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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두고 사건이 주는 교훈 (행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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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소요가 그치매-여기서 소요란 데메드리오 사건(19:23 이하)으로 에베소 극장에서 일어난 소동을 말한다. 이 소요는 바울의 에베소 사역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의 하나이다. 이제 소동이 진정되자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것이 그자신의 안전과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두려움 속에서 소요가 그치는 틈을 타서 서둘러 도망가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소요가 그치매'라는 문구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게 된 이유나 동기를 진술하고 있다기 보다는 떠나가게 된 시간에 관해서 진술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R.C.H. Lenski).
2)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이것은 바울이 놀라움에 가득차서 갑작스럽게 야간 도주하듯이 그들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작별의 의식을 다 갖추고 그들과 진지하게 헤어졌음을 뜻한다. '권한 후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레사스'( )는 격려하고 위로하며 권면한다는 뜻이다. 이제 자신의 전도 계획에 의해서 떠나려는 바울은 그들이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격려하고 권면하며 또한 위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의 권한다는 말 속에는 기독교 설교의 포괄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또한 '작별하고'( , 아스파사메노스)는 권함이 끝난 후 서로 포옹하고 사랑의 입맞춤을 나눈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초대교회의 작별에 대한 일반적인 관습은 서로 안고 입맞추는 것이었기 때문이다(37절).
3)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19장의 폭동이 있은 직후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19:21) 마게도냐로 향했다. 람세이(Ramsay)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드로아로 항해하는 연안 무역선을 탔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 고린도 교회의 심상치 않은 사태에 대한 소식을 알고자 파견했던 디도를 드로아에서 만나 보고를 들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도를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드로아에서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활짝 열려 있었는데도(고후 2:12, 13)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여러 생각들 때문에 곧장 마게도냐로 향하였다.
사도행전20:21)그 지경으로 다녀가며-'지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로스'( )란 말은 특정한 지리적인 위치를 지적하는 낱말로서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이르는 긴 육로 여행도를 다 망라(網羅)하고 있다. 즉 바울은 처음 전도의 옛 중심지인 빌립보(16:12), 데살로니가(17:1), 베뢰아(17:10)의 공동체를 재방문했을 것이며 이 기간 중에 바울이 로마서 15:19에서 말한 바와같이 일루리곤(Illyricum)까지도 갔을 것이다. 또한 이때 그가 이그나티우스 대로(the Egnatian Road)를 따라 서쪽으로 여행하여 그 길의 끝인 아르리아 해의 두로 하키움(Dyrrhachium)에까지 여행했다고도 볼 수 있다(F.F. Bruce). 고린도 후서도 이때 기록한 것으로 본다(고후 7:6).
2)바울의 여행의 주 목적은 그곳 교회들을 계속 격려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곤궁(困窮)한 신자들을 돕기 위하여 연보를 거두는 데 있었다(Tyndale). 바울은 이 연보를 위해 갈라디아와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게 준비시켰던 것이다(롬 15:25-32;고전 16:1-4). 이방인 교회들의 연보는 단순히 사랑을 나타내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
사도행전20:31)석달을 있다가-그곳은 헬라, 즉 아가야 지방이었지만 실제로 바울이 체류하였던 곳은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 였다. 체류 기간은 삼개월로 A.D. 56-57년에 걸친 겨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Bruce). 바울은 고린도에서 가이오의 따뜻한 대접을 받으면서(롬 16:23) 이 기간에 로마서를 기록하였다. 이 서신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그의 방문에 대한 준비도 시키고 또한 체계적이면서도 포괄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해 주기 위함이었다. 바을이 이처럼 로마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장차 로마를 복음 전파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롬 15:17-23).
2)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돌아가기를 작정하니-바울은 고린도에서 이제 어느 정도 자기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알고 헬라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람세이(Ramsay)에 의하면, 바울은 유월절 명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원하는 자들이 타고 가는 순례선(Pilgerschiff)을 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18:18).
