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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나의 은혜 (고전 1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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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을 살면서 사람은 자신이 지나온 날을 회고할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 아마 이 점이 동물과 다른 인간다움의 일면 이 아닌가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 가 생일입니다. 더욱이 오십 세를 넘긴 분들이 맞는 생일의 의미는 젊은이들의 생일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지 나온 기나긴 날들을 되돌아보고, 앞날을 진지하게 내다보는 계기가 되어 줍니다. 또 하나, 해마다 맞게 되는 연말연시 역시 자연스럽게 우 리의 삶에 대한 반성과 평가, 그리 고 계획의 지평이 되어 줍니다.
'그러나'의 은혜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 의 나이는 40대 중반을 조금 넘었 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반적입니다. 그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고부터의 10여 년의 세월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봅시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이 말씀에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다'에서부터 '오 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강한 의미 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은 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은혜는 하나님이 아무런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선물입니 다. 은혜는 기독교의 대명사로서, 복음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 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 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싶 어서 애를 쓰는 데도 결국 믿지 못 하고 세상 떠나는 사람이 우리 주 변에 많지 않습니까 그들에 비해 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공로도 없는 우리에게 영원히 사는 축복을 주시려고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프리 패스를 주신 것,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7절에서 이런 자들을 일컬어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 게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누 구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 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바울이 말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가 받은 구원의 은혜와 더불어 구원받은 자 신의 삶을 통해서 체험한 은혜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 다. 저는 그것을 '그러나'의 은혜라 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9절 과 10절을 연결하는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바울 자신이 받은 은혜의 색깔을 선명하게 해 주고 있기 때 문입니다. 한 번 보세요. 9절에서 그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여기에서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말한 '사도 중의 지극히 작 은 자'라는 인식은 정확합니다. 바 울은 항상 자신에 대하여 사도 중 의 말째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 다.
베드로, 요한과 비교하면 그가 자신을 과장하거나 겸손하게 보이 려고 일부러 꾸며서 한 말이 아니 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비록 학식은 없었 다고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으로부 터 직접 부름을 받아 3년 동안 그 곁을 떠난 적이 없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모습을 지 켜본 사람들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십 일 동안 음식을 나누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했 을 뿐 아니라, 주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을 실제로 본 사도 중의 사도 입니다. 그에 비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 외에는 예수님을 따라다닌 적도, 예수님께 배운 적도, 주님의 십자 가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습니 다.
또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 를 핍박하였다고 말합니다. 그가 고백한 대로 그는 믿는 자들을 옥 에 가두고 고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시켰으며, 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 무서 운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바울의 자격지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전과 만 보아도 그는 사도라는 영광스러 운 직분을 받을 만한 인물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10절이 무슨 말로 이어집니까 '그러나' 입니다.
그 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 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 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 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 나님의 은혜로라.
즉 바울은 자신 이 죄가 많아서 사도가 될 자격이 없으며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 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아무 것도 문제로 삼지 않고 그를 사도 로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 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가 '그 러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에 빚진 마음
우리는 바울의 고백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 인 은혜야말로 오늘의 그를 형성한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의 연약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며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자기가 어떻게 사도로서 쓰임 받을 수 있었겠느냐 는 그의 고백에서 우리는 바울의 심정에 좀더 접근해 볼 필요를 느 낍니다. 그에게 죄책감이 남아 있 었던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 다. 비록 주님 앞에 모두 용서받았 지만, 예수를 핍박하고 사람까지 죽였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위시하여 그가 기록한 성경들을 모 두 검토해 보면, 말로 다할 수 없 는 사죄의 은총을 체험한 그가 죄 책감에 짓눌려 있었다고 보기는 어 렵습니다. 그렇다면 열등감이었을 까요 물론 그런 감정도 없지는 않 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다 고 큰소리 쳤던 바울이 열등감 따 위에 끌려 다녔다고도 생각되지 않 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러나'라고 외치는 바울의 심정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악하고 미천한 자기를 사도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압도당한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는 마음, 곧 은혜에 크게 빚진 자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이 많 은 사람 가운데 어떻게 나 같은 자 를 하나님께서 복음의 증인으로 삼 으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을 까'라고 생각할 때마다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나님 의 은혜에 빚진 마음이 숨쉬고 있 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 전과가 있기 때문입니 다. 하나님께 대하여 흠 없이 완전 한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 대부분 은 예수를 믿기 전에 무슨 방법으 로든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하늘 꼭 대기까지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향 해 주먹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습니 다.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이런 죄 저런 죄 지으면서 성령을 근심시키 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과거 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죄도 죄대로 갚 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못남을 있는 그대로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따 지기를 원하셨다면 오늘의 우리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현재 우 리가 누리고 있는 건강, 몸담고 있 는 가정, 그리고 생업을 돌아보아 도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이상으로 대우하셨지 결코 그 이하로 대우하 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 다. 나 이상의 삶을 사는 것, 이것 이 바로 '그러나'의 파격적인 은혜 입니다. 바울이 받았던 그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현대 문 명의 속성인 과학주의 사고에 물들 어 있습니다. 무슨 일에나 그럴듯 한 이유를 둘러대기 잘한다는 말입 니다. 우리 나라의 일 년간 자동차 사고 발생 건수는 어마어마합니다. 그 와중에 내가 아무 사고 없이 일 년을 보낸 것은 사실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합리주의 적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 십니까 그들은 무사고의 원인이 자신의 능숙한 운전 때문이라고 믿 습니다.
