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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비밀을 보이는 일과 행하는 일 (암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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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보여주는 시대도 있고 행하는 시대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보이는 시대라는 것은 성경이 인간에 기록되어 나타나는 선지시대를 말했다면 행하는 시대는 심판기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로 혼선되지 않도록 빠짐없이 보여서 기록하도록 하시고 그대로 행하는 것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보여지는 때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며 행하는 때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1. 보여주는 때 (7 상)

하나님은 보여주는 때라는 것은 일을 어떻게 앞으로 행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시는 일이다. 다시말하면 여호와의 책이 인간에 나타날 때부터가 선지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눅24:44절에 모세 율법과 선지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것이 이것이다 하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서 성경을 깨닫게 한 것이다. 다시말하면 모세때부터 나타난 글은 역사적으로 될 것이다. 묵시를 보이는 일이나 모든 기록한 것을 보여준 시대의 역사라고 보게 된다(사46:10).
세상에 많은 종교라는 간판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있지만 앞으로 행할 일을 전부 빠짐없이 보여주고 행한 일은 기독교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언을 친히 행하는 일도 보여주었고 묵시로도 몸으로도 보여주었고 영감으로 나타나는 말씀으로도 보여준 것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유형적인 무엇을 본다는 것보다도 똑똑한 말씀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라고 한 것은 똑똑히 보라는 것이 포함된다(사34:16). 만일 똑똑히 보여준 일이 없이 된다고 믿는 것은 미신에 불과한 신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율법과 선지는 요한의 때까지요 다음에는 사람마다 천국을 침노한다고 한 것이다(마11:12).

2. 행하는 시대 (7하)

메시야를 통하여 행하는 것은 사람이 행할 의무는 없다. 하나님이 오셨으니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을 어떻게 해서 구원하겠다는 말씀은 선지로부터 보여진 것이니 행할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잉태할 때부터가 하나님은 행하는 단계에 들어오는 시대다. 천사는 요셉에게 이르기를 이사야에게 보여진 예언이 네 집에 응한다는 말을 가지고 요셉에게 오해를 다 풀도록끔 가르쳤던 것이다(마1:22-23).
만일 성서적인 증거가 없었던들 요셉은 용기를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는 영자적인 율법의 의식적 종교에서 앞으로 될 일을 보여주는 시대에서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소망하면서 활동한 시대를 선지시대라 하는 것이다. 이루어질 일을 사람이 깨닫지 못하나 천사가 깨닫게 해주면서 행하는 것이 신약 시대에 되어진 일이다. 그리스도가 잉태할 때는 천사가 지시했다(눅2:15).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 완전히 세상에 나타날 때도 하나님이 직접으로 증거했다(마3:17). 십자가에 못박힐때도 하나님이 증거한 것이다(마27:51-54). 부활때도 천사가 증거했다(마28:12:15). 승천할 때도 천사가 증거했다(행1:10).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와서 선지에게 보여준 예언대로 행하는 일을 인간이 믿지 못하므로 믿도록끔 역사한 것은 신약 시대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이날까지 세계 만방에 전파된 복음은 예언이 이루어진 사실을 증거로 확실히 나타났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기 위하여 성경은 역사한 것 뿐이다. 이것은 은혜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3. 심판주로 오실 때 행하는 일 (눅21:28)

오실때가 된 징조를 깨닫도록 하는 일이 있다. 말세 증인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일을 성경을 들어서 똑똑히 시대를 가르치는 것이 있는 동시에 직접 증인에게 권세를 주어서 예언대로 행하는 증인을 통하여 나타난다. 이것이 주님 올 때까지의 역사라 하는 것이다. 그때 증거자는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또는 거짓선지자에게 미혹을 받지 않도록 깨우쳐 주는 증거도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심판이 올터이니 너희들이 미혹 받으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때를 예언 성취의 시대라 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은혜시대에는 그리스도께서 예언대로 행하신 일을 만방에 알리는 시대요 말세 증인 시대는 증인이 직접 권세로 예언대로 일을 행하면서 깨우치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다시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선지자들에게 보여준 일이 말세 증인을 통하여 깨우쳐주는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때는 예언을 가해도 감해도 죽는 재앙이 오는 때이다. 왜냐하면 예언대로 재앙을 나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종 선지자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것으로서 세상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

결 론

성경은 될 일을 보여준 시대를 선지시대라고 하고 선지의 말씀대로 메시야가 와서 행한 것을 만방에 알려주는 때가 은혜시대라 하고 증인에게 권세를 주어서 예언대로 행하시면서 역사하다가 심판주를 맞이하는 것을 예언 성취되는 환란 재앙의 시대라 하는 것이다. 예언이 이루어지므로서 시대는 새시대가 온다.

