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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양하여 가로되 (눅 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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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유명한 말씀이다. 그리고 이 말씀 때문에 교회는 아무나 청해다가 세례를 베풀고 신자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유명한 말씀일수록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흐름을 간과한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기 쉽다. 언제나 그렇듯이 본문도 본문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 있다. 예수는 왜 이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되었는가 누가복음 14장은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에 식사 초청을 받은 사건 가운데 일어나는 일련의 말씀이다. 본문도 이 식사 자리에서 예수와 함께 먹고 있던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한 데 대한 답변의 성격을 띠고 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이 앞 사건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갚음을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얘기를 한 바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들을 청하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이 의인들을 부활시키는 때에 그러한 삶에 대한 갚음을 받을 것이란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듣고 난 한 사람이 예수에게 맞장구를 치듯이 고백한 얘기가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점은 의인들이 부활하는 시점과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게 될 시점이었다. 따라서 아직은 의인들이 부활하지 않았으며, 아직은 하나님 나라의 떡을 먹을 수도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다시말하면 신앙이 현재시제가 아니라 미래시제로 얘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개역성경의 본문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으로 되어 있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현재가 되기만 하면, 떡을 먹는 시점도 현재일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부분 먹는의 시제는 먹을의 잘못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되다는 뜻이 아니고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을 자가 복되다는 뜻이다 (공동번역이나 현대인의 성경 등은 모두 미래시제로 번역했으며, KJV 등 영역도 그렇다, Blessed is he that shall eat bread in the kingdom of God).

먹는이면 어떻고 먹을이면 무에 그리 대수이기에 이런 논설인가 예수에게 이런 말을 한 사람의 심중을 우리가 정확히 이해해야만 예수의 메시지가 의미하는 내용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예수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떡을 먹는은 현재시제가 되어야 옳을 것이며, 이 경우 이 사람은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중에 만난 흔치 않은 믿음의 소유자가 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이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식사를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사건으로 생각하였다면, 이는 예수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 다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 사람의 오해를 지적하고 깨우치는 말씀이 되기 때문에 먹다는 동사의 시제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가끔 지적하는 문제이지만 오늘날에 있어도 이 문제는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사건은 여전히 미래적인 사건이다. 비록 교회에 성만찬이란 것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의 떡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며 실체로서의 양식은 앞으로 우리가 휴거를 통하거나 아니면 죽어 천국에 가서나 있을 사건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휴거의 시점이나 자신이 죽는 날 등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대단하다. 그 날을 알면 그 날을 준비할 수 있어 좋대나 어쩐대나.

신앙의 내용이 미래적인 사건이 되면 신앙은 두려움의 영역이 넓어지고 말세론 같은 것이 판을 치며 인간들을 퇴폐적으로 만든다. 여기서 퇴폐적이라는 말의 뜻은 윤리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라는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에 묶이게 하고 생명이 아닌 껍데기 같은 선악에 머물게 하고자 하는 모든 움직임을 나는 퇴폐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늘 양식을 먹는 사건이 미래시제가 되면 이건 인간들을 퇴폐적이 되게 한다. 생명의 자람에 결정적인 양식은 미래로 돌리고, 오직 영락한 이름 뿐인 하나님에게 온갖 충성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입에 담고 1992년 10월에 있을 휴거를 믿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오늘 나의 아침 식사상에 오르는 한마리 생선이어야 하고 휴거는 이미 우리 삶에서 과거여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사람,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된다). 미래의 휴거는 과거의 휴거가 만들어내는 결과일 뿐 우리가 믿고 기다리며 집을 몽땅 정리해 가며 부산을 떨어야 할 일은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2년 10월의 휴거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우리는 그런데 미혹되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휴거에 대하여 자신이 있어 그러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데 들떠 있기에는 자신의 이성이 좀 세련되었을 뿐이다) 스스로의 신앙이 현재 중심이 아니라 미래지향의 뜬구름 잡기라는 반증이다.

