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듣기는 들어도 (마 13:10-15)

첨부 1


인류가 인쇄술을 발명하고 자신의 뜻을 글자로 표현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 지 성경처럼 많이 읽힌 책은 없다. 성경은 영원한 베스트 셀러이며 인류가 존 재하는 한 없어지지 아니하고 인류와 더불어 그 운명을 같이 할 책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경처럼 오해되고 성경처럼 무시당해 온 책도 없다 는 사실이다. 어느 책이나 어느 정도는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읽히기는 하 지만, 그러나 성경만큼 저자의 의도가 배제된 채 읽히는 책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계속적으로 베스트 셀러의 지위를 누리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내용이 구체적이지 아니하고 추상적이며 상징 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것을 쓴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해석하더라도 상당부분은 무리없이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내용은 수백만가지가 넘 는 현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자기에게 불리한 내용을 채 택할 것이며 무엇 때문에 자기 앞으로 굴러오는 복을 마다하겠는가. 사람들은 아주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개가 듣기 좋은 소리를 좋아하지 소위 직 언이니 충언이니 하는 따위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성경이 망하리라 고 말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흥하리라 만이 복음이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같은 구절이야 백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지만, 네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망하리라 같은 말씀은 대충 넘어가고 만다. 그러고는 예수를 한번 믿은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느니, 한번 생 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면(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말의 의미도 무언지 모 르지만) 절대 그것이 지워지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만 좋아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를 믿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더라도 중간에 탈락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예 수 자신이 택하고 예수 자신이 직접 가르치신 제자들조차도 우왕좌왕 방황한 적이 있었으며, 또 개중에 하나는 예수를 아주 버린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베드로나 가룟 유다나 예수를 따라다닌 열심과, 예수에 대한 애정은 서 로 비슷했었다. 베드로도 자신은 언제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고, 가룟 유다 역시 예수를 믿고 따랐던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그들 나름대로의 믿음이었다는 점인데, 그렇다면 오늘날은 베드로같은 부인이 없으란 법 있 겠으며, 가룟 유다같은 배신이 없으란 법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베드로의 부인이나 유다의 배신같은 것이 자신의 삶속에서도 일어날 개연성이 있다는 사실은 애써 부인한다. 하지 만 자신의 신념과 현실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예수를 한번 믿으면 끝까지 탈 락하지 않는다고 자신이 확신한다 해서 그 신념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의 선언보다는 자기 신념을 더 중히 여기고, 비록 성경에서는 자신을 향하여 그러면 망한다고 말하더라도, 그 것을 이런 저런 해석으로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설명해 주는 선지자를 좋 아한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아니, 그러면 성경은 왜 그렇게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으로 사람을 헷갈 리게 하는가. 예수는 왜 비유가 아니면 말하지 아니하여(막4:33) 듣는이 로 하여금 갈피를 못 잡게 하셨는가. 도대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 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오셨다면 아예 이런 저런 해석의 여지가 없도록 예수 자신이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더라면 좀 좋았을 것인가 그러나 만일 성경이 비유로 구성되지 않았더라면 성경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은 벌써 오래 전에 지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며, 설혹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요즘처럼 금박과 가죽으로장정하여 집집마다 없 는 집이 없을 정도로 번성을 구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종의 아버지 이하 응이 안동 김씨 문중의 집중적인 견제 속에서도 흥선대원군의 자리에 앉게 되 는 것은 속을 보이지 않은 그의 처세술 덕분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만일 그의 속이 안동 김씨 문중의 세력가들에게 노출되었더라면 그의 생은 일 찌감치 마감되었을 것이다. 성경이 오늘날까지 서점가의 베스트 셀러 자리를 고수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아무도 그 속을 모른다는 것. 모든 말씀 이 비유며 상징이어서 코에 걸면 코걸이고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것. 그러니 당연히 위로는 콘스탄틴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그저 주인의 명에 따라 하루하 루를 연명하는 종들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나름대로의 복음과 나름대로의 구원 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은 프로 축구 시합에도 등장하고(요즘은 있는지 모르지만, 할렐루 야란 축구팀과 임마누엘이란 축구팀이 있었는데, 이들은 항상 경기장에서도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었다. 상대방을 이기게 해달라는 원함인지 아니 면 골을 넣게 되어서 감사하다는 뜻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하나님도 골치깨나 아프실 것이다), 국가 간의 전쟁터에도 등장한다(부시가 이라크를 공격할 때 도 성경에 손을 얹고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백여년 전의 남북전쟁에서도 그들 은 서로 하나님께 상대방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나중이 되고,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성경 말씀을 읽을 수 있는지 모르겠고, 그러면서 어떻게 살인하지 말라나 원 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이처럼 성경 가운데서 자기가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읽고, 또 자신 을 책망하는 듯한 말씀을 만나면 기가 막히게 피해 도망갈 줄 아는 능력도 지 니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런 다양한 인간들의 다양한 필요를 모두 채워주 고도 남을 만큼, 많은 비유와 말씀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결국 성경의 이 런 특징이 오늘날 아무 힘도 없고 권세도 없는 우리 수중에까지 하나님의 말 씀이 전해지게 했으니,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어찌 다 이해하랴. 하나님의 선물은 그것이 무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소유하는 데 어려움 이 없다는 점이다. 만일 성경 한권을 가지기 위해 집 한채를팔아야 한다면 과연 누가 성경을 가지려 하겠는가. 성경이 이런 능력을 지니게 된 데에는 그 것이 가지는 비유와 상징 때문이란 점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유가 가지는 이런 장점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런 것이 예수가 자신의 말을 비유로 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이 되겠는가. 위에서 말한 것들은 그저 예수가 말씀을 비유로 한 결과 초래된 하나의 부산물일 뿐이다.