의합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암 3:1-15)

서론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신이시요 영원 존재 자이시요 무소불능의 신이시며 진실 무위하신 아버지 하나님으로서 홀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요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되 어떤 인간의 지식이나 권리나 또는 영광을 따르는 자를 원치 않으시고 지식도 권리도 아무런 영광도 없는 농촌에 농부의 한 사람으로 뽕나무를 재배하고 있던 아모스를 불러서 경고의 나팔을 불게 할 때 하나님은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하시면서 가장 가난하고 약한 사람이지만 아모스를 불러 썼던 것이다. 금일에 지구상의 많은 사람이 왕래하고 있지만 이 시대에 의합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의합된 사람을 찾으시기 위하여 어떻게 역사하느냐는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다.

1. 의합되기까지 징벌하심 (1-2)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선지 국가를 이루셨지만 순종치 않을 적에 용서없이 징벌을 하였다. 이것은 사명을 맡겼기 때문이다. 사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왕국 건설을 위하여 싸우라는 것인데 마귀와 타협이 있다면 하나님은 왕국 건설을 방해하는 일이므로 아무리 사명을 맡은 자라도 원수로 알고, 행한대로 갚으시되 악한 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대 사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일국의 한 정당도 자기의 당원이 그 정당의 하는 일을 방해하는 당원은 제명 처분을 하거든 조물주 하나님께서 대 자연을 창조하시고 창조의 목적인 왕국을 위하여 사명을 맡긴 이스라엘이 사마리아가 될 적에 하나님은 무서운 지진의 불로 징벌했던 것이다. 사명을 맡지 않은 자가 잘못이 있는 것은 사업에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러나 사업의 사명을 맡은 자가 잘못할 때는 사업에 큰 방해를 하는 자이므로 하나님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의합된 자에게 비밀을 알려 주심 (3-7)

하나님께서 언제나 당신에게 의합된 사람에게 자기의 비밀을 알려 주시고 일을 진행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많은 선지가 있고 종들이 있지만 의합된 자가 없으므로 뽕나무를 재배하던 아모스를 찾아 비밀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비밀을 한 사람에게 알려준 다음에 그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용서없이 심판을 나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합된 자에게만 하나님은 나타나기 때문이다.
노아에게 방주의 비밀을 알려주고 그 법에 의하여 판단을 나렸고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알린 후에 그 법에 의하여 판단을 나렸고 모세에게 율법과 계명을 준 후에 그 법에 의하여 판단을 나렸고 사도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서 십자가의 비밀을 알려준 다음에 그 법에 의하여 이날까지 판단을 나렸고 말세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지는 비밀을 바로 전하는 종에게 권세를 맡겨 세계를 통치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에게 알려준 묵시의 비밀은 그 때에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계10:7, 11:15과 같이 되는 날에 끝을 맺는 것이다. 의합한 자들에게 보여준 묵시는 심판기에 남은 종이 될 변화 성도가 다시 예언하는 역사가 있는 동시에 그들을 통하여 지상 왕국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3.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찾으시는 것이다 (11-12)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악한 정치가 종교를 탄압하는 멸망의 도성이라도 그 안에 택한 사람을 찾되 양을 찾는 목자가 사자에게 먹힘을 당하다 남은 두 다리나 귀 조각을 버려두지 않고 가져 오는 것 같이 당신의 백성을 그 도성의 어느 침상 모퉁이에 있다 하여도 찾아 낸다는 것이다. 지금 아무리 공산 정권 아래 신앙 자유가 없다 하여도 그 속에서도 택한 백성을 반드시 찾아 내고야 심판을 나리실 것이다. 아모스가 사마리아를 찾아가서 생명을 바치고 나가서 외치듯이 지금도 어느 종이나 의합된 종이라면 강하게 들어 쓰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4. 경고가 있은 후에 보응을 내리심 (13-15)

아무리 인간이 볼 때는 어리석은 자 같으나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그 입을 통하여 친히 말씀하시고 듣지 않을 때에 용서없는 보응의 심판을 나려 멸망을 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택한 종의 말씀 권세라는 것이다. 가장 권세 있는 자는 하나님께 의합된 자로써 시대적인 비밀을 받아 말하는 종이라고 볼 수 있다.