3)그런데 바울을 박해해 오던 유대인들이 그가 배에 탔을 때 그를 암살하거나 또는 배 밖으로 밀쳐 버림으로써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득불 노정을 변경하여 해상보다 훨씬 늦은 육로를 통하여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하였다. 여기서 '공모'의 헬라어 '에피불레스'( )는 그의 생명을 노리는 필사적 음모 뜻한다. 그리고 '작정하니'의 헬라어 에게네토 그노메스'
( )는 '결단을 내렸다'(He decided)라는 뜻으로서 그의 생각이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계획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나타낸다(Bruce).
사도행전20:41)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두기고와 드로비모라-'함께 가는'의 헬라어 '쉬네이페토아우토'( )는 '그와 동행했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바울을 수행(隨行)하는 것을 말한다(E. Haenchen). 이 일곱 사람은 지난 2년 동안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궁핍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연보롤 냈던 것을 맡아 가지고 가는 사명을 받은 각 교회의 대표자들이다. 바울은 결코 자신의 손으로 이 연보를 관할하지 않고 각 교회의 대표자들에게 맡겼는데 이것은 초대 교회의 사도적 결정을 따른 행위로서 매우 지혜로운 일이었다(행 6:1-6). 그러면 이제 바울과 함께 동행한 각 교회의 대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2)소바더-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로서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한다. 롬 16:21에 나타난 바울의 친척 소시바더와 동일인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3)아리스다고-19:29의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는 로마까지 바울을 따라 갔으며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하는 데살로니가 출신이다(27:2;골 4:10;몬 24절).
4)세군도-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한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단지 여기만 나오는 인물이다.
5)가이오-더베 출신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한다(19:29).
6)디모데-루스드라 출신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16:1-3).
7)두기고-아시아 사람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하며 언제나 바울과 동행한 인물로서 골로새와 에베소 교회에 바울의 서신을 전달한다(엡 6:21;골 4:7;딤후 4:12;딛 3:12).
8)드로비모-에베소 출신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한다(딤후 4:20).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대표자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대표해서 예루살렘에 간 것같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디모데를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디모데는 아가야 지방과 고린도 교회에 잘 알려졌던 사람이기(고후 1:1) 때문이다(R.C.H. Lenski). 하지만 고후 8:6 이하로 미루어보건대 고린도 교회의 연보는 바울이 그 교회에 보낸 디도와 다른 형제에게 맡겨져 보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디도가 언급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서는 디도가 누가의 형제였다는 주장(Ramsay)에서 신빙성 있는 답변을 찾는다. 따라서 누가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수령하기 위하여 디도와 함께 파견된 두 형제 중 한 사람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F.F. Bruce). 아무튼 바울 사도는 그의 활동의 절정기에서 여러 수행인들에 둘러싸여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한다.
사도행전20:51)그들은 먼저 가서-여기서 그들이란 앞절에 언급된 일곱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빌립보를 떠나 네압볼리를 경유 드로아로 갔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먼저 갔는지 그 이유가 뚜렷하지 않으나 바울은 빌립보에서 누가와 합류(合流)해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일곱 사람보다 후에 드로아로 가기로 여정을 짰던 것으로 추측된다(Lenski, Pulpit).
2)우리를 기다리더라-'우리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다만 우리 가운데 누가가 들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16:10). 따라서 누가를 포함한 바울 일행을 말한다.

사도행전20:61)무교절 후에-
누가와 바울이 뒤에 남아 디아스포라의 관습에 따라 유월절 절기를 조용히 지켰다. 특히 바울은 유월절 양처럼 희생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사명을 새롭게 하고 빌립보에서 무교절 주간이 끝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F.F. Bruce).
2)닷새 만에 바울은 1주간이나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을 생각하면서 서둘러 에베소를 향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닷새나 걸리는 오랜 항해를 하였다. 16:11에 보면 전에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 배를 타고 이틀밖에 안 걸렸는데 여기서는 닷새가 소요된 사실에 대해서는, 역풍으로 인해 항해가 순조롭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A.C. Hervey).