나는 운전 경험도 많고 예방 운전도 조심해서 하기 때문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도 피할 수 가 있다. 또한 절대로 음주 운전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고를 내지 않 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건강에 대 해서도 비슷한말을 잘합니다.
내 가 이만큼 건강한 것은 규칙적인 생활을 할 뿐 아니라 음식도 골고 루 먹고 과식하지 않으며, 일주일 에 한 번씩은 맑은 공기 마시러 산 엘 다녀오기 때문이다.
또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 할아버 지가 과거에 밭뙈기 하나 있는 것 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했다는 소리 를 들었다. 내가 이만큼 남부끄럽 지 않게 살고, 자식들을 제대로 키 우게 된 것은, 그 복을 자손인 내 가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말들은 인과응보의 원칙을 염두에 두고 하는 합리주의 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전적으로 잘 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잘된 것은 무엇이나 자신의 공로로 돌리 고 있다는 점에서는 위험한 요소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런 생각은 마치 한두 살 먹은 어린 애가
내가 우유도 잘 먹고, 오줌 과 똥도 잘 누고, 잠도 잘 자니까 이렇게 건강한 거야.
하고 으시대 는 것과 비슷합니다. 얼마나 가소 롭습니까 하물며 온 우주를 창조 하신 하나님, 우주를 보존하고 지 키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생사 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가관이라고 생각하시겠어 요 이 어린애의 말처럼 규칙적으 로 잘 먹고 소화를 잘 시켜야 건강 하게 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생 리적인 활동이 아이를 성장시키는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와 같 은 생각들은 은혜를 거부하는 공로 주의에 속합니다. 은혜란 조건 없 이, 공로 없이 받아서 누리는 축복 인데, 자기 공로를 앞세운다는 것 은 모든 복을 은혜로 보지 않고 보 상으로 보는 것이 됩니다.
스톰스(Storms) 박사가 은혜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은혜 란 당신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 도 아니요, 당신의 무공로로 잃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우리의 선함과 자랑할 만한 것을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 것이 건강이든, 장수든, 부귀든 간 에 은혜일 수 없다. 또한 우리의 악하고 부끄러운 것을 따라서 주시 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은혜 일 수 없다. 은혜는 우리의 잘잘못 을 따지지 않고 주시는 선물이다. 이 놀라운 은혜주심을 감사해야 한 다.
그렇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이 무조건 주신 파격적인 은 혜로 된 것이지 내 노력, 내 선함 과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더 많이 수고하게 하신 은혜
두 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파 격적인 은혜가 있었기에 주를 위해 더 많이 수고할 수 있었다고 고백 합니다. 10절을 다시 볼까요
그 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 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 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 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 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예수님 을 알고 나서부터 전력을 다해 주 님을 위해서 일한 사람입니다. 마 치 하루종일 일거리를 찾지 못한 어느 일꾼이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마음씨 좋은 포도원 주인을 만나, 하루 일당을 받기로 하고 남은 한 시간동안 열심히 일을 하게 된 것 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꾼이 감지덕지해서 물불을 가리 지 않고 포도원 일을 한 것처럼 바 울 역시 너무 감격해서 베드로나 요한 보다 더 열심히 일했던 것입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무엇 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 충성하게 된 것은 자기의 적극적인 성격 때 문이거나 자기의 능력과 학식이 많 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파격적으로 대우하 신 '그러나'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 합니다. 바울의 말을 들으면 그가 퍽 겸손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 다. 그는 고린도후서 11장 23절과 12장 10절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 으니,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 하노니.라고 실토합 니다. 주님을 위해 이 정도의 헌신 을 한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떳 떳하게 자기 공로를 내세울 만도 한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 다. 오히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나 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라고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되어야 합 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그 러나'의 은혜로 돌려야 합니다. 우 리가 아직 건강하고 힘이 있을 때,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 고하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 니까 땀흘려 번 돈을 주님의 나라 를 위해서 헌금하는 일로부터 시작 하여 가정과 직장, 학원의 복음화 를 위해 수고하는 분들이 있습니 다. 또한 약한 자와 병든 자 그리 고 가난한 자를 찾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거나, 다음 세대를 말 씀으로 양육하기 위해 교회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수고하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수고들은 모두가 주님을 섬기는 귀 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 시오. 그들은 평생을 밑빠진 독에 물 붓듯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 망한 일에 모든 것을 털어 넣고 있 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작은 일조 차 하나님 나라의 곳간에 쌓여지는 알곡이요, 우리의 면류관에 달릴 보석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은 일에 쓰임받을 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남습니다. 이 모든 일을 '그러나'의 은혜로 설명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할 수 있습니까