결 론

가장 복되고도 귀한 사람은 하나님께 의합된 자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받은 자라고 볼 수 있다. 무소 불능하신 하나님께서 지렁이 같은 인간에게 의합을 하자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과 의합하기를 싫어하고 또는 의합된 사람을 멸시하고 그의 전하는 말을 순종치 않는다는 것은 멸망의 자식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살 길은 하나님과 의합된 사람이 전하는 말을 겸손히 순종하는 것 밖에는 없다.

여호와 뜻을 돌이키고 못 돌이킬 일
(암 7:1-9)

서론

우리는 다같이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다같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뜻을 여호와께서 돌이킬 일도 있고 돌이키지 못할 일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 이것을 분명히 모른다면 완전한 신앙의 지식을 가진 자는 못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으로 신앙의 완전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 주는 일과 돌이키지 않는데서 완전이 있는 것이다.

1.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킬 일 (1-6)
1) 시련중에서도 뜻을 돌이킴
하나님은 재앙을 오게도 하시고 재앙을 물리치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재앙을 무서워 할 것보다도 뜻을 돌이키지 않는 것을 무서워 해야 할 것이다. 아모스 선지가 묵시를 볼 때 풀을 벤 그루터기에서 풀이 돋기 시작할 때 주께서 황충같은 악의 세력으로 그 역사를 대항시키는 광경을 보여준 것이다. 순과 같은 역사가 일어날 때 황충 같은 악의 세력으로 그 역사를 대항시키는 광경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황충 같은 악의 세력을 들어서 하나님의 종을 시련시키는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청컨대 여호와여 용서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찌하오리까 하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시련이 닥쳐올 때 자기 죄를 깨닫는 심정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2) 낙심하지 않고 그 원수를 대항해 싸워볼려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
만일 어떤 종이 시련이 닥쳐올 때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어도 안될 것이다. 원수가 무서워서 대항하지 않고 쫓겨가는 정도에 있어도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서리이까 하는 심정을 가질 때 하나님은 원수를 대항해서 넘어지지 않고 설때까지 뜻을 돌이켜 그 악한 세력을 물리쳐 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일을 당하게 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서 물리칠 수 있는 것을 아는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아시나 인간으로 자기 부족을 더 깨닫기 위한 것과 또는 자기 미약을 깨닫게 하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려운 난관이 닥쳐올 때 자기의 부족과 미약을 깨닫고 돌아오면 얼마든지 뜻을 돌이킨다는 것이다.
3) 큰 징벌에서도 뜻을 돌이킴
종말의 징벌이라는 것은 인명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고 바다나 육지를 다 삼키는 징벌이다. 이 세계가 불에 살라지는 것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어서 이것도 자기의 미약을 깨닫고 어떻게 하든지 바로 서 보려는 심령을 가진 자는 뜻을 돌이켜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리 징벌을 나려도 겸손한 사람이라면 그 환란에서 건져내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심판 날에 죽을 죄는 교만과 사치다. 바벨론이 망한 것은 자기를 영화롭게 할려는 죄와 사치한 부요로 인하여 망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징벌이 나릴 때 더 사랑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은혜시대에는 오히려 당신의 종을 멸망의 자식보다도 더 시련을 당하도록 한 일도 있으나 세계 전멸의 징벌이 올 때 자기의 미약을 깨닫고, 여호와를 바라보는 자는 절대로 불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사40:10-11).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미약을 아시고 미약한 사람이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다. 여호와의 하나님께 부탁하는 간곡한 심령이 있다면 절대 책임을 져 주신다는 것이다.

