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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건을 연습하라 (딤전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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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봉독하신 말씀 가운데서 디모데전서 4장 7-8절 말씀을 다시 받들어 읽겠습니다.
“망녕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을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연습한다’는 말은 연마하여 습득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르쳐서 풀무에 연단하는 것으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훈련을 통하여 그 믿음이 연마되어서 변하지 않는 금과 같은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연습 혹은 훈련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여기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만 아니고 다른 곳에 보낸 편지 가운데도 많이 강조한 말입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은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을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것과 같다고 종종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으면서 헬라의 유명한 올림픽 경기 같은 이스마니안 경기를 위해서 선수들이 연습하는 광경을 열심히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헬라 계통의 유대인인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 그에게 실감 있는 말 ‘연습’이란 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활동하는데 강조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인
줄 생각합니다.
그때 이스마니안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서 젊은 선수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의 국가대표 선수들의 연습장인 태능 선수촌에 가면 우리 나라의 젊은 선수들이 얼마나 고된 훈련을 하는지 모릅니다.
올림픽을 위시해서 세계적인 경기에 출전하는데 연습 없이 출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훈련이 얼마나 심한지 어떤 때는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정도라고 합니다. 연습 없이 챔피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운동선수가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습하는 것처럼 “너는 경건을 연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 우리 교회 기드온 성교회 후원으로 특전사에 가서 훈련받는 군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우리 교회 금요찬양팀과 크로마하프 찬양팀이같이 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여러분이 아시겠지만 특전사 훈련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강한 훈련을 받는 군인들입니다. 그렇게 강한 훈련을 받기 때문에 군인 중에 가장 강한 군인들입니다. 강한 훈련은 강한 군인을 만듭니다. 훈련없는 군인은 군인 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서울시립교향악단 500회 연주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습니다. 시향에서는 시향을 창설하는데 지대한 공이 있으신 김생려 선생님을 모시고 기념 연주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김 선생님은 연세가 높으셔서 지금 미국에 살고 계신데 아마 마지막 지휘를 하시는 마음으로 초청이 되어 오시게 되었고, 연주 전주일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예배를 같이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목사님 제가 시향 500회 연쥬회에 지휘를 맡기 위해 초청이 된 것은 영광입니다. 그런데 제 건강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마지막 지휘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바쁘시겠지만 연주회 날 오셔서 지휘하기 전에 기도를 좀 해 주세요.”라고 부탁하셔서 제가 시간을 내서 제 집사람과 함께 지휘자실에 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연주회장에 들어갔는데 청중이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협주자로 불란서에서 활약 중인 백건우씨가 초청되었는데 백건우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입니다.
그런데 그가 피아노 협연을 하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무식한 제가 볼 때는 그저 마구 치는 것 같은데, 한 음도 틀리지 않고 쳐나가요. 그렇게 하는게 그냥 되나요 피나는 연습이 있어야 합니다. 들리는 말에 그는 하루에 피아노 연습을 여섯 시간씩 한다고 그래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그 자리를 지키려면 그만한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연습 없이 그냥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연습하라.” 신앙인은 경건을 연습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디모데에게만 필요한 말씀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경건을 연습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경건’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경건이란 말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를 말합니다. 흔히 헬라에서 종교에 대하여 말할 때 사용된 말인데 이것은 가장 높은 분에 대한 경외 혹은 존경, 예배 그리고 순종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을 연습하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존경, 예배와 순종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기본 태도를 바로 가지기를 연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이 경건이란 말을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완전하고도 아름다운 태도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경건을 연습하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경외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 예배와 순종이 우리 생활에 습관이 되고 전통으로 젖어 버릴 만큼 수없이 되풀이하는 연습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연습 없이는 아무리 좋은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예술에서나, 운동에서나, 무슨 일에든지 승리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연습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육신 생활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한 생활의 연습은 범사에 유익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몸이 건강하기 위해서 적당한 운동과 건강법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필수 조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을 위해서 경건을 연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자기 몸의 건강을 위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지마는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는 관심이 적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경건을 연습할 수 있습니까
먼저, 경건을 연습하는 사람이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운동 연습을 할 때 기술만 익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금하는 것이 있습니다. 음식도 아무거나 먹지 않습니다. 내 몸은 건강하니까 괜찮다고 하면서 좀 상한 음식 같은 것을 먹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당장 병이 나서 쓰러지지는 않는다 해도 그 만큼 몸에 지장을 가져 올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이라고 해서 조심하지 않아도 병 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병에는 약합니다.