바까스 박사라는 분이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침통하 게 말합니다. '박사님, 당신의 생명 은 이제 30분 밖에 남지 않았습니 다.' 그러자 그는 불편한 몸을 의 자에서 일으키더니 무릎을 꿇고 앉 아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 주님, 이 남은 30분을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까스 박사를 위대하다고 칭찬하 기 전에 그가 받은 '그러나'의 은 혜를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 죽이나 은혜가 벅차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어 떤 모양이든지 주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은혜입 니다. 은혜가 아니면 흉내조차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수 고를 많이 하는 자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내 믿음이 좋아 서, 내가 훈련을 잘 받아서, 내가 똑똑해서 이만큼 수고할 수 있었다 '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은 혜를 배척하고 내 공로를 앞세우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충성해도 주 님이 영광을 받지 못하고 자기가 영광을 받아 버립니다. 순장, 주일 학교 교사, 성가대원, 호스피스, 교 통 봉사, 그 외에도 교회 구석구석 에서 소리없이 섬기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도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이만큼 일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바울의 감 동을 가슴 가득히 소유할 수 있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타임>지에 빌리 그 래함 목사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 다. 아마도 올해 75세를 맞은 그 분을 기념하기 위한 특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파킨슨병에 걸린 그의 몸은 나날이 여위어가고, 입 속의 침도 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 1월에 일본의 전도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왜 나 같은 것으로 하여금 수많은 사 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는지 지 금도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빌리 그래함 목사만 큼 탁월한 전도자를 또 찾을 수 있 습니까 아마 수적으로 따져서 그 만큼 많은 사람을 구원한 이가 없 을 것입니다. 그처럼 엄청난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하 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하나님, 왜 저 같은 사람을 불렀습 니까라고 질문하고 싶다고 했습 니다. 그가 사생활에서조차 흠이 잡힐 만한 행위를 하지 아니한 사 람이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 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 면, 그는 자기 부인 외에는 어떤 여자와도 단둘이 식사를 하지 않겠 다는 철칙을 평생 지킨 사람입니 다. 클린턴이 주지사로 있을 때 그 부부가 빌리 그래함 목사의 집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 을 계기로 한번은 힐러리 여사가 빌리 그래함을 점심 식사에 초대하 였다고 합니다. 주지사 부인이 식 사를 함께 하자는 데 거절할 이유 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나는 당신 같은 미인과 단둘이 앉 아서 식사할 수 없습니다라고 분 명히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는 여러 면에서
내가 이 정도로 신실하니까 하나님이 대우하셔서 지금껏 날 사용하신 것이다라고 말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는
왜 저 같은 자를 불렀습니까
하고 일평생 질문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이것이 '그러나'의 은혜에 빚진 자의 심정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배우고 따라야 할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 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주 님을 위해서 수고할 수 있었던 것 도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바울의 고백은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내포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 라면 내일의 나 되는 것도 하나님 의 은혜로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 다. 우리는 이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패하지 않는 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놀라운 능력 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10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여기에 서 '헛되지 아니하다'는 말은 '유 효했다, 실패가 없었다. 능력이 있 었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성령 을 통해서 바울에게 역사 한 하나 님의 은혜는 얼마나 능력이 있었던 지 십 년 혹은 이십 년이 흐른 뒤 에도 유효했습니다. 어느 때는 바 울도 과거의 죄를 돌이켜보고 죄책 감으로 인해 두려움을 가지기도 했 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성령은 그 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의 공로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가 병이 났을 때 고쳐 주시고, 선교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극복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앞 길이 보이지 않고 소망이 없을 때 에도 성령은 바울에게 오셔서 주님 의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이것 이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에게 헛되 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이 받은 '그러나'의 은혜는 성령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 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되면 어떤 환 경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실패하 지 않습니다. 그 파격적인 은혜에 붙들려 있으면 누구나 소망의 사람 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남편 을 보세요. 나이들어 가면서 직장 생활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건 강도 걱정이 됩니다. 사람을 놓고 보면 답답하지만, '그러나'의 은혜 를 놓고 보면 남편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서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 문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믿음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되도록 부인 들은 정성을 다해 도와주어야 합니 다. 그것이야말로 남편이 사는 길 이며, 남편의 생이 축복받은 유일 한 길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자녀 를 보세요. 예측을 불허하는 치열 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갈 그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합니 까 더욱이 3,40년 후 우리가 세상 떠난 후를 상상해 보세요. 그러나 하나님의 '그러나'의 은혜로써 우 리는 자녀에게 소망을 갖게 됩니 다. 그 자녀가 믿음을 갖고 성령의 사람이 되기만 하면, 절대로 헛되 지 않을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장 래를 보장할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 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 러나'의 은혜를 붙듭시다. 성령을 사모합시다. 우리를 파격적으로 대 우해 주실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그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은 혜에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세 상을 사는 독특한 천국의 시민임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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