그러면 예수는 무엇 때문에 당신의 말씀을 모두 비유로 하시는가.

╂湄湧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제자들이 예수께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다.

제자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말을 빙 빙 돌려서 하는가 말이다. 그냥 똑바로 말해주어도 제대로 이해할까 말까한 백성을 앞에 놓고, 말씀을 이리 꼬고 저리 비틀고 하는 저의가 무엇이란 말인 가. 씨를 뿌린다고 말하지 않고 말씀을 전파한다고 말하면 어디 덧날 일이라 도 있는가. 어디 그뿐이랴. 새가 와서 먹어버렸다고 하지 않고 악한 자가 와 서 그 마음에 있는 말씀을 빼앗았다고 하면 누가 잡아가는가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명색이 스승인 것을.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 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 누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 었고 누구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니! 이런 것이 공의의 하나님이 하는 일이며, 이런 것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 지 않았다던 그 공평의 하나님이 하는 일인가. 예수가 하는 말이 어찌 이 모 양인가. 이제 보니 빈익빈 부익부(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 지 않았다던 그 공평의 하나님이 하는 일인가. 예수가 하는 말이 어찌 이 모 양인가. 이제 보니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라는 자본주의의 악한 현상 도 바로 예수의 이 말씀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않은가.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있는 자가 좀 양보하고 없는 자에게 조금 더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 아 니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공언 하던 예수의 입에서, 있는 자를 옹호하고 없는 자를 무시하는 이런 발언이 터 져나올 수 있단 말인가.