2. 뜻을 돌이키지 못할 일 (7-9)

주님께서 곧게 줄을 치고 쌓은 담을 보여 잡고 섰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다림줄을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거든 다시 용서치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이삭의 산당이라도 황폐되고 이스라엘의 성소라도 훼파된다는 것을 말했다. 이것은 다림줄이라는 심판의 경고이니 심판의 경고를 하여도 받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인 이삭이나 야곱의 집도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육적 이스라엘도 아모스 선지의 경고를 듣고 회개치 아니할 때 멸망하였거든 영적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교회가 말세의 경고를 등한히 여긴다면 사랑하는 교회라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대로 재앙을 나리는 것이니 재앙의 날에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말씀을 순종치 않을 때 책임을 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속는 자는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면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니 결코 재앙을 받지 아니하리라 생각하면서 짐짓 태만한 자다(사28:15).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언약을 순종하는 것 보다도 자기의 수단 방법을 쓰면서 문제 없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이스라엘 말기에 무서운 지진이 나는 2년 앞에 농촌에 뽕나무를 재배하던 아모스에게 묵시가 임하고 또 외친 것은 말세에 무서운 환란이 지진같이 세계를 불태우는 전쟁으로 될 때 나가서 외쳐야 할 심판의 경고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아모스 선지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을 책망하며 네가 이 경고를 순종치 아니하면 너는 반드시 네 집의 자녀까지 전멸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을 듣고도 순종치 아니할 때 이스라엘은 망하고 만 것이다.

알곡을 모으는 주님의 심정
(암 9:7-15)

서론

알곡을 모으는 일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예를든다면 농부를 비할 때 씨를 뿌리는 농부의 심정과 비료를 주고 가꾸는 농부의 심정과 타작기를 들이대고 알곡을 모으는 농부의 심정으로 비교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타작기를 쓰는 농부의 심정은 어떠한 심정이냐 하는 것을 알곡을 모으는 주님의 심정과 비교할 수 있다.

1. 용서가 없는 것이다(7-8)

알곡을 모을 때는 온유한 심정이 아니고 강하고 강한 대책을 세우는 심정이다. 그러므로 쭉정이와 가라지 되는 인종은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땅으로 들어가도 죽을 것이요 하늘로 올라가도 죽을 것이고 산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또는 바다밑에 숨을지라도 용서없이 다 죽이겠다는 것이다(9:1-4). 만일 알곡을 사랑하는 심정이라면 쭉정이와 가라지를 아낀다는 것은 합당치 못할 것이다. 여름에는 짚이나 혹은 쭉정이 될 것도 가꾸는 심정이 있으나 알곡을 모으는 때는 한 알갱이도 남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세 진리를 대적하는 자는 피난처가 없다는 것이다. 인공 위성을 타고 별세계를 가도 죽을 것은 사실이다.

2. 알곡을 아끼는 심정

추수기는 알곡을 모으자는 것이 목적이니 어디 있든지 하나도 떨어지지 않도록 찾아내겠다는 것이다(암3:12). 그러므로 알곡된 백성이라면 어느 이단적인 교파 안에 있다해도 혹은 무신론 사상에 눌림을 당하고 있다해도 찾기 위해서는 주의 종을 타작기 같이 쓰겠다는 것이다. 원수의 나라를 들어가서라도 주의 백성을 찾기 위하여 타작기 같이 강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말세증인이 재앙으로 땅을 치는 것은 알곡을 찾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동방역사에 쓰여지는 종이 대적을 짓밟고 나간다는 것도 그 목적이 주의 백성을 찾기 위한 것이다. 다시말하면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을 누가 도둑해서 숨긴 것을 아는 동시에는 그 아들을 찾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찾을 것은 사실이다. 하물며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적군의 포로나 옥중에 갇혀있다면 이것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북진통일을 시키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이다(12).