마찬가지로 경건을 연습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조심 할 것이 있습니다. 경건 생활에 방해가 되거나 유혹 받을 만한 일, 그런 장소가 있으면 아예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편 1편에도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경건을 연습하는 사람은 세상을 등지고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신 적이 계십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원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삽나이다”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등지고 떠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빠지지는 않아야 합니다. 범죄하기 쉬운 곳은 피함이 좋고, 부득이 피할 수 없을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왜요 사람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병에 강한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에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지마는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에 침노를 당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우리 가운데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 해도 나는 악에 물들지 않고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장담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스스로 섰다고 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장담하다가 실패하지 맙시다. 그래서 베드로도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건을 연습하는 삶이 힘쓸 것이 있습니다. 노력과 결과는 언제나 정비례하는 법입니다. 많이 힘쓰면 좋은 결과가 될 것이고 적게 힘쓰면 그만큼밖에 기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얻겠다는 것은 삶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에도 꼭 연습이 필요합니다. 경건의 연습을 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하는 것, 기도에 힘쓰는 것, 정한 시간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 교회의 책임 맡은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하는 일, 이런 것이 말하자면 경건을 연습하는 것인데 이 연습하는 생활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연습이란 말 가운데는 과격한 규칙하에서 사는 연단과 수행의 생활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연습이란 귀찮고도 힘든 것입니다. 한 것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귀찮은 일이요,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든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은 연습하는 것만큼 발전하고 성장합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가대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물론 회중도 듣습니다마는 우의 찬양은 원칙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찬양이 조금이라도 소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정성이 담겨진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연습을 해서 덜 익은 것이 아니라 무르익은 과일과 같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중에 찬양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회중들도 찬양을 통해서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충분히 연습이 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연습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힘든 연습을 충분히 하지 아니하면 정성된 것이 만들어 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연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편하게, 쉽게 살고 싶은 것이 육신의 소욕입니다. 뛰는 사람은 걷는 게 쉽고, 걷기보다는 서 있는 게 쉽고, 서 있기보다는 앉아 있는 게 쉽고, 앉아 있기보다는 눕는 편이 쉽고, 누워 있기보다는 자는 편이 쉽습니다. 자는 것보다 아주 가면 더 쉽습니다. 인간이 쉬운 것, 편한 것만 택하다 보니 경건의위기를 직면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마지막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항과 불법, 자기 쾌락을 즐기는 것으로 가득차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사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그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기계문명은 고도로 발달해서 육신적으로는 전에 비하면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하게 살고 있지만 이상한 것은 마음은 더 불안하고, 인간 소외 현상을 자아내고 있으며, 위대한 성취도 많지만 헤어 나올 수 없는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문란한 성생활과 마약, 그리고 술에 빠지고 있습니다.