제자들로서는 틀림없이 그들의 귀를 의심하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었다. 그러 지 않고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며, 그럴 바에야 무엇 때문에 무리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시는지 그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 다. 예수의 말씀대로라면 저희라고 지칭한 무리들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일텐데,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 앞에서 비유로 라도 말씀을 전하시는가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자가 아니라 없는 자라면 더 받아 누리지도 못하고 그나마 있는 것 마저 빼앗겨야 할 판인데 , 어쩌면 그렇게 매정하게 그 있는 것마저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제 자들의 의문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건 또 무슨 말씀인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 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니. 이거야말로 본말이 뒤바뀐 일이 아니 고 무엇이랴. 저희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예수께서 그 말씀을 비유로 하신 때문이지 않는가. 말씀을 비유로 하시니까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인데, 오히려 적반하장 으로 저희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을 비유로 하신다니. 어 떻게 이처럼 자기 책임을 남에게 뒤집어 씌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예수 는 제자들의 이런 의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의 의도를 따 라오건 말건, 자신의 말을 이해하건 말건 시원시원 거침없이 그 말씀을 이어 간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이미 이사야 시대 때부터의 일이기도 하고 예수 가 신 지 이천년이 지난 오늘의 일이기도 한데,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 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들이 자신의 귀를 듣기에 둔하게 만들고, 그들의 눈도 일부러 감아버린다는 사실이다. 즉 사람들은 그들의 귀를 예수의 말씀 으로 열어놓지 않으며, 그들의 눈 역시 예수의 말씀을 보기 위하여 바로 뜨 지 않는다는 말이다. 듣기에 둔한 귀와 볼 수 없도록 감은 눈의 주인은 어디 까지나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 앞에 몰려들기는 하지만 그러나 결코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의지는 없으며예수의 도움으로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이며,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난 독 립된 조국에서 보란듯이 사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공중 나는 새를 봐라 그들은 심지도 거두지도 아니한다 는 말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겠으며, 그렇지 않아도 로마의 압박에 힘겨운 사 람들에게 나를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을 당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공중 나는 새를 보라는 말씀은 어려운 말도 아니고 따라서 주석가들의 해석이 필요한 말도 아니다. 문제는 공중 나는 새를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이며, 심지도 거두지도 않는 삶을 살기는 싫은 사람 들의 마음이다. 사람이 어떻게 공중 나는 새처럼 내일에 대한 준비 없이 살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게으른 사람들이나 일하기 싫어하는 인간들이 할 짓 이지,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고, 또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 다. 그런데 소위 다윗의 나라를 회복하려고 왔다는 사람이 그저 패배주의에 잔뜩 물든 사람처럼,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는 들에 핀 백합을 보라느니 아니 면 원수를 사랑하라느니 하고 앉아 있으니, 이건 보나마나 그 싹이 노란 것이 다. 그런데 그에게서 무슨 말을 들을 것이며 무슨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인가 .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눈길 또한 주지 않는다.

그들의 귀는 로마를 쳐부수자는 열변으로 예민하게 열리며, 그들의 눈은 세상 에서 먹고 입고 생활하는 문제로 날카롭게 열린다. 가만히 앉아서 돈 버는 법 따위를 얘기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며, 또 어떻게 하면 세금을 덜 낼 수 있는가 따위를 연재하면 인기 폭발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돈 버는 법 이 아니라 돈 버리는 법이었으며, 가정을 화목하게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서로가 불화하게 되는 말씀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어떻게 그의 말씀에 눈과 귀를 열 수 있었겠는가. 어쩌다 예수의 말씀에 그의 눈이 열릴 것같으면 아차 큰일 나겠다 싶어 열린 눈을 감기에 바빴으며, 어쩌다 천 국 복음에 귀가 예민해지는가 싶으면 이러다간 가정 파탄이지 싶어 두 귀 를 닫기에 바빴던 것이다.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 려워함이라 그렇다. 뜬 눈으로 예수를 보고 열린 귀로 예수의 말씀을 듣다 보면 하나님과 인생에 대하여 예수의 시각을 갖게 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하여 예수 처럼 깨닫게 된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심 가운데 있는 우리의 회복 인데,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이처럼 예수에 의하여 고침을 받을까를 두려 워한다는 점이다. 예수를 알아서 예수처럼 인생을 살게 될까봐 두려워한다는 말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두려워한다. 예수에 의하여 내가 고침받고 예수처럼 세상을 산다는 것. 그것은 곧 이 세상을 공중 나는 새처럼 산다는 말이고, 들에 핀 백합처럼 산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삶이란 말로서야 좋지만 현실로서야 어디 말이나 되는 얘긴가.

