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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날을 위하여 (마 24:29-44, 살전 04:13-5:8)

첨부 1


우리의 나라가 가난을 탈피하기 위하여 땀을 흘리던 60년대와 70년대에는 참으로 가슴아픈 사연이 너무도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상처를 씻지 못하고 있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어느 이웃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내집이라도 마련해 보겠다고 가족의 품을 떠나서 먼나라로 떠났습니다. 아내는 첫해는 남편의 귀국을 기다리면서 남편을 맞을 준비를 성실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해 두해 연장하면서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다가 지친 아내는 어느 순간 남편과의 굳은 약속을 망각하고 탈선을 합니다. 어두운 사연을 벗어버리고 남편을 다시 맞을 날이 오겠지 하는 생각만을 되 뇌이면서 죄악의 깊은 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집을 사고도 남을 돈을 손에 쥐고 귀국을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반겨줄 가정을 찾아 왔건만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는 남편의 귀국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아니했습니다. 용서를 받기에는 너무나 깊어진 상처였기에 그들은 기쁨의 만남을 이룩하지 못하고 영원한 남이 되어 오늘도 지내고 있습니다.
수많은 날을 고독과 싸우고 수많은 밤을 유혹과 싸우면서 누구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목적은 반갑고 감격에 찬 만남에 있습니다. 그 만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에는 인간의 행복이 안겨지고 그렇지 못할 때는, 그 만남자체가 너무나 슬픈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본문접근

오늘은 우리의 기독교에서 의미 깊게 시작하는 교회력의 첫 주일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오늘 대강절 첫 주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소중한 진리입니다.
그리스 반도 북쪽에 있는 마게도냐 수도이며 항구도시인 데살로니가에 세워진 교회의 식구들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반대한 그곳의 유대인들은 그들이 받은 기독교의 진리가 잘 못된 것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박해가 심하여지자 교인들 일부는 지극히 문란한 이방인들의 생활에 젖어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이나 그 시기에 대한 확신도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그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 가르침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이 시간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우리의 쉬운 언어로 다음의 부분들을 다시 경청하십시다.

본문사역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어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중의 도둑같이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기에 그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분에게 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태평세월을 노래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해산할 여자에게 닥치는 진통과 같아서 결코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암흑 속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그 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주제접근

하나님이 바울을 통하여 주신 오늘 이 귀한 말씀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실 메시지는 바로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망각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주님의 오심이 어떠하리라고 상세하게 밝혀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현대의 기독교는 주님의 다시 오시는 재림에 대하여 서서히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설혹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오심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기되기를 바라는 마음들입니다. 전쟁과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진 시대에서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마르나타”를 부르짖으면서 그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주님 맞을 준비를 서두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의식주가 해결이 되고 아쉬운 것이 없는 세상이 되기에 “주님 오시더라도 조금 있다가 오십시오”라는 신앙상태로 변질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빼버린다면 그 신앙은 소망이 없는 세상이요 인간 중심의 신앙이 되어 버립니다. 탈선을 일삼는 무책임한 그리스도인들로 타락을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진수를 망각한 껍데기 만의 신앙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신앙이 이 아침 다시 다짐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오늘의 물질문명에 도취되어 있다가 우리 주님 갑자기 오실 때에 주님 앞에 불림을 받지 못하고 완전히 실패한 성도들이 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고 주님 맞이할 준비와 자세를 확립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본론

먼저,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재림의 현장의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 주십니다.

(말씀)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노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어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니라.(4:14-17)

(해석)

많은 성도들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다시 오실 것인지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들은 이 재림과 심판의 날이 금방 있을 것으로 알고 언제나 강조하고 준비를 했으나 재림이 인간들의 생각대로 오지 않아서 때로는 실망을 하게 됐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이 오면 그 때 주님의 재림이 온다고 믿었던 사람들도 뜻대로 이룩되지 않은 이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일들로부터 지치게 되었고 오지도 않는 재림을 준비시킨다는 불만도 터뜨렸습니다.
그래서 언제인가 오겠지 하는 막연한 신앙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오는 날 그 때 가서 보기로 하고 재림에 대한 신앙은 잊혀진 사건으로 버려지기까지 되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어떤 이들은 이 신앙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고 주님의 재림은 예수 믿는 것으로 족하다고 반대의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적용)

