭고 아픈 길을 걷도록 하셨습니다만 그것은 저주도 심판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무었입니까 그것은 도대 체 이럴 수가 있나 어쩌면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놀 라운 사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여 전히 다시 찾아오시고, 끊임없이 말씀 하시며, 더 짙은 사랑으로 또 다시 될 때까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놀라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다가 수 없이 매를 맞아 정수리 부터 발끝까지 온 몸이 상처 투성이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 자 이제는 바벨론에 팔 수 밖에 없었고, 미디안에 팔 수 밖에 없었고, 앗수루에 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지경이 되도록까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시거나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토록 완악함의 극치를 달리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시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우리는 쉽게 이런 말란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 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 마음에는 늘 하나의 질문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토록 집요하고 한이 없으신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다 면 지옥은 왜 만드셨느냐고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결코 그 앞에서 도망 갈 수도 없고 실패 할수 도 없다.고 그러면 꼭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지옥 갈 사람은 창세 전에 지옥에 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까라는 겁 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지옥에 갑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오늘 본문 18절 말씀에 의하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 을 받은 것이니라.하는 말씀처럼 이렇게 믿지 않아서 지옥 갑니다.

그러면 또한 이런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고 지옥에 가는 사람은 자기의 책임 때 문입니까 성경이 구원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에 예정과 사랑을 도입해서 설명하고, 그 반대 로 지옥에 관해서 설명 할 때에 예정이 없다고는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이 구원에 관하여 설명 할 때에는 사랑과 예정을 말합니다. 그리고 심판을 받 을 자들과 주를 믿지 못하여 구원 얻지 못한 사람들을 설명할 때에는 꼭 믿지 않았 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 설명은 우리들을 이해시 키기 위하여 동원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말씀에 항 복 안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다 보면 하나님께도 모순이 있는 것처럼 느 껴질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에덴 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서는 전지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분명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줄 아셨을 텐데 왜 서악과를 만들었을까 그래 놓고서는 따먹은 죄를 왜 인간에게 돌리시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게 됩니다. 그래 서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의견이 분분 한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만드신 이도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고 사탄도 하나님이 허락했기 때문에 사탄이 되었을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당연히 나옵니다. 만약에 사탄이 되려 고 했을 때 제정신이 번쩍 나도록 충격을 주었더라면 어찌 사탄이 되었겠는가 아 니면 하나님께서 무슨 약점이 있었기에 이렇게 반란자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런 식으로 맞선다면 아무 할 말이 없어 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만일 그것이 다 사실이라면 하나님을 안 믿겠습니까 이것은 아 주 이상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비치는 하나님의 모습에 모순이 있고 약점이 발견된다고 하나님 믿기를 중단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질문을 우리는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가 하나님을 믿고 이 자리에 오게된 것이 하나님을 이해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항복했기 때문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머리로 다 이해 하여서 믿게된 것이 아니고, 어느 순간부터 항복했기에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말씀을 듣는 것은 이것 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나의 이성과 지식에 완전히 이해되 어져 믿어야 할 정당성이 입증되었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이해가 잘 안되 고 연결이 잘 안되는 듯한 헛갈리는 말씀이 있는것 같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면 무조건 믿기로 항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 생각과 내 설명과 내 지식이 하나님께 누를 끼치고 해가 된다 면 차라리 무식한 쪽을 택하겠다는 것이 우리들의 근본적인 자세입니다. 이것을 신 앙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면 못 믿지만, 하나님께서라면 믿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사람의 말과 설명으로 또 한 이성에 부합하도록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체험적인 확신과 믿음이 있기에 그렇게 주장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분위기 속에서 사느냐 하면 지식 일변도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따 라서 과학이 만능이요, 가능한한 합리적이고 이론이 정연한 이야기만 하고 싶고 믿 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론이 정연하고 과학 적이라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이것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해란 나와 동등하거나 그 이하의 내용일 때에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큰 물건 을 작은 보자기로 쌀 수 없듯이 우리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는 하나님에 대하여는 이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으며, 오직 믿는다는 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이해력으로 감당하기에 는 너무나 엄청난 분이시기에 항복할 뿐입니다. 이것을 다른말로 신뢰한다, 믿는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낳은 자식도 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닌데 어떻게 하나님 다 이해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설명되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믿 음과 구원의 반열에 서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 을 말로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내 영이 알 뿐입니다. 비록 머리로는 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래서 어딘가 좀 이상하고 불안 해 보여도 '그래도 믿을 수 있습니다.'는 것이 우리의 고백이요, 간증입니다.

<결론> 우리가 매 순간마다 감격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 하였다는 것 보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엄청난 분이시기에 우리의 지성과 이 해의 폭으로 감히 감쌀 수 없기에 과학적인 설명과 지성적인 논리로는 파악이 불가 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 밖에 계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일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이 불가능이 그리 스도 안에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게된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이 되어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이해 할 수 없음에 도, 증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있고 알 수 있는 이 기적을 하나님께서 는 내 속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과 기적을 끝까지 간직하여 흩어짐이 없이 세상의 모든 유혹으로부 터 믿음으로 승리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