사람들이 예수의 말을 들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즉 그것 이 아무리 옳은 말씀이고 아무리 훌륭한 말씀이더라도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 겠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그렇게 살 수 없다 는 것. 그러니 인간으로서 예수처럼 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니 일찌감치 포기 하고 그저 예수 앞에 은혜나 받도록 애쓰라는 것.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도 낫고자 하지 않는 환자는 고칠 수 없고, 예수의 십자 가가 아무리 신통방통한 요술방망이라도 죄를 사함 받고자 하지 않는 사람에 게는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환자로 살아온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 되려 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무른 호박에 침도 안 들어갈 소리냐고 타박할 지도 모르지만, 그건 사실이다. 세상을 건강한 사람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어 려운 일이고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건강해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런 예는 세상살이에서도 비일비재하다. 건강하지 않다면 그걸 빌미로 빠질 수 있는 일도 건강하기 때문에 외면할 수 없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이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건강한 사람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 싫어서 평생을 환자로 사는 사람은 인간 세상에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예수의 말을 듣고 있으면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가 뭔지는 몰라도 부친 장사(葬事)도 뒷전으로 보내라고 요구하며, 이 세 상에서는 그저 나그네같이 지내라고 주문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그런 삶이 예수가 말하는 건강한 삶이고 고침 받은 삶이라면 그런 삶을 좋아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정말 예수의 말대로 내가 그런 삶을 살게 된다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에라, 눈을 감고 귀를 막자. 이게 어디 나만의 문제인가. 모든 인류의 공통된 문제 아니겠는가. 이래서 사람들 은 예수에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에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동안은 예수는 아무도 고칠 수 없다. 따라서 예수 의 말씀은 비유든 아니든 아무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말씀을 비유로 하신다고 한것을 우리는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여기 나오는 못한다는 말은 안한다로 바꾸어야 한다 . 킹 제임스 버전에는 우리 개역의 보지 못하며를 they do not see로, 듣지 못하며는 they do not hear로 번역하고 있는데, 아마 중학교 영어 시 험에서 이 두 문장을 해석하라고했더라면, 보지 않는다와 듣지 않는다 가 정답이 될 것이다. 보지 못한다가 되려면 영어로는 they can not see가 옳고 헬라어 표현도 동일하다. 즉 이건 능력의 문제라기 보다는 마음의 문제 이다. 볼 마음이 있고, 들을 의지가 있으며, 깨달은 상태, 깨어 있는 상태로 살아갈 마음이 있느냐가 우선이라는 말이다. 보고자 하는 마음 없이 사물을 보고, 듣고자 하는 의지 없이 말씀을 들으니, 결국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것은 결과이고 그 원인은 보고자 하지 않 는 마음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마음으로 보고 듣는 모든 말씀이 비유이다.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비유 가 진리를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알고 또 실제로 그 비유를 통하여 실체를 본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의 말씀이 더이 상 비유가 아니며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길 이며 수단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하나님의 세계로 옮기고자 하는 마음 없이 그 말씀을 듣고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며 상징일 뿐, 단 한톨의 진리도 전해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라고 할 때의 있는 자는 바로 이 마 음을 가진 자이다. 즉 이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로 가고자 하는 마음 말이다. 나타난 세계에 매이지 아니하고 감추어진 세계의 진리 속으로 여행을 떠날 의지가 있는 자. 인간 세상의 온갖 제도와 조직의 굴레를 벗어나 혼자 만의 외로운 방랑을 떠날 용기가 있는 자. 이런 사람들만 예수의 말씀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만 예수를 믿어 예수를 알고, 예수 로 산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 그나마 자신 을 지탱해주던 세상적인 가치관이 흔들리게 되고, 율법적인 의로 구원받았다 고 확신하고 있는 그 확신도 빼앗기게 된다. 결국은 예수를 버리고 자신의 가 치와 확신을 지키는 길로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만 더 얘기하고 글을 맺도록 하자.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마태복 음의 본문은 이사야 본문과는 좀 다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 대로라면 돌 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 을 듣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헬라어 본문도, 듣지 않고 보지 않아서 예수가 그들을 고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사람들이다. 그러 나 이사야 본문은 이와 좀 다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 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 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 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6:9-10)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닿으니 나를 보내소서 하는 찬송의 배경이 되는 장 면이다. 즉 이사야가 이제 여호와 앞에 정(淨)하게 되어 주의 일에 자신을 보 내주십사고 탄원한 다음에 벌어지는 일인데, 이사야가 가서 전해야 하는 말씀 이 그야말로 기가 막히는 내용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희망 의 메시지가 아니며 눈을 띄워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하겠다는 회복의 메시지 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고침을 받을까를 하나님 자신이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는 고침 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주체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묘사되고 있는 반면, 이사야 에서는 그 주체가 하나님이다. 이런 게 어려운 점이다. 말이 가지는 어려움.