3. 남은 자에게 마음껏 복을 주고 싶어하는 심정 (13-15)

하나님은 새시대에 들어갈 백성을 위해서 심지어 기후까지도 고르게 해준다는 것이다. 무엇이고 피해를 줄 자는 도저히 없도록 해주는 축복이다. 에덴동산에서는 간교한 뱀을 쓴 일이 있으나 이 세계에는 에덴 동산에 비할 수 없는 큰 축복이 올 것을 말씀하셨다. 너무 포도즙이 많아서 산을 녹이리만큼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그때는 일기가 농사 기후에 적합한 기후이므로 씨뿌리는 자가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어서 심어도 만족한 생산을 얻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물질계의 축복으로 극도로 만족하도록 축복할 것이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이 심판기에 어떠한 심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모른다면 어리석은 아이가 부모의 심정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덮어놓고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는 것도 어린아이의 심정이요 덮어놓고 남을 두려워함도 어린아이의 심정이다. 우리는 어떤자에게 어떻게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 때 알곡을 모으는 그날에 주 앞에 설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알곡으로 이루어지는 다윗 왕국
(암 9:8-15)

서론

하나님께서 다윗 왕국을 이루어 놓으시고 그 왕국에서 모든 선지를 통하여 인간 종말에 대한 경고를 하실 적에 다윗 왕국의 부패를 책망하는 동시에 그 경고가 심판의 다림줄이 되었고 부패한 다윗 왕국을 없이 하고 다시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역사를 들어서 심판과 새시대를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농촌에서 뽕나무를 재배하던 아모스를 들어서 부패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말할 때에 오늘 본문에는 천하 만국을 벌하는 날에 알곡을 모아서 다윗의 왕국이 다시 이루어질 것을 말한 것은 심판과 새시대를 가르친 것이다. 이제 알곡을 모아서 다윗 왕국이 완전히 이루어지는데는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1. 범죄한 나라를 지면에서 멸함 (8)

하나님께서 천하에 복음을 전한 것은 목적이 죄를 없이 하자는 것인데 첫째는 사람의 몸에서 죄를 없이하고 다음에는 교회 안에서 죄를 없이 하고 다음에는 지면에서 죄를 없이 하는 것을 심판이라는 것이다. 아모스가 받은 묵시는 용서없는 심판의 경고가 된다.
아무리 야곱이요 이스라엘이라 하여도 알곡이 못되고 부패한 자는 범죄한 나라를 없이할 때에 함께 망한다는 것이 심판의 다림줄이란 것이다(암7:7-9).
이제 심판기에 범죄한 나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범죄라는 것은 개인적인 범죄도 있고 정치적인 범죄도 있으니 심판기에 범죄한 나라라는 것은 정치적인 범죄를 말한 것이다. 과거에 이방적인 정치가 범죄한 일이 많이 있지만 지금 공산 정치 같은 범죄는 인류 역사상 없던 일이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볼 때 소위 민주 국가라 하는 정치하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대적한다는 것은 배도적인 행동이라고 본다. 있던 교회를 없애는 정치는 적 그리스도의 정치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 사람이 어떤 이방 종교를 숭배했다는 것 보다도 더 큰 범죄가 되며 또는 이러한 사상을 가진 정치를 용납한다는 것은 음녀적인 범죄가 되므로 심판의 대상자는 하나님을 훼방하는 붉은 짐승과 그 앞에 절하는 음녀적인 바벨론이라는 것을 계14장 이하에 분명히 가르쳤다. 이날까지는 알지 못하는 민족에게 깨닫도록 하는 역사를 해 온 것이다(행17:30-31). 과거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 행한 일은 용서가 있어도 알고 짐짓 진리를 대적한 범죄는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할 수 없는 정책 앞에 머리를 숙이는 자는 아무리 야곱이라도 다같이 망한다는 것이다.

2.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함 (9)

지금은 심판기가 아니므로 알곡되는 성도들이 다 숨어 있지만 심판기에는 알곡은 알곡끼리 모이도록 곡식을 체질함 같이 까불어서 알곡되는 자들이 누구인지 다 들어나게 하여 그들을 통하여 다윗의 나라를 영원히 이룬다는 것이다. 가장 복 있는 자는 마음에 진리가 충만하여 남은 자라고 보게 된다. 이제 알갱이가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마음이 견고한 자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자이다.
셋째는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끝까지 참는 자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조금도 형식이 있을 수 없다. 신앙은 도덕과 의식을 초월한 신앙 양심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고 그 말씀을 떠는 마음으로 존중히 알고 자기의 맡은 사명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자 외에는 환란에서 남은 자가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고 말씀을 그대로 믿고 충성을 다 할려고 하는 자라면 하나님은 책임을 지고 하나도 잃지 않도록 역사해서 남은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3. 남은 자로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함 (11-12)