사실, 주님의 재림을 믿는 뜨거운 신앙의 사람들도 적지 아니 하지만, 오늘의 20세기 후반에 와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수많은 회의와 불신이 만연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의 신학적인 조류가 어떻게 흐르던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세히 보면서 경청해야 합니다.
먼저 사도행전 1:11절의 사건과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 부활 후 40일째 되던 날. 감람산 위에서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시고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하늘로 올리어 가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자세히 쳐다봅니다. 그 때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반론을 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구약 창세기의 노아 홍수 때도 똑같은 반응과 질문이 있었습니다.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고 타락을 하고 취하면서 노아가 나타나 하나님의 심판의 도래가 가까워 옴을 외쳤으나 아무도 “미친 영감의 소리라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누가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조롱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홍수는 왔고 비웃던 무리들은 전멸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예언을 구약에서 수백 년, 수천 년 전부터 있었으나 그들은 실감 있게 믿지 아니했습니다. 모두가 실의에 찬 채 메시야의 오실 것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웃기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던 때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사실 것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을 함께 동거 동락했던 제자들마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고 또 무슨 말씀인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연약한 소수의 연인들만이 그 말씀을 믿었을 뿐입니다. 주님은 역시 부활하였습니다.
재림, 우리 주님이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신약성서에서는 318회나 언급이 되어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된 것처럼 신약의 이 말씀도 분명히 성취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다시 오실 그 현장을 분명히 묘사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고 천사장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 때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은 먼저 살아나서 주님 앞에 나아가고 살아 있는 자는 변화된 몸으로 구름 속으로 이끌어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면서 주님 앞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현장을 다음과 같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다시 경청하십시다.
그 때에 인자가 올 징조가 하늘에서 나타날 터인데, 그 때에는 땅에 있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천사들을 큰 나팔 소리와 함께 보낼 것인데 그들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선택된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마 24:30-31)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래도 믿지 않으시렵니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318회나 언급되어진 이 사실을 외면하고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으실 분이 아직도 있는지요. 우리 주님의 말씀이 어느 곳 어디에서 틀려 본적이 없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복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약속하신 미래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고 오늘을 사는 성도들만이 참된 기독교의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우리 주님은 다시 오시는 그 시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말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다”
(행1:7)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

(해석)

기독교의 역사에서 많은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의 시기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성도들은 포기까지 합니다. 현대의 지성인들은 항의를 합니다. 무작정 그 날을 기다릴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막연한 가르침이 어디 있느냐 많은 비난과 도전과 불신을 합니다.
정말, 주님의 재림의 시기를 알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몇 년, 몇 월, 며칠이요 하면 얼마나 권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막상 그 시기를 인간이 알게 된다면 그 날을 위한 준비작업보다 그 직전까지 펼쳐질 죄악과 먹고 마시고 파괴하는 탈선이 오히려 더 심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그 날은 미지수에 놓고 한 날 한 날 준비를 하는 것이 더 정상입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 주님께서는 어렴풋이 그 때를 짐작할 수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셔서 제자들과의 얘기를 나누신 때였습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주님 오실 때와 세상이 끝날 때에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저희에게 알려 주십시오.”
그 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십니다.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 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또 여러 번 난리가 일어나고 전쟁소문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당황하지 마라. 그런 일이 꼭 일어나고야 말 터이지만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한 민족이 일어나 다른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다른 나라를 칠 것이며, 또 곳곳에서 기근과 지진이 일어날 터인데 이런 일들은 다만 고통의 시작일 뿐이다. 또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하늘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끝이 올 것이다.”(마태복음 24:4-7, 12-14)

(적용)

이 주님의 대답 가운데 모두가 오늘의 20세기 후반에서 더욱 뚜렷하게 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전쟁이 금방이라도 있을 것만 같은 소문이 늘 쉼 없이 들립니다. 기근과 지진의 지극히 변수적인 발생이 수없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구의 기하급수적인 팽창은 미래의 식량을 염려하게 됩니다. 불법이 성한 것, 윤리 도덕의 피폐는 극치에 달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인륜의 타락은 벌써부터 나타났습니다.
말씀대로 말세의 시작입니다. 오직 단하나, 우리 주님의 말씀 중에 있던 사실이 이룩되지 않는 것은 하늘나라의 복음이 아직도 200여 종족에게 미처 전파가 되지 못한 사실입니다. 이것도 시간문제입니다. 최대의 교통시설과 풍부한 선교의 지원은 그들에게 미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징조들이 보이자 세계의 도처에서는 재림의 일자를 설정하고 명예와 돈을 모으는 종교지도자들이 등장한 사례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는 이 장림이라는 사람이 다미 선교회를 조직하고 1992년 10월에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휴거가 있을 것이라 하여 나라 안팎을 시끄럽게 했습니다.
윌리엄 밀러라는 사람은 아주 유명한 사건을 저지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843년에 세상이 끝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설교했다. 밀러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1843년이 다가오자 광분하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집을 팔고 농장과 소유물을 처분했고 웨스트포드라는 곳에서는 약 500명이 모여 흰옷을 입고 주님 오실 날을 기다렸다. 1842년 12월 31일 자정이 되었을 때 아모스(Crazy Amos)라는 늙은 술주정꾼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건물 밖에서 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그들이 모인 자리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고 주님 강림의 나팔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나가느라 여러 사람이 다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 재림에 관한 그릇된 예언은 밀러 사건으로 그치지 않았다.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였던 러셀(C. Russell)은 1874년에 주님의 재림이 있고 그 후에는 천년왕국이 계속된다고 또 한번 교회를 어지럽혔다. 한국에서도 길 선주 목사가 1922년 4월 29일 주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해서 한동안 교회 안에서 혼란을 일으켰다.