예수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는 문제는 항상 오늘 여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본문에서 예수에게 한마디 거든 사람의 신앙은 그 뿌리가 내일 저기에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 여기라고 해서 이 땅의 의식주 문제나 인권이나 민주화, 통일문제 등이 신앙인의 삶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가장 현실적이면서 가장 비현실적인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땅에서 하늘의 삶을 사는 것이며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내일을 사는 것이다. 예수는 오늘 이 땅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가르친 사람이었다. 오늘 여기서 하늘 양식을 먹는 자, 그가 바로 복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와 한끼 식사를 나누었던 그 사람은 앞으로 하늘 나라에 가서 떡을 먹을 사람이 복 있다고 아는 체를 했으니 …. 아는 것이 병이요, 그러나 그것이 병인 줄 알면 복이다. 이제 예수의 대답을 보자.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 oJ de; ei\pen aujtw', … ) ( But he said to him, … ) 원문이나 영역에는 그러나라는 접속사 하나가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말은 예수의 잔치 비유가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고 말한 그 사람의 견해에 반대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복있는 자의 모습은 그러했을지라도 예수는 그러나 이다. 그러냐 하늘 나라에서 떡을 먹을 사람이 복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늘 나라에서 떡을 먹을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일어날 그런 소망 사항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정작 중요한 문제는 어떤 사람이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청했는데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런 부분이 신앙의 현실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나라는 벌써 잔치를 베풀고 온갖 먹을 것을 준비해 놓고 청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청한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먹게 될 그 잔치를 기대하면서 오늘 이미 베풀어진 잔치에는 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것을 일컬어 신앙이 관념화 되어 있다고 한다. 그 잔치를 얻어 먹겠다고 소망하면서 그 잔치에 오지는 않는 사람들.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는데 그를 죽이던 사람들. 역시 예수가 재림하면 또 배척할 것이 뻔한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고 말하는 믿음 좋은 사람들.

하나님은 하나님을 바라고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에 의해서 거절당하고 배척당한다.

예수에게 있어 로마나 헬라는 사랑의 대상도 아니었거니와 아픔의 대상도 아니었다.

예수의 꿈은 오직 예루살렘(눅13:34)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관념으로만 믿고 있고 삶으로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지금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어 하나님 나라의 양식을 공급할 준비를 완전히 갖추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양식이 아닌 육신의 배를 채울 양식을 구하고 있었으며, 예수가 육신의 병을 고친 뜻은 우리 죄의 사유에 대한 그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저 간암이나 고쳐서 한 십년 더 살았으면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 잔치를 사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청한 자의 입장에서 본문을 보지 말고 청함을 받은 자의 입장에서 본문을 생각해 보자. 정말 이네들이 그 잔치자리에 가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겠는가 밭을 샀는데 그 문제가 완전히 매듭되지 않아 바쁜 가운데 남의 잔치 자리에 가서 식사 한끼 하고 오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가 우리 같으면 부동산 계약서를 손에 쥐고 남의 잔치 자리에 가겠는가 아니면 혹시 부동산에 이런 저런 문제가 없는지 알아보러 가겠는가 신도시 아파트 분양신청과 교회의 부흥회가 동일 시간에 우리를 부를 때 아파트를 버리고 부흥회에 갈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누가 뭐래도 본문에 나오는, 밭을 샀기 때문에 잔치자리에 가지 못한 사람을 비난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가 곧 나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소 다섯겨리를 산 사람을 생각해 보자.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내 소가 중요한가 남의 잔치가 중요한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과연 이 소가 건강한 소인지, 어떤 문제는 없는지 알아보고 시험해 보는 일이 당연히 중요하다. 이렇게 현실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제쳐두고 남의 잔치 자리에 가서 술이나 한잔 얻어 먹는게 온전한 인간의 바람직한 태도인가 자기를 청한 사람과의 관계도 물론 중요한 문제이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일이 깨끗이 정리된 다음의 일이다.

자신의 일은 여기저기 정리되지 않은 채 널려있는데 남의 잔치에 들러리나 서러 가는 사람을 우리 같으면 무어라 평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사람 역시 우리 눈에 하등의 잘못이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이런 사람의 현실적인 형편을 무시하고 자기 잔치 자리에 오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잔치집 주인에게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만일 둘 사이의 재판자라면 우리는 누구의 손을 들어 주겠는가 먹고 살기 위하여 소 다섯 겨리를 사고 그것을 시험하러 가느라 남의 잔치에 가지 못한 사람을 잘못이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전후 사정에 대한 감안도 없이 무조건 자기 잔치자리에 오지 않았다고 노발대발하는 집 주인을 잘못이라 할 것인가 그 다음에 나오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막 장가들어 신혼인 사람이 남의 잔치에 갈 여유가 있겠는가 요사이 얘기로 하면 신혼여행도 가야 하고 시댁 식구나 처가 식구들에게 인사도 해야 하고 축하해 준 여러 어른들께 감사의 표시도 해야 할 것이고, 친구들 불러다 집들이도 해야 할 것이다. 어디 그것 뿐이겠는가 새로운 생활에 대한 설계와 장가드느라고 그동안 밀린 일도 정리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사랑스런 아내에게 푹 빠져 보내는 시간을 제쳐두고 남의 잔치에 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잔치를 베푼 집 주인은 이 사람에게도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그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지 않는다. 이 주인이야 말로 딱한 사람이 아닌가 성경의 이야기는 대체로 이런 수준이다. 인간적인 윤리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집 주인의 노발대발이 오히려 지나친 반응이다. 우리는 여기 나오는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였다고 하더라도 이들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신앙이 관념이 아니라 삶이라는 얘기는 이런 것이다.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집 주인이 나를 청했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나의 머리나 가슴이 그 사실을 아무리 정확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잔치가 베풀어지는시각에 그 자리에 가 있을 수 없다면 만사 허사이다.

