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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짓 선생들의 공허성 (벧후 02: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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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본 서신의 3분의 1을 거짓 선생들과 그들의 멸망에 대해 할애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베드로가 북부 터어키에 있던 신자들의 영적 상태를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한 믿음의 고백 후에 이리저리 표류하는 신앙 생활은 매우 위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자위합니다. “나는 교인입니다. 나는 내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씻기셨으므로 나는 죽은 후에 천국으로 갈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고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사는 안일한 교인들을 염려하였습니다. 인생을 헛되이 보내는 교인들은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사는 자들입니다. 교회를 건성으로 다니며 신앙 생활을 똑바로 하지 않는 자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삽니다.

그런데 이런 미지근한 교인들은 성도의 사랑과 교분에서 이탈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영혼을 좀먹는 거짓 선생들에게 노출되는 위험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항상 희생자를 노립니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활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자들의 환심을 확보하고 그 다음 단계로서 거짓 교리를 주입시키며 마침내 탈선의 길로 오도합니다. 베드로가 우리들에게 경계시키는 것이 곧 이러한 거짓 선생들의 수작들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헛된 약속들
이들의 입은 부드럽고 재간이 있어 청중의 마음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호감을 얻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약속들은 헛된 것들입니다. 이들은 물 없는 샘과 같습니다(2:17). 목마른 여행자가 무더운 길에서 샘물을 발견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 여행자는 한달음에 샘으로 달려가서 마실 것입니다. 참 신자들 중에는 목마른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인생길은 험난하고 고달픕니다. 그들은 거짓 선생들로부터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는 약속들을 받고는 샘물을 열망하여 더욱 가까이 나아갑니다. 거짓 선생들의 말은 목마른 영혼들의 귀에 솔깃하고 그럴듯한 말처럼 드립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자세히 알고보면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큰 소리로 약속을 해 주지만 영구적인 가치르러 가진 은혜는 전혀 건네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구미가 당기는 말을 하지만 실속은 메마르고 공허하며 무가치합니다. 스펄전의 전임 목사였던 존 질(John Gill)은 거짓 선생들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습니다.
“ 이 사람들은 빛의 천사들처럼 보인다. 이들은 의(義)의 사역자들로 가장하고, 경건한 척하며, 자기들의 지식을 과시하면서 추종자들에게 축복을 약속해 준다. 그러나 이들은 메마른 샘터처럼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에게 큰 실망만을 안겨준다. 거짓 선생들의 발 아래로 이끌려 가는 자들은 더럽고 찌꺼기가 가득 찬 오물을 발견한다. 거짓 선생들이 제공하는 샘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나 참된 교리가 없는 오물 투성이의 웅덩이에 불과하다.”
거짓 선생들은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입니다(2:17). 단비를 갈구하는 자는 지평선 위에 두터운 안개가 광풍에 밀리는 것을 보고 기쁨의 탄성을 올립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신선한 단비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 하지만 비를 안겨 줄 것으로 기대했던 안개는 가가이 오기가 무섭게 뜨거운 태양 빛의 열기로 금방 증발해 버립니다.

베드로는 이런 현상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할 때에 자주 경험했을 것입니다. 유다는 이런 거짓 선생들을 가리켜 “바람에 불려가는 물(비) 없는 구름”(유1:120이라고 하였습니다. 거짓 선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는 말합니다.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2:17). 거짓 선생들은 어두운 지옥의 심연에서 영원히 머물게 될 것입니다(유1:13). 이들은 베드로가 이미 지적한 대로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2:10) 입니다.

유다는 거짓 선생들을 “유리하는 별들”(유1:13)ㄹ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의(義)의 궤도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방황하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자들입니다. 거짓된 배교자들의 약속들은 힘이 있고 충동적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심리를 흥분시키는 말들을 메시지 속에 넣고 거듭 강조하며 호언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면서 그들은 물질의 축복, 자녀의 축복, 건강과 출세를 보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내세우면서 적극적이고 자신있는 믿음을 가지라고 호소합니다. 그들의 말은 응변적이고 달변이며 듣기에 재미가 있고 시원합니다.

거짓 강사들의 메시지는 구수하여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많이 아는 듯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는 능력 있는 종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우리 인생의 여러 문제들이 쉽게 풀릴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인기 좋은 사역자나 강사들을 부지런히 따라 다니면서 마음도 주고 헌금도 냅니다. 그러나 “헛탄한 자랑의 말”이 돈을 사랑하며 자기가 잘났다고 과시합니다. 거짓 선생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은 결코 경건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욕심이 많고 교만합니다. 거짓 선생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여 거룩한 생활을 떠나 악한 행위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음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킵니다. 돈과 육욕의 덫에 걸려 넘어지는 성도들의 교회 안에 많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런 풍토 속에서 역으로 더욱 큰 소리를 치며 덕을 보고 좋아합니다.

거짓 선생들은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2:18)합니다. 바울은 육체의 정욕들을 갖가지로 열거하였습니다.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

거짓 선생들은 특히 새 신자들을 육체의 길로 유혹합니다. 신앙 생활의 훈련이 아직 미숙한 어린 신자들은 세상에서 가졌던 나쁜 습관들과 사고 방식에 쉽게 다시 이끌릴 수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이런 약점을 노리고 새 신자들을 정로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힘씁니다.