사도행전20:71)안식 후 첫날에-'엔 데 테 미아 톤삽바톤'( ) 은 그 주간의 첫째 날 혹은 안식일 다음날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초대 교인들이 유대인들과 같이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지만(15:21;18:4) 이제는 독립되어 주일날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며 동시에 최초의 언급으로 여겨진다(E. Haenchen, 요 20:19, 26;고전 16:2;계 1:10).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이 안식 후 첫날에 일어났으므로 교회가 이 날을 교회 예배일로 지킨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죄의 세력과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참된 안식과 영원한 소망이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날은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의 규칙적인 예배의 날이 되었다. 믿는 자가, 새 생명을 주사 영원한 안식의 소명을 갖게 하신 주님을 주일날에 모여서 경배함은 마땅하다(히10:25). 이 날을 지킴으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것이 확실하게 세상 가운데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2)떡을 떼려-'클라사이'( )는 '클라오'( )의 제 1부정과거 능동 부정사이며 목적을 나타낸다. 즉 안식 후 첫날에 모인 목적을 가르쳐 준다. 그런데 떡을 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단순한 식사를 의미하는 애찬( , 아르토스, 2:42;고전 10:16)을 가리킨다는 견해. '떡'의 헬라어 '아르톤'( )에 정관사 '톤'( )이 없는 것은 일반적인 식사를 말한다(R.C.H. Lenski). 초기 기독교의 풍습대로 성도들이 성례전(聖禮典)의 필수적인 순서로서 가졌던 애찬겸 성찬이었다고 보는 견해(F.F. Bruce, Pulpit, Alford). 그런데 이것은 교회 내에서 마음대로 가져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하는 등 많은 폐단을 일으켜(고전 11:20-22) 후에 애찬은 없어지고 성찬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본문의 '아르톤'( )에는 정관사 '톤' ( )이 없는 반면에 11절의 '아르톤'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은 떡을 뗀다는 것이 애찬겸 성찬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뒷받침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11절의 '톤 아르톤'은 단지 7절의 '아르톤'을 가리킨다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 고전 10:16, 18과 11:17-34의 가르침을 볼 때 이는 주의 거룩한 만찬(the Lord's Supper)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 의해 뒷받침된다. 많은 무리가 한꺼번에 개인집에 모여서 단순한 식사를 의미하는 만찬을 나누기란 힘들었을 것이란 점이다. 저녁 시간이 아니고 한밤중에 떡을 뗀 것을 생각해 보면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모였다는 것은 부 적절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밤중에 떡을 뗀 것은 단지 그것을 맛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기념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Jonh Calvin). 와의 주장이 보다 무난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한편 떡을 떼는 횟수에 대해서는 별다른 규정이 없기에 각 교회는 임의로 그 횟수를 정했으나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는 초대 교회의 주일 회집(會集)은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매주일 성찬을 행하는 것이 사도들에 의해 정해진 관습임을 알 수 있다(McGarvey). 그리고 떡을 떼는 일은 반드시 말씀을 강론한 후에 실시되었음이 성경(20:7-11)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낸 유스틴 마터의 둘째 해명서(Apology)에 나타나 있다(pulpit).
2)이튿날 떠나고자 하여-바울은 의식적으로 월요일 아침에 여행길에 오를 것을 계획했다. 이는 바울이 주일을 하나님께 구별된 날로서 중요시한데 그 이유가 있다(R.C.H. Lenski).
사도행전20:81)윗다락에-'휘페로오'( )는 9절과 1:13에도 나타났듯이 초대 교회의 집회 장소로 사용된 개인집의 다락방을 가리킨다. 이처럼 개인 집을 신앙 공동체의 목적을 위하여 제공한 것은 초대 교회의 두드러진 모습이었다(Tyndale). 그들은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화려한 성전도 회당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편한 장소일 망정 모이기를 힘썼다(Matthew Henry).