물론 예수가 말한 이 혼인잔치의 비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잔치에 청하시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천국 잔치를 베푸셨다는 사실에 황홀해 있으면 안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런 놀라운 잔치를 준비하고 우리를 부르신다고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이 우리를 그 잔치자리로 인도해 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청하셨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문제는 정작 그 잔치자리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계시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잔치를 베푸신다는 그 사실을 믿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 줄 알고 있다. 이렇게 아는 것은 관념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 미래시제에 머물고 오늘 하나님의 떡을 먹는 자가 복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 저 천국에서 하나님의 떡을 먹을 자가 복되다고 자기 딴에는 꽤 그럴듯한 얘기를 예수에게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다. 아니다. 신앙은 내일 천국에서 하늘 양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오늘 여기서 하늘 양식을 먹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하늘 잔치를 베푸셨지 않았더냐. 그러나 너희는 인간 세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들 때문에 하늘 양식을 먹는 잔치를 기피하고 있지 않느냐 너희들의 변명이란 것은 너희들 차원, 너희들 세상에서는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얘기는 하늘을 버리고 땅을 선택했다는 얘기 아니냐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장차 하늘 나라에 가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할 꿈을 꾸고 있으니 어이 딱한일이 아니더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이 땅에서의 합리적인 인간, 인격적인 인간이 목적이 아니다.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 말고 독일이나 미국 같은 괜찮은 나라의 시민권을 주고자 함도 아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 하늘의 시민권을 주고자 하심이며, 하늘의 시민권은 곧 이 세상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밭을 살 일도 없으며, 소를 사서 시험할 일도 없어야 한다. 이 땅 여자의 아름다움에 혹하여 그를 취하고,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잠시잠간의 열락에 빠지는 일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밭을 늘리고 소를 늘리며 여자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것도 포함되는 줄 알고 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어느 밭을 사고 누구 집 소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를 기도하고, 누구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묻는다. 그래서 예수께서 경계한 대로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노아의 때에 된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 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사고 팔고 심고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눅17:26-30) 노아 시대 사람들이나 소돔성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지어서 홍수나 불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인격적으로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그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었을 뿐이다. 매매가 기초가 된 물질 문명의 발달은 반드시 윤리 도덕적인 타락을 결과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결과적인 타락만을 문제 삼는 것은 근시안적인 진단이다.

우리가 본대로 예수께서는 노아시대 사람들의 결과적인 타락상을 열거하지 않고, 소돔성의 성적 문란이나 그로 인한 사회 병리를 그들의 죄목으로 들고 나오지 않았다. 예수의 관심은 오직 그들이 먹고 마시는 문제가 그들 삶의 주요 이슈였다는 점이다. 예수는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문제가 그들 삶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뿐이다.

이렇게 현실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이 예수에게는 멸망의 원인으로 진단되고 있다. 결국 누가복음 14장의 본문도 사고 팔고 심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문제 때문에 하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예수의 안타까움이요, 통분의 한숨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죄란, 사고 팔 때 사기치는 것이 아니며 시집 장가갈 때 과다 혼수 해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죄는 오히려 사고 파는 것 자체이며, 시집 장가가는 것 자체이다. 왜냐하면 그러느라고 하늘 양식이 버림받으며 따라서 생명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집 장가도 아니가고 사고 팔지도 말아야 되는가 노아는 장가 가지 않았던가 롯은 사고 팔지 않았겠는가 물론 노아도 장가갔고 롯도 소돔성에서 집도 짓고 매매도 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 때문에 방주짓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소돔성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는 일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청하심이 우리의 부동산 매매계약서를 포기하게 하는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던 부분을 버리고서라도 하나님의 세계로 옮겨가는 삶이 있으신가 나는 가끔 참 쓸 데 없는 걱정을 하는 때가 있다. 요사이 한창 유행하는 92년 휴거가 실제로 일어난다고 하자. 그 사람들의 얘기에 의하면 92년 9월 경부터 휴거될 자의 귀에 한 20일간 나팔 소리가 들려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제 당신의 공중재림과 성도의 휴거가 임박했음을 구체적으로 계시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때 모든 가족이 하나님을 잘 믿어서 모두다 휴거의 대상이 되었다면 그것 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만, 불행히도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혼자 휴거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정말 기쁜 마음으로 휴거할 수 있을까 별 쓸 데 없는 걱정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심각한 문제이다.

