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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새보다 귀한 존재 (마 10: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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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는 본문 31절을 읽으면서 착찹한 생각들이 머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 하필이면 인간의 존지가치를 참새에다 비교했을까하는 점 때문입니다. 가령 너희는 63빌딩보다 귀하니라 했다든지 평당 1억을 호가한다는 명동복판의 1만평의 땅덩이보다 귀하니라 했다든지 아니면 수천억 달러어치의 다이아몬드가 매장돼 있는 광산보다 귀하다고 했다면 모르겠지만 한 입도 다 차지 않는 참새에다 비교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선뜻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엔 유사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둘다 피조물입니다.
창세기 1:22을 보면 창조 다섯째 날 공중의 새들을 만드셨고 1:27을 보면 여섯째 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둘째 둘다 시한부 존재입니다.
물론 참새보다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깁니다. 그리고 월 생활비도 사람이 더 쓰며 삽니다. 그러나 살다가 죽는 것은 참새나 사람이 다를게 없습니다. 오히려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참새 쪽이 훨씬 편하고 우월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참새는 비행기 타지 않아도 하늘을 훨훨 날아 다니며 저 갈 곳을 갑니다.
피땀 흘려 농사 짓지 않아도 먹는 것 걱정이 없습니다. 산부인과에 가지 않아도 새끼 낳고 삽니다. 그뿐입니까 아파트 전세돈이 없어도 되고 비싼 집을 사지 않아도 잠자고 살 곳 걱정이 없습니다. 음대 성악과에 가서 공부하지 않아도 절대 음감으로 노래를 불러댑니다. 얼마나 편한 생활입니까.
셋째 둘다 하나님의 보호로 살아갑니다.
본문 29절보면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고 31절을 보면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했습니다. 참새 목숨도 하나님 손에 달려있고 인간의 생명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들에 핀 한 포기 풀도 하나님이 기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새나 사람이 같은 존재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하지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왜 인간이 참새보다 귀합니까

1.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도 피조물임엔 틀림없습니다만 그러나 참새는 영혼이 없습니다.
요한 칼빈은 욥기 3:16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머니의 몸 속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것은 아직 영혼은 아니었다.물체가 어머니의 몸 속에서 형태를 갖추고 있을 때 하나님의 영혼을 그속에 넣어주신다. 그때 생명의 씨가 현존하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고. 인간의 몸은 출생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창조되지만 영혼은 육체가 출현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직접 창조해 주신다는 것이 칼빈의 견해인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창조하십니다.
둘째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은 썩고 매도되고 유한합니다만 영혼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썩거나 매도되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불멸합니다.
셋째 타락한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됩니다.
상품가치로 본다면 사람보다 훨씬 비싼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한 그루에 3천만원짜리 나무가 있는가 하면 천만원짜리 개가 있고 그림 한폭에 200만 달러를 호가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만한 상품가치가 없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평가되고 인정되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최신 디자인으로 구성된 자동차라고 해도 엔진이 없으면 무용지물인 것처럼 영혼없는 육체는 쓸모가 없습니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현상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죽었다는 것은 영혼이 육체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영혼 떠난 육체, 그것은 찬바람 도는 시체에 불과합니다. 저는 언제가 종합병원 영안실에 들어가 본 일이 있었습니다
마침 입관을 기다리는 몇 구의 시체가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 순간 결코 기분이 좋을리 없었습니다. 분위기도 그렇고 기분도 그랬습니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50대 사장, 암으로 세상을 떠난 40대 부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20대 초반의 처녀의 시신이었습니다만 반갑다거나 통성명이 불가능 했습니다. 이유는 영혼이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자연주의자들은 영혼을 유전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철학자들은 육체가 출생하기전 영혼은 이미 본질적이며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가 결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체도 영혼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가르쳐줍니다.

2.하나님을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타락한 영혼이나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합니다. 참새가 제 아무리 지능 지수가 높아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합니다. 돌고래도 물개도 예배행위는 없습니다. 인간만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유는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24을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것은 영적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개나 돼지에게는 신령과 진정이 없습니다. 사람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만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몇 가지 바른 예배태도를 생각 해보았습니다.
첫째 예배 자체를 감사합니다. 그래야 기쁘고 즐거운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둘째 가장 소중한 사건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일이라면 우선 먼저 해야합니다. 틈나면 볼 일보다가, 딴일 다하고 난후에 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 합니다.
작년 여름 가족과 함께 휴가를 다녀온 교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8월 14일 오후 차를 직접 몰고 가족과 함께 부산 해운대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10시간만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며 쉬며 떠들며 먹으며 피곤한 줄 모르고 즐거웠다는 것입니다. 비를 주룩주룩 맞으며 밤낚시를 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청승이오 돈이 나옵니까 밥이 나옵니까”라고. 그 사람의 대답은 “모르는 말씀, 해보지 않은 사랍은 그 맛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하려 나오는 길은 두 시간만 넘어도 짜증을 부립니다. 마치 누구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나가주는 것처럼 생색을 내고 투정을 부립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행위가 피곤하고 투정부릴 사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청와대 오찬이나 만찬에 초대되어 대통령과 악수를 나눈 뒤 식탁에 둘러 앉아 그 유명한 칼국수 한 그릇을 먹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살펴 보십시오. 하나같이 만족스럽고, 자랑스럽고 그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는 그런 표정들입니다. 예배는 소중한 사건입니다. 영적사건입니다.
셋째 정성으로 드려야 합니다. 집에서 떠날 때부터 이미 예배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를 몰고 오든지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하든지 평안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와야 합니다. 성가대가 계단을 오를 때도 예배가 계속되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성을 기울여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 시작을 알리기 위해 종을 칩니다. 그전까지는 준비찬송이라고 해서 계속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나 준비를 위해 찬송을 부르는 것은 예배학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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