재림의 시기에 관한 성도들의 관심은 지대합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우리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고 세상의 어떤 인간도 알 수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도 알 수 없습니다.
글쎄요. 도둑이 들어오는 날을 알 수 있었더라면 그 큰 손실을 당하겠습니까 탈선한 부인이 해외를 떠난 남편이 돌아올 시간을 정확히 알 수만 있었더라면 그 가정이 어찌 파탄이 왔겠습니까 불행히도 예고 없이 닥쳐온 주인이었기에 그 파멸에 이르는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그 때와 그 시기는 우리의 알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다”(행1:7)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

셋째로, 문제는 그날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의 대답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너희는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4)고 말씀하십니다.

(말씀)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5:6)

(해석)

주님을 신랑으로 생각하고 그분의 오심을 위하여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임무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힘과 행복을 얻는 비법이요, 우리 생활의 어느 시기를 물론하고, 늙지 않게 하는 비법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신앙의 가장 현명한 길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믿음은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풀 수 없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깨어 있는 믿음 깨어 있는 근신만이 최후의 순간에서 환호성을 지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변의 불신앙의 사람들이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말려들지 말고 그 속에서 정신을 깨어 주님을 기다릴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적용)

이 도령과 성 춘향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소중한 작품이 되는 것은 춘향의 고귀한 기다림 때문입니다. 갖은 유혹과 시련을 굳게 딛고 기다림의 자세를 흔들리지 않는데 그 가치성을 지닌 것입니다.

(예화)

어느 처녀 이야기입니다.
마음을 바쳐 사랑했던 연인이 떠나면서 오고야 말겠다는 한마디의 말을 믿고 자신의 일을 끝나면 지체 없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저 먼 모퉁이 길이 보이는 뜰에 나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너무나 많은 세월을 애타게 기다리는 딸의 모습에 아버지는 화가 났고 더 좋은 신랑감을 소개합니다. 그 처녀는 듣지 아니합니다. 매를 잡아 때린다는 것이 그만 눈을 다치게 되었고 그 딸은 드디어 실명을 하게 됩니다. 장님이 된 딸은 그래도 쉼 없이 희망을 가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변함없이 합니다. 일이 끝나면 발길을 옮겨 기다리던 자리에 가서 행여나 지금이나 오실까 하면서 그 님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립니다. 그 처녀의 머리에 백발이 솟기 시작하던 때 드디어 그 님은 찾아왔습니다. 장님이 된 채 기다린 자신의 연인을 본 그 님은 놀랍고 괴롭고, 감격스러운 심정으로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고마운 심정을 표하면서 영원한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이단 사교집단들 처럼 일손을 놓고 함성을 터뜨린 행위의 기다림이 아닙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준비가 수반된 기다림입니다. 우리 주님 예비하라는 말씀은 신랑을 맞이할 신부처럼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신앙의 정조와, 성결한 신앙인의 생활과, 주님을 사모하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이 준비가 없이는 주님을 영접하는 자격이 없어집니다. 우리 주님은 그래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마 25장)