부모도 없고 남편이나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는 곳, 지금까지 누려왔던 모든 부와 영화, 즐거움도 없는 곳, 우주복을 입지 않고는 숨을 쉴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그곳으로 휴거하는 것에 선뜻 도장을 찍을 수 있을까 밭을 샀는데 그걸 방치하고, 시월이면 아들 대학입시도 며칠 남지 않을 시점인데 혼자 잘먹고 잘살겠다고 휴거할 수 있겠는가 휴거의 문제는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시느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나를 불렀을 때에 내가 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문제가 있다.

무슨 쓸 데 없는 걱정이냐, 하나님이 나를 천국으로 부르시는데 이 세상이 무에 그리 대수라고 이 세상에 연연하여 하늘로 못 갈 것이냐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시느냐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도록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더욱 열심히 찬송하고 집을 팔아 선교헌금에 보태고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 수준이나 윤리 도덕적인 인격을 기준으로 우리를 청하지 않는다. 만일 92년 10월에 휴거가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땅을 버리고 하늘로 가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지, 하나님이 누구는 부르고 누구는 제쳐두는 그런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하지,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라도 버리시는 법이 없다. 우리가 죄인으로 살 때,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인 분이다. 인간 세상에도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는 경우는 있어도,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일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인간적인 조건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모자라고 연약한 것이 조건이라면 조건이다.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이 앞 장에서도 언급되었지만,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을 청하시고 연약한 자들을 부르시는 데는 부하고 건강한 자들의 거절(좋게 말하면 사양)이 전제되어 있다.

부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이유는 하늘의 소망보다는 땅의 현실이 더 소중하고 좋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소망이 있고 미련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그러한 소망과 미련 때문에 결국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온갖 변명과 핑계로 이 땅에서 살고자 한다.

밭을 살만한 돈이 없었다거나 소를 사서 무언가를 도모할 계획이 없었더라면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잔치에 참석했을 터이다. 아무도 자기에게 시집올 사람이 없는 병신이나 소경이었더라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는 돈이 있었다는 점이고 무언가를 경영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다는 점이며 그리고 건강한 육신이 있었다는 점이다. 인간적인 안목으로는 참 괜찮은 사람이요 바람직한 삶의 양태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양하게 하고 있으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함은 이사야나 예수 시대만의 문제가 아닌듯 싶다.

이 장의 제목에서 이미 암시한 바지만, 천국과 천국의 잔치는 사람들이 사양하기 때문에 못들어 가는 것이지 하나님이 인간들을 선별적으로 입장시키기 때문에 못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잔치도 좋고 천국도 좋지만 내가 가면 남은 아내는 어떡하고 자식은 또 누굴 믿고 삽니까 밭을 사는 것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달려 있는 문제 아닙니까 내가 밭을 버리면 그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당장 실업자가 될 텐데 그들의 생계는 또 누가 감당한다는 말입니까 어느 정도만 안정이 되고 나 없이도 굴러갈 만큼만 되면 내가 왜 하늘 나라 잔치를 외면하겠습니까 그래 맞다. 그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하늘 나라 잔치가 싫어서 사양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보다 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었을 뿐이다. 가정과 재산은 나의 것이요, 하늘나라의 잔치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남의 집 금송아지 보다 내집의 바늘 한쌈이 더 소중한 법. 밭 한 뙈기 속에 하늘은 녹아들고 소 다섯마리와 혼인잔치가 교환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빠져(창6:2) 그것이 하나님이 짝지워 준 혼인인 줄 믿고 그 잔치 때문에 저 잔치를 버리고 있다.