2)등불을 많이 켰는데-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모임에 어두움 속에서의 제의적 매음 행위가 있다고 의심하는 자들에 대한 반박으로 등불을 많이 켜서 장소 전체를 환하게 했다(Ernst Haenchen). 모임의 분위기를 엄숙하고 화려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다(Kuinoel). 사람이 많이 모인 밤중의 집회에 잡담을 방지하기 위해서다(Bengle). 단순한 장식적인 효과라고 본다(Olshausen). 누군가가 떨어지는 것을 즉시 알아보기 위해서다(Meyer). 한 젊은이가 졸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함이다(Alford). 모인 수가 많았기 때문에 밤중 집회에 알맞게 많은 등불을 설치하였다는 견해(John Calvin). 혹자는 다락방 자체가 많은 회중이 모일 수가 없는 곳이라고 하지만 칼빈은 만일 그 다락방에 많은 무리가 모여 비좁지 않았다면 유두고(Eutychus)가 구태여 창에 걸터앉지는 않았으리라는 논리로 반박을 한다. 사치스럽게 허식적으로 꾸며서 장엄한 분위기를 나타내려 했다기 보다는 밤중 집회의 필요성(必要性) 때문에 모임 전체를 환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하겠다.
사도행전20:91)창에 걸터앉았다가-건방지기 때문에 창에 걸터앉았다고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견해도 있지만(Matthew Henry), 그보다는 방이 회 중으로 꽉 차서 유 두고는 청년이기에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창문턱에 앉았다는 것과 (McGarvey) 등불들로 인해 혼탁해진 공기보다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걸터앉았다는 것이 지배적인 해석이다 (Bruce).
그러나 창문은 위험한 자리요 왜 창문에 걸터 앉아겠는가 예배시간에 늦었기 때문이요 왜 유두고 청년만 창문에 앉아겠는가
2)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집회(meeting)의 핵심 내용이었고 예배의 중심이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Tyndale).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지식과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모일 때마다 강론을 들었고 또한 그 가르침에 부착해서 세상과 다른 독특한 삶의 원칙들을 가지고 살아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의 백성임을 능력있게 증시(證示)하였다. 강론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오늘의 교회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인상깊은 구절이다. 바울의 설교가 경장이 길게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 설교를 20분-30분하는 현대교회에 경종이 되는 말씀이다 설교를 길게 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말씀의 중요성과 귀 중성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3)깊이 졸더니...졸음을 이기지 못하여-'깊이 졸더니'의 헬라어 '카타페로메노스' ( )는 '카타페로'( )의 현재분사로서 점차 잠으로 빠져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의 헬라어 '카테네크데이스'( )는 부정 과거분사로서 계속되는 졸음의 결과로 완전히 잠에 곯아떨어진 객관적인 상태를 진술한다(Robertson). 그렇다면 거룩한 모임에,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는 신성한 시간에 왜 이런 현상이 생겼으며 누가는 무슨 목적으로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 유두고는 노동자로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종일 노동으로 피곤하였는데 말씀에 관심이 있어서 졸음과 싸웠으나 결국 그것에 압도되어서 졸다가 잠에 빠져버렸을 것이다(Bruce, McGarvey). 또한 많은 등불들로 인해 방안이 더워졌을 뿐만 아니라 타오르는 기름에서 검은 연기가 나와 공기를 흐리게 하여 산소부족 현상을 일으키므로 졸음이 가중되었다고 본다(Alford, Bruce). 따라서 앞의 8절에서 등불을 많이 켰다고 기술한 것은 유두고가 떨어진 사건에 대한 복선(伏線)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Meyer). 그리고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에 대해 혹자는 말씀을 들을 때에 졸음을 주의하라고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라고 한다(Metthew Henry). 그러나 칼빈(J. Calvin)의 경우는 말씀을 듣는 시간이 한밤중이었고 더구나 온종일 고된 일을 한 사람이 졸음과 싸우다가 잠에 빠진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졸음 때문에 죽음의 벌을 받았다고 유두고의 졸음을 질타하는데 초점을 둔 주 석가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한 이의를 제기한다. 이 견해에 대한 증거로 본문에서 누가는 유두고가 졸다가 잠에 빠져든 시간이 한밤중인 것을 말 함로써 이미 유두고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으며 더욱이 바울이 유두고를 책망한 기록이 없다는 점을 제시한다(John Calvin, Brece, McGarvey). 그렇다면 이 사건의 기록 의도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분으로 계시하고 있는가에 해석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개인의 행위에 역점을 둔다면 이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성경의 메시지를 놓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4)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3층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꼭 죽었겠느냐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I.B.C.) 의사인 누가가 전문적인 관찰을 통하여 진단을 내리기를 '죽은 것 같이'라는 뜻의 '호세이 네크로스'( ;막 9:26)가 아니라 '네크로스'( )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 죽었음을 알 수 있다(Thomas Whitelaw).