현대 교육에서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기술을 익혀 주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거의 손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삼위일체입니다. 사람은 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영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신앙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어느 명문 대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4년 동안 대학에 다니며 공부를 잘 해서 최고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었고 많은 졸업생을 대표하여 졸업식에서 졸업 연설을 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졸업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수한 두뇌를 가진 젊은이었습니다. 가정도 유복해습니다. 이 학생이 졸업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를 4년 동안 가르쳐 주시기에 수고하신 여러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저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제가 전공한 전문적인 지식 외에 무엇을 주셨습니까 4년 동안 한 반에서, 같은 기숙사 방에서 같이 지낸 학우 여러분, 여러분은 나와 같이 공부하고, 운동하고, 즐겼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저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4년 동안 저희들의 학비를 조달해 주시기 위해 애쓰신 부모님, 이 학교는 미국에서도 명문 대학인 것을 자타가 공인하며, 저희들도 자부하고 부모님들도 자랑으로 생각하시리라 믿습니다. 다른 학교보다 학비가 비싸기 때문에 상당한 재산을 가지신 분이 아니시면 자녀를 이 대학에 보내실 수가 없으십니다. 여러분은 저희에게 그만큼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부모님들 여러분, 여러분이 저희에데 학비를 조달한 것 외에 무엇을 주셨습니까
오늘 이렇게 영광스러운 졸업식을 하는 이 마당에서 솔직히 한 말씀 드릴 것이 있다면 저는 대학 4년 동안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교수님, 부모님, 그리고 오늘 졸업하는 동기생 여러분!
우리는 돈 버는 법, 취직하는 법은 배웠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인간에게 부딪치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곤란을 직면하여 어떻게 살아가는 하는지를 가르쳐 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모든 졸업생들은 동감이라고 다같이 일어서서 한참 동안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바로 사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바로 사는 길은 여러 길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길은 그 길이 좁고 험하다”고, 그 길이 경건의 길입니다.
사람들이 그 길을 좋아하지 아니합니다.
여러분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셨습니까 사람이 의미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인간화라는 것은 그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이니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돌아서는 생활입니다. 이 생활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인 것을 인정하고, 그의 자비하심에 온전히 의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유지되며,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순종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는 것이 경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건이 오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물직적인 압력, 세속적인 압력, 성적인 압력이 강하게 도전해 오는 이 세상에서 깨끗하게 순결하게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가 그 당시 낡은 먼지로 쌓이고 쌓인 교회에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말씀에 물어보고, 말씀에 충실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할 길을 찾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사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크리소스톰은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같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과거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파합니다. 우리는 외국인이면서도 외국인 아닌 것처럼 살아 보려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서양에 가면 서양에 사는 한국 부인 중에 서양 부인처럼 치장한다고 머리카락을 염색을 하고 화장을 별하게 하는 분이 혹 계신데 본인한테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마는 모든 게 어색해요.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답게 치장해야 멋이 있지요. 남의 흉내 내면 멋이 없어요. 머리카락 색깔이 서양 사람 같으면 서양 사람되나요 하나님이 피부와 생김에 다 맞게 설계하신 것을 우리 마음대로 바꾸니까 균형이 맞지 않아서 어색한 거예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었으면, 세상 사람처럼 살아도 안되고 산다 해도 어색합니다. 무엇인가 다른 데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경건의 연습이에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경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위험과 핍박이 있어서가 아니라 안일과 유혹이 그리스도인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유혹을 이기고 죄악된 세상에 대항할 만한 힘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이 죄악된 세상과 맞서 이기려고 하면 경건을 연습하지 않고는 실패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경건을 연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를 경외할 때 자기를 조정할 수 있는 자제력이 생기게 되고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경건을 연습하므로 교회는 항상 아름다운 향기를 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경건을 연습하므로 누리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 했습니다. 경건의 연습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게 되면 그 사람은 보이는 이 세상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저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그 날에 부끄럽지 않게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영원히 산다는 것을 확신할 때는 그 사람이 결정하는 모든 것과 삶이 전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지게 됩니다. 진정한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따라서 고난의 세계 속에서도 위로를 받으며 용기와 확신 속에서 온갖 인생의 거친 파도를 두려움 없이 헤쳐 나가며 인생의 거친 파도를 두려움 없이 헤쳐 나가며 인생을 빛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건을 연습합시다. 그래서 금생과 내생에 주님의 약속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994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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