그러나 만일 본문에 나오는 혼인 잔치의 주인공(신랑과 신부)이 나라고 가정해 보자. 그래도 밭 사고 소 시험하는 일로 자신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말도 안되는 얘기일 것이다. 남의 집 잔치야 우리 집 아이의 감기만도 못한 것. 하지만 내 결혼식보다 더 중한 일이 인간 세상에 무엇이랴.

문제는 하나님의 청하심이 남의 혼인잔치에 와서 축하나 하고 식사나 한끼하고 가라는 것인 줄 아는 데 있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혼인 잔치에는 우리가 주인공이다. 나의 결혼식이란 말이다.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심으로 다시 나눌 수 없는 영원한 배필을 만나는 잔치에 오라는 부르심이다. 그런데 사양하여 가로되로 핑계를 대고 있으니 이것이 비극이다. 그래도 옛날에는 사양의 이유가 상당히 인간적이어서 동정의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었으나, 요즘은 그 이유도 많이 고차원적으로 바뀌었다. 예를들면 하나님께 기도하느라고 바빠서 못오고, 92년 휴거를 준비하라고 전도하느라고 못온다. 이 무슨 코미디같은 비극이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세상과의 절연(絶緣)을 요구한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더불어 살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고통이며, 이것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이유이다. 세상과 절연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다.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심을 보라. 아브라함은 여러모로 이 부르심에 대한 상징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1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심은 그의 본토와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떠난다는 것이 선천적으로 불가능한 존재들이다. 우리의 싸움은 떠날 것이냐 말것이냐가 아니라 본토와 친척, 그리고 아비집에 대하여 아직도 애착을 가지고 있느냐에 있어야 한다. 아직도 본토에 미련이 남아 있고, 친척들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았는가 아직도 아버지와 그의 집에 기대할 것이 남아 있으며 끈끈한 정이 묻어 있는가 아직도 우리가 이런 대상들에 대하여 애틋해 하고 털어버리지 못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은우리에게 커다란 짐이 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만나지나 말것을. 유행가 가사이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의 심정인지.

신약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사도행전 7장에서 아브라함을 언급할 때에,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고 실제로는 죽지도 않은 데라(아브람의 아버지)를 무덤으로 보내는 이유는 데라가 적어도 아브라함의 속에서는 이미 죽었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죽어야만, 그래서 고아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부르심이 의미 있다.

그러나 오늘 이 땅의 수많은 신자들은 본토도 그대로 친척과 아비 집도 그대로 주렁주렁 매달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선다. 여기서 비극의 씨는 잉태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나아가야 하는 당위성과 인간 세상의 보편타당한 삶의 양태.

이 둘 사이에 서서 양쪽의 비위를 다 맞추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오늘의 기독교인들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관념)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가고, 몸(삶)은 현실 세상의 잡다한 문제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재미만으로 따진다면 삼각관계만큼 신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 가면 세상이 반겨주고,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반겨주는 기가막힌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이다. 그래서 장로라는 직분이 사회에서도 알아 주는 하나의 지위나 경력이 되고 있으며, 원로 목사 정도 되면 대통령께서도 그들을 초청해다 국정을 설명하고 조언을 듣는 지경이 되었다. 예수가 언제 빌라도의 국정 자문위원이 되었으며, 언제 헤롯의 통치 스타일에 시비를 걸었던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세상으로 부터 떠나야 한다. 땅에서의 일상사로 부터 하늘의 영원으로 주민등록을 옮겨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냉정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냉정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이나 처지를 모르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먹고 입고 거할 집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 분이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변명이나 하소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변명거리들을 잘라 버리라고 요구한다. 하나님의 이냉정함과 단호함이 우리 것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늘 거절하고 사양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도 천국에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야무진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이 된다.

예수의 다음 말씀이 우리를 향한 안타까움임을 기억하자.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눅9:59-60) 치가 떨릴 만한 냉정함, 그리고 광신이라고 비판할 만한 단호함, 이런 것이 예수의 모습이다. 부친이 죽었다고 아브람처럼 가나안으로 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죽은 사람마저도 얼마나 인간을 구속하는지. 인간 세상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윤리나 도리가 예수에게는 끊어야 할 문제가 되고 있으니, 이래서 하나님과 인간들은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인가 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아직도 재림하지 못하고 있으며, 성경이 아직도 우리를 책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독교인들이여, 사랑의 하나님에 속지 말고 소 사고 밭 사는 문제 때문에 남의 잔치에 참석 못한 사람들에게 노발대발 분을 삭이지 못하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하나님을 이해하도록 하자. 만일 그러지 못하면 성경의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고 다음의 말씀이 바로 내게 대한 판결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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