거짓 선생들은 신자들이 진리에서 이탈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자유를 약속해 줍니다(2:19). 자유의 개념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줍니다. 본 서신의 수신자들은 상당수가 노예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유의 귀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들에게 와서 듣기 좋은 말로써 욕망의 충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지금부터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불필요한 죄의식이나 연약한 양심에서 해방되십시오. 예수님을 믿으면서 왜 묶여서 사십니까 여러분은 영원한 구원을 받았는데 왜 굳이 경건한 척하려고 하십니까 허리끈을 풀고 느긋한 마음으로 여유 있게 세상을 즐기면서 사십시오. 죄 노이로제에 결려서 살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의 교훈들에 너무 얽매이지 않아도 됩니다. 십자가에서 다 해결되었으니 이제 육신도 좀 생각해 주면서 사십시오. 자기를 학대하면서 거룩하게 산다고 해서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 것들을 좀 즐겨도 큰 문제가 되지 않으니 자유를 누리십시오.” 하지만 이런 솔깃한 가르침은 참 자유에 대한 왜곡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압니다(요8:36).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진 자유는 신자로 하여금 주님을 따르고 순종케 합니다. 죠지 메티슨(George Matheson:1842-1906. 스코들랜드의 맹인 목사로서 찬송가 작가로 유명함)은, “주님 나를 포로로 삼으소서 그리하면 내가 자유하리이다.”고 읊었습니다.

거짓 선생들 자신이 “멸망의 종들”인데 어찌 자유를 주겠습니까 그들은 악한 욕망의 지배를 받으면서 마귀의 손에 묶여 있는 악독한 종들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누구에게 무슨 자유를 약속한다는 말이겠습니까

거짓 선생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스스로가 참 신자들이라고 공언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버젓이 내세웁니다. 그러면서도 거짓 선생들은 성경을 다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나 교회에 들어오면 신자로 간주해 주고 조금 다닌 사람들에게는 신년 행사 가운데 하나로 직책을 하나씩 안겨 줍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확실히 이해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거짓 목회자들에게는 한 사람이라도 교회에 많이 모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만큼 헌금이 늘고 교회가 커지면 자기 이름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성경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고 회중의 감상적인 심리에 위로가 될 만한 일시적인 격려나 듣기에 부담없는 예화나 기준이 없는 도덕 강좌에 치우칩니다. 그들은 교인수가 불어나는 처방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사용합니다. 그런 방법들이 성경적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인지는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처방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기뻐합니다. 처방의 효과가 나지 않으면 성도들이 열성이 없고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꾸짖습니다. 이런 사이비 목회자들이 죽어가는 죄인들에게 과연 해준 일이 무엇이며 병든 사회에 끼친 영향이 무엇이겠습니까 학위만 높은 가짜 신학자들과 콧대만 높은 부흥 강사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굳게 세우기 위해 한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들은 처음부터 이런 일들에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생각했던 장사치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거짓 선생들은 종종 참 교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2:20)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표피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만 압니다. 그들은 주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구원의 지식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알았다면 그런 사악한 짓들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선생들을 줄곧 ‘저희’ 또는 ‘이 사람들’이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속한 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에도 스스로 주님을 따르는 참 제자들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개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둘씩 파송했을 때, 유다도 끼어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마가는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6:13)고 기록하였습니다. 유다도 분명 예수님을 알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도 하고 기적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러한 거짓 선생들은 이 세상의 부패를 피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다시 썩어질 세상의 더러움에(2:20) 빠진 자들입니다. 20절의 ‘얽매인다’는 말은 어업 용어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그물이 갈릴리 호수에서의 분주한 야간 고기잡이 후에 뒤얽히게 되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마지막 상태는 처음보다 휠씬 더 악화될 것입니다. 이들은 의(義)의 길을 안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도록 탈선을 조장합니다(2:210. 유다는 이 명령을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1:30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두 개의 속담
베드로는 두 개의 속담으로 본 장을 끝맺습니다. 이 속담에 나오는 동물들은 개와 돼지입니다(참조, 잠26:11). 유대인들에게는 이 두 동물이 부정(不淨)한 것이었습니다( 참조, 마7:6). 베드로는 이미 ‘짐승’(야수)들과 ‘나귀’를 언급했었는데 여기서 다시 두 종류의 동물들을 부가시켰습니다.

개와 돼지들에 대한 베드로의 말은 퍽 역겨운 것입니다. 개가 토한 후에 그 냄새를 맡으면서 다시 핥아먹는거나 돼지가 더러운 흙탕물로 도로 돌아가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납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의 행위가 이처럼 추잡하다는 것이 베드로가 말하고자하는 초점입니다.

베드로의 속담은 개와 돼지가 본능적으로 처신한다는 것입니다. 개는 뱃속에 맞지 않는 음식물을 토하고서 시원해 하고 돼지는 몸을 씻고 휠씬 나은 냄새를 풍깁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개는 토한 것을 다시 핥고, 돼지는 진흙에서 다시 뒹굽니다. 개는 개고 돼지는 돼지입니다. 이들은 다른 종류의 동물들로 완전히 바꾸지 않는 한, 항상 개와 돼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렘13:23).
거짓 선생들은 안팎이 씻겨졌다 할지라도 그들의 본성이 온전히 쇄신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모든 죄악이 정결케 되지 않는 한 거짓 선생으로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위험한 것은 이 거짓 선생들이 오히려 참 교인들을 개와 돼지로 만들려고 애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매끈하고 구수하며 그럴듯하게 들리는 거짓 선생들의 메시지를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시이비 목회자들과 가짜 선생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믿음에 굳게 서 있으려면 기도와 말씀의 묵상으로 체워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성경의 바른 교훈들만 듣도록 각별히 조심하면서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성도들과 교제해야 합니다. 참된 성도들과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대화를 주고 받으려면 나 자신이 성경 말씀을 매일 묵상하며 거짓과 진실을 식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말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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