사도행전20:101)내려가서-'에페페센'( )은 '뛰어 내려가' 혹은 '달려들어'라는 뜻이다. 바울이 유두고 청년의 생명을 사랑하여 살리기 위해서 빨리 내려 간 것이다 복음 전파에 방해를 받고 지장을 받기에 내려 간 것이다
2)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여기서'안고'를 가리키는'쉼페 릴라본'( )은 '완전히 껴안다', '함께 둥그렇게 붙잡다'라는 뜻으로서 엘리야(왕상 17:21)와 엘리사(왕하 4:34, 35)의 경우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바울의 이런 행동은 구약 예언자들을 흉내냈다기 보다는 사고를 당한 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긍휼의 마음의 즉각적인 표현이며 그를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심정을 다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자세이다(J. Calvin).
3)떠들지 말라-'메 도뤼베이스데'( )란 말은 갑작스런 사고로 온통 동요되어 울고불고 하는 회 중들을 진정(鎭靜)시키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다(Thomas Whitelaw). 일찍이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흐느끼고 통곡하는 것을 보시고(막 5:38ff.) '티 도뤼베이스데'( , '어찌하여 환화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이다. 바울에게 왜 성찬은 미루었고 설교는 길게 해가지고 이런 불상사가 일어 났느냐고 비난과 원망하는 소리 이제는 떠들지 말라고 함
4)생명이 저에게 있다-혹자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청년이 죽은 것이 아니라 까 무라 쳐 기절한 것을 바울이 현대의 인공 호흡법을 써서 살려 놓은 것이라고 한다(Ramsay, Wendt, Zoeckler). 그러나 이는 바울이 그를 끌어 안았을 때 그의 생명이 되돌아왔음을 시사하는 표현으로서(Bruce)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가 소생될 것을 확신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바울의 믿음과 확신이 그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20:111)오래 동안...이야기하고-갑자기 당한 불의의 사고로 인해서 모두들 크게 놀랐으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의한 극적인 이적을 보고 회 중은 두려움과 흥분, 놀라움 속에서 이 잊을 수 없는 밤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여기서 '이야기하고'의 헬라어 '호밀레사스'( )는 바울이 혼자서 더 이상 강론하지 않고 성도들과 자유스럽게 담화했음을 뜻한다. 주님의 권능과 그를 믿는 신앙에 대해서 생생한 사건을 목격한 그들은 피곤을 잊은 채 철야를 한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성도의 교통이다.
사도행전20:121)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바울 일행이 떠난 후에 드로아의 신도들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큰 기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보여 주신 놀라운 사랑의 증표(證票)를 보면서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대로(마 28:18-20)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단한 격려와 기쁨과 용기를 갖게 된 것이다.
2)말씀과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된 임마누엘 신앙 이것보다 더 큰 성도의 위로가 무엇이겠는가 ! 우리의 신앙은 바울의 신앙인가 유두고의 신앙인가 바울과 같이 영적이고 복음적이고 신본주의 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유두고의 사건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열정을 막을수 없었다

유두고의 사건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길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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