열 처녀가 모두 손에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그 중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미련합니다. 함께 기다리지만 신랑은 나타나지 아니했습니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신랑이 갑자기 닥쳐오는 소리가 납니다.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은 모두가 꺼져갑니다. 그 기름이 충분히 예배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슬기 있는 처녀들은 기름병을 하나 더 준비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려는 들뜬 마음만 있을 뿐 장시간 준비해야 할 기름은 없었습니다. 동료들에게 기름을 좀 달라고 하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합니다. 그때야 기름을 사러 뛰어갑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신랑은 오고 그 문은 닫힙니다.
미련한 처녀들-주여 문을 열어 주소서.
주님-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그렇습니다. 슬기 있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만이 우리 주님을 맞을 수 있는 영광과 기쁨이 주어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이 마지막이라고 할 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애라 그날까지 실컷 먹고 즐기다 죽자고 합니다. 소위 케싸라 쎄라 , 될 대로 되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과 인격을 갖춘 사람은 자신의 준비와 결산에 바쁩니다. 누구에게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은 없었던가 나의 지난 길에 흠집은 없었던가 성실한 준비와 점검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흔들림 없이 슬기롭게 오늘을 준비해간 사람들의 신앙이 참 신앙입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고 할 때 이리 밀려다니고 저기 있다고 할 때 저리 밀려다니는 사람들의 발길은 충실한 준비자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파멸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이비적인 무리들의 유혹이 적지 아니합니다. 여기만 참 진리가 있다고 현혹하는 무리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주님 맞이하기 위하여 깨어 있다는 것, 정신을 가다듬고 산다는 것, 준비를 한다는 것, 이 모두는 실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주위로부터 외로운 존재가 됩니다. 많은 오해도 받습니다. 중상모략의 고통도 받습니다. 가난한 길을 걷기도 합니다. 육신의 욕구를 잠재우는 고통도 겪어야 합니다.

넷째로, 주님이 다시 오셔서 새롭게 전개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의 관심은 큽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계시록 21장에서 말씀하십니다. (계21)

(말씀)

보아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리라. (계21:3-5)

(해석)

이 말씀은 신실하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약속입니다. 이 약속 안에는 하나님의 장막이 그 백성과 같이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감히 접근 할 수 없는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갖은 수난과 핍박을 당하였던 하나님의 자녀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가장 반가운 소식입니다. 거기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어떤 고통이 없는 새로운 세계임을 보여주십니다.

(적용)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 오시는 날 그 때 남모르게 흐르던 눈물이 거두어 지고 환한 미소와 함께 주님의 품에 안깁니다. 세상의 그 많은 오해와 중상과 모략이 자취를 감추어 우리의 가슴은 모두 평화의 동산이 됩니다. 우리의 육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동분서주하던 모든 발길도 멈추게 되고, 오직 주님을 모시는 기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진정 근심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됩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 주님이 오시는 날 우리 앞에 분명히 전개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새 세계에 손에 손을 잡고 들어가야 합니다.

결론

창조, 노아 홍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의 구속의 수난, 부활, 승천, 성령의 역사를 믿을 진데 어찌 심판주로 오신다는 우리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겠습니까
깊은 잠에서 깨어납시다.
어두운 밤에서 밝은 대낮으로 나옵시다.
게으르고 태만한 오늘의 진부한 삶에서 새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찬란한 광채가 빛나는 우리 주님의 영접을 받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새 하늘과 새 땅에 한 사람의 낙오도 발생되지 않도록 이 대강절에 새롭게 마음과 몸을 단장하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우리를 향하여 부탁을 하십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전 3:12-13)

2. 본 설교가 있기까지

이 설교가 있기까지의 정황과 사연

교회력을 시작하는 대림절(대강절)을 맞이하는 첫 주일의 설교를 앞에 두고 설교자는 깊은 명상과 기도를 해야 했다. 아기 예수의 오심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보다는 심판으로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당연히 강조되어야 할 주일이기에 "무슨 말씀을 어떻게 운반하오리이까"하는 기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때 주어진 영상(靈想)은 오늘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고 있는 신앙으로부터 떠나 오히려 '재림의 연기'를 원하는 편으로 기울어진 신앙의 변절에 관한 것이었다. 기독교의 신앙 형태의 신앙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종말론적인 신앙이 자난 세기 동안 한국교회를 오늘의 성장에 이르게 했는데 그 신앙이 사라진다면 우리 신앙의 후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절박한 심정이 발생하였다.

본문의 주제의 선정

주제는 바로 주님의 재림으로 쉽게 결정이 되었다. 그러나 본문이 바울 서신에서 나와야 하는지 아니면 복음서에서 나와야 하는지에 대한 망설임이 다시 일기 시작하였다. 이 망설임은 바로 기도로 이어지고 고요한 마음을 가지고 본문을 다시 읽고 또 읽으면서 어느 말씀을 본문으로 해야 하는지 주어진 생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본문은 현대인들의 눈에 훨씬 명확하게 주님의 재림을 보여 준 데살로니가전서 4:13-5:8이 적합하다고는 생각이 들었고 주님이 말씀한 마태복음 24:29-44은 설교의 내용에서 다시 들려주기로 결정하였다.