인간들의 의사 소통 수단이 가지는 부족함.

사실 이사야 본문의 말씀대로라면 하나님이 이사야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 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정말 하나님의 의도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뜻이 전 혀 없었다면 이사야를 보내 이러쿵저러쿵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냥 그대로 내어버려 두기만 해도 그들은 망할 터이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메신저를 이스라엘에 보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그 백성 을 구원하겠다는 당신의 의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고침 을받을까 염려한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그러나 이사야가 그 정도를 이해하 지 못했겠는가.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사6:11) 영원히 버리신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영원히 회복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은 아 닐 것이다. 이건 틀림없이 한시적(限時的)인 조치이다.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한다는 말씀은 지금 고치기에는 걸림이 되는 요소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 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나를 왜 보내시겠는가. 내가 가서 할 일은 바로 그 걸 림을 제거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고치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것 이리라. 주여 어느 때까집니까. 언제까지 회복의 손길을 늦추시렵니까. 무엇 이 문제입니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 지가 전폐(全廢)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여호와께서 사람 들을 멀리 옮겨)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6:11-12) 하나님이 황폐하여지기를 원하는 성읍이란 어디이며, 전폐되기를 원하는 토지 또한 어디인가. 그 땅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니 며, 그 성읍이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의 거룩한 도성이 아 니던가.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 성읍들이 부서지고 그 땅이 황폐할 때까 지는 도무지 이들 이스라엘을 고치지 않으시겠다니.

다른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거룩한 도성이고 번 성하는 성읍이며, 그들이 가꾸고 지킬 약속의 땅이며, 그들의 영원한 거처이 고 싶으신 분이다. 그런데 이 인간들은 나타난 세계의 환상에 미혹되어 그 예 루살렘이 하늘의 예루살렘인 줄 알고, 그 땅의 장막이 영원한 처소인 줄 알아 , 그 땅에서 자기들끼리 오손도손 재미있게 지내며 행여나 그 성읍이 무너질 세라, 행여나 그들의 땅이 황폐할세라 애지중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 찌 하나님의 질투가 그냥 있으시겠는가. 그 성읍을 깬다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그 성읍이 건재하는 한 인간들은 그 번성 하는 성읍을 바라보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할 것이 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다가 바빌론 포로가 되는 것은 모두 이런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그 번성했던 초대교회가 언제 그랬더냐는 식으로 흩어 지게 되는 것도 동일한 맥락이며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이 빈껍데기로 전락하 게 되는 것도 동일한 흐름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교회들도 머지 않은 장래 에 20세기 후반기의 번성을 회고하며 추억할 것이다. 그때가 좋았지 하면 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황폐와 이런 망함이 올 때까지 하나님의 고치심은 이루어지지 않 는다. 이 점 독자 여러분의 통찰을 바란다. 눈을 열고 깊이 생각하면 이사야 본문의 주어를 살짝 바꾸어 표현한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 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회복은 이사야 본문이 말하는 황폐가 이루어질 때까지는 하나님도 두렵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두려운 사건이다. 한쪽은 영의 세계를 육신 세계의 복으로 생각할까 염려하는 두려움이요, 또 한쪽은 영의 세계가 뭔지는 모르지만 육신의 세계를 잃어버릴 것같은 두려움이다.

그래서 예수의 모든 말씀은 비유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을 비유의 세계에 머물게 하느냐 아니면 실제의 세계로 끌고 오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들 각자의 문제이다. 성읍이 망하고 토지가 황폐하게 되는 것도 모두 우리들 각자의 문제이고. 나타난 역사는 우리들 각자의 내면이 반영된 결과일 뿐이다. 개개인이 성읍의 번성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까 나타난 역사도 번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마음이 있으면 능력은 생기는 것이다. 핑계하지 말 것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