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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할 일 없다는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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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서 가장 가혹한 형벌은 무한지옥(無限地獄)에서 무거운 바윗덩이를 영원히 굴려 올리도록 숙명 지어진 시지프스의 형벌이다. 시지프스 왕은 이승에서 살았을 제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살다가 끝내는 제우스 신까지 속인 죄로 이 가공할 형벌을 받은 것이다. 이 시지프스의 형벌을 인간의 실존(實存)에 빗댄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는 유명하다. 한데 사르트르는 시지프스는 그나마 바위를 굴려 올리는 할 일이라도 있다는 점에서 덜 비극적이라고 말하면서 보다 가혹한 책고(責苦)로 아랍인의 지옥 가헤넴을 든다. 아랍 사람이 죽으면 험상궂은 마왕(魔王)의 두 사자(使者)에게 신문을 받고 죄가 확정되면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다리(橋)를 건너는데 악인은 이 다리를 헛디뎌 가헤넴에 빠지게 돼 있다. 가헤넴은 아무것도 없는 출구(出口)없는 방이다. 불교의 지옥처럼 밟고 걸아야 하는 바늘(針)산도 없고 살을 익히는 화염도 굶주린 독사떼도 없다. 시지프스처럼 굴려 올려야 할 바위도 없다. 다만 가헤넴에세는 영원히 죽지 못하고 또 영원 히 할 일도 없다. 그렇게 책고가 없는 안락한 지옥도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영원히 죽지 못하고 영원히 할 일이 없는 책고라는 것을 사르트르는 갈파하고 이 가헤넴에서 암시를 받아 희곡 '출구 없 는 방'을 저술하고 있다. 이 세상의 그 많은 지옥들 가운데 가장 가혹한 지옥이 할 일이 없는 인간상황인 것이다. 도재승(都在承) 서기관이 피랍 21개월 동안 갖혀 있었다는 감방이 바로 이 출구 없는 방이었다. 하루 한 끼 넣어주는 밥을 먹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도록 해놓은 것이다. 아랍인의 지옥인 가헤넴을 지 상에 재현해놓은 것이 된다. 그래서 도서기관은 피랍 21개월 동안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로 죽음의 공포보다 이 출구 없는 방에서 할 일이 없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사람이 살아 겪을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시련과 상황을 살아낸 사람이라는 차원에서 또 다른 정동(情動)이 뭉클하다. 옛 우리 생활 속에서 할 일이 없는 여가(餘暇)의 공포를 덜어주고자 일부러 일을 만들어 하던 풍습들이 새삼스러워진다. 이를테면 쌀 방아를 찧어 담을 때 일부러 쌀 한 말당 탈곡되지 않은 뉘 한줌씩을 주워담는 관습이 있었다. 밥짓기 전에 뉘 가리는 일을 함으로써 여가를 소멸하기 위한 지혜였던 것이다. 일하지 않고 먹고 살기를 바라는 통념에 따끔한 교훈이 되는 도서기관의 뼈저린 체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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