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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행주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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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400여 년 전 조선 선조 왕 때 일이다. 임진왜란으로 왜병이 서울까지 쳐들어 왔다. 서울 장안은 하룻밤 사이에 온통 쑥밭이 되었다. 왜병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칼로 목을 베어 죽이고, 집이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다.
생지옥으로 변한 서울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들이 일어났다. 정세가 이토록 위급하게 되자, 나라를 지켜야 되겠다고 굳게 결심한 도원수(지금의 군 총 사령관) 권율 장군은 전라도에서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빼앗긴 서울을 되찾기 위하여 북으로 진군해 오다가 1593년 2월, 경기도 고양군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이에 왜군은 3만 명이 넘는 수많은 군대로 행주산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피끓는 군사들과 함께 최후의 결전을 벌일 비장한 결심으로 장군이 부하 지휘관과 작전계획을 짜고 있는데, 한 군인이 들어와서 '많은 부녀자들이 장군님을 뵙자고 합니다'하고 보고했다.
이에 장군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들여보내라. 얘기를 들어보자.' 하였다. 수십 명의 부녀자들이 병졸의 안내로 권율 장군 앞에 나왔다. '무엇 때문에 나를 만나려고 하오?' 하고 장군이 묻자, '장군님, 저희들은 행주산성 근처에 사는 여자 대표들입니다. 비록 허리에 치마를 두른 연약한 여자들이지만 우리도 역시 이 나라 백성이 아닙니까? 지금 나라의 운명이 위급한데 어찌 편안하게 안방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기만 할 수 있습니까? 저희들은 일찍이 병기를 다루는 기술은 익히지 못했으나 이제 돌로라도 적병의 머리통을 하나라도 깨뜨리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저희들의 청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 간절한 말을 들은 권율 장군은 크게 감동하였고, 그 자리에서 여자들의 청을 들어 주었다. 장군의 허락을 얻은 여자들은 크게 기뻐하며 먼저 돌을 주워서 산꼭대기에다 모아 놓기로 작정하고 돌을 나르기 좋게 긴치마를 잘라서 짧게 만들어 돌을 주워 담아 날랐다. 마침내 수많은 왜병들이 개미떼처럼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적병이 오자 군사들은 무기로, 여자들은 돌을 굴려 적들을 쳐부수었다. 적은 아홉 차례 계속 공격해 왔지만 결국 2만 4천구의 시체를 남긴 채 도망하고 말았다. 연약한 여자들이지만 죽음을 각오한 애국심은 마침내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그 후, 이 작은 치마를 행주에서 처음 만들었다 하여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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