목적의 설정

본 설교의 주제는 선포적인 설교로 충분하지만 재림의 확신과 시기의 준비에 관한 말씀의 운반은 교훈적인 설교로 함이 타당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현대의 교인들이 재림이라는 단어마저 생소하게 여기는 현상이 한국의 강단에서 재림에 대한 설교가 거의 사라져 가는 현실을 감안할 때 재림의 교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우선적인 임무였다. 따라서 그 시기에 대한 혼란이 한 때 이 땅을 휩쓸었다는 사실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재림에 대하여 취해야 할 태도를 말씀으로 일관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본 설교를 교훈적인 설교(Didactic Preaching)로 그 목적을 정하게 하였다.

설교의 유형과 형태

본 설교의 유형은 주제설교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본문설교이다. 본문을 정의해 가는 과정에서 본문에 나타난 메시지가 재림이라는 기본적인 주제이다. 그러기에 본문을 중심하여 재림의 말씀을 회중들에게 운반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고 말씀에서 주안점(대지항목)을 뽑아 하나님의 말씀과 회중의 만남을 시도하였다. 특히 대지마다 거기에 해당하는 본문을 다시 선포하여 경청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말씀의 해석과 적용을 시도하였다.

설교자의 등장 문제

한국의 설교가 가장 큰 상처를 입고 있는 부분이 설교자의 부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본 설교에서는 어떤 순간이라도 설교자의 등장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대지의 표현도 성삼위 하나님을 주어로 하였고 어떤 문장도 일인칭 단수가 불필요한 문장으로 구성하기에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어떤 예화도 설교자가 주입되거나 등장하는 경우를 철저히 억제하는 노력을 해 보았다.

자료의 수집

설교는 자신의 구상과 분석과 자식으로 포장될 수 없는 하나님 말씀의 운반이며 그 말씀을 알아듣도록 하는 해석과 적용이 우선적인 설교자의 과제이다. 그러기에 객관성이 있는 사례와 연구의 결과들을 찾는 설교자의 수고는 너무나 당연하다. 이러한 필연적인 임무를 위하여 본 설교는 먼저 기다림과 준비에 실패한 한국가정의 이야기를 서론으로 인용하여 말씀의 접근을 시도하였다.
재림의 시기에 관하여는 한국의 이 장림을 들었고 해외는 윌리엄 밀러, 여호와 증인의 창시자 러셀, 안식교 등을 들어 그들의 허황된 선전을 공격하는 차원이 아니라 시기에 대하여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입증하기 위해 사영하였다. 재림의 준비에 관한 부분에서는 어는 눈먼 소녀의 안타까운 기다림과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를 인용했다.

3. 본 설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먼저 본 설교는 주제가 삶의 현장에서 발생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교리에 속한 것이며 거기에 더하여 교훈적 설교로 가르침을 목적으로 했기에 회중의 심금을 울리는 부분이 빈약하다. 특별히 이러한 약점은 전달의 과정에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강하게 강조하고 호소하는 음정의 사용을 위한 적절한 순간을 포착할 수 없었다는 데서 입증되었다. 호소의 설득을 결여한 설교는 회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힘이 없다는 이론을 상기하면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둘째, 좀더 충분한 자료의 발굴이 있어야 함에도 설교자의 사정은 차분히 본 설교만을 위한 자료의 수집에 최선을 기울이지 못하여 통상적인 자료 외에는 눈에 띄는 것이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지 못하였다. 설교가 언제나 충분한 자료를 수집하지 못할 때 설교자의 언어와 경험과 지식에 의존하는 단조로운 해석과 적용으로 끝난다는 사실이 본 설교에서 다시 한번 보인다.
셋째, 한국교회 초기 신앙의 선배들이나 신사참배의 현장에서 재림을 바라보고 옥고를 치르던 아름다운 신앙의 보혈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재림을 바라보고 사는 성실한 신앙인들을 발굴하여 보여주고 그들을 향한 따뜻한 위로나 격려가 부족함을 보게 된다.
끝으로, 마지막 대지에서 시도한 굿 뉴스(Good News)로서의 재림에 대한 부분에서 감동적인 예화를 들어 적용할 수 있었으면 훨씬 더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을 촉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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