하나님께서 다윗 왕국을 세울 적에 목적이 세계 통일의 승리를 이루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윗 왕에게 하나님은 역사할 때에 아무리 이방이 강하지만 다윗 왕으로 승리케 하시면서 세상 끝에도 네 왕국이 승리한다고 한 것은 성도의 나라를 가르친 것이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니 구약 시대에 성도가 되는 선지들에게 묵시가 나타날 적에 필연코 승리는 다윗 왕국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니 어느 나라든지 남은 자는 다 세계 통일의 다윗 왕국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을 새시대라 하는 것이다.

4. 사시 장춘의 나라이다 (13-15)

지금은 기후 변천이 많으므로 극히 한서가 심하여 사람이 괴로움을 느끼지만 성도의 나라가 되는 다윗 왕국은 밭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리라고 한 것은 극도로 기후가 변천되어 자유로운 수확이 있을 것을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극도로 평화롭게 사는 나라를 이루어 주실 것을 다윗 왕국이라고 한 것이다.

결 론

가장 복되고도 평화로운 나라는 성도가 통치하는 나라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 충만해지고 정복하고 다스리면서 사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뜻이다. 아무리 죄의 세력이 강하지만 죄를 진 나라는 전멸시키고 알곡이 되는 성도로 말미암아 다윗 왕국이 이루게 될 것을 목적하고 묵시를 보인 것이 아모스서 라는 것이다.

우리의 살 길

성경 본문:암 5:4-6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강한 욕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생의 욕구일 것이다. 이와반대로 사람이 가장 두려워 하는것
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죽음일 것이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악착스러운
것이 인간이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아람왕 벤하닷이 사마리아성을 포
위했을 때 그 안에서 굶어 죽게된 여인들이 자기의 아들들을 돌아가면
서 삶아 먹었다고 하는 기사는 믿어 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다.
이것은 곧 인간의 생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열한 것인가를 잘 나타
내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애굽에 있는 20세기의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피라밋의 유래를 생각
해 보아도 인간의 생의 욕구가 얼마나 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즉
피라밋이란 아무 뜻없이 이루어진 예술품이 아니라 왕의 시체를 영원히
보존하고자 하는 뜻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무덤인 것이다.
인류는 이렇게 다각적인 면에서 참살길을 찾아왔고 또 지금도 찾아 헤
메고 있다.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그러면 이
러한 생의 욕구가 과연 우리들의 참살길이 돼주었는가 하면 결코 그렇
지 못하였다. 오히려 우리를 무서운 공포속으로 몰아넣는 요인이 되었
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참살길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모든 문
제의 해결의 원전이 되는 성경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첫째, "너희가 나를 찾으라 그리히면 살리라" (암5:4).
예수날 번역에는 '반드시'라는 말이 있었다. 즉 너희가 나를 찾으라그
리하면 반드시 살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
님의 말씀. 이는 근대사속에서 미국의 건국사를 한번 살펴 보아도 잘알
수 있다. 성경에는 이를 뒷받침 해줄만한 말씀이 많다.
시 34:10 에 보면, "여호와를 찾는자는, 모든 좋은 것이 부족함이 없
으리로다"라고 했고 또 시 144:15에는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이 민족사에 있어서 참으
로 축복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불신범죄로 말미암아 몰락의 낭떠러지로 달려가
는 것을 보고 이말을 크게 외쳤던 것이다. 4,6양절에 거듭된 것은 강조
의 뜻이 아닌가 한다.

5절에 벧엘을 찾지 말며 브엘세바로 나가지 말라고 한 말은, 너희가어
디로 가서 무엇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하나님)를 찾는 것
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뜻인줄 안다.
그렇다. 우리의 살길은 어디를 가고 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찾는데 있다는 진리
이는 마치 고기가 물을 찾아야 살고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을 찾아야
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은, 인간의 원형
인 하나님을 찾는것만이 우리의 참살길이 되는 것이다.

둘째, "주 안에 굳게 선즉 살리라" (살전3:8) 여기에 '주안에'란 말과
'굳게 선다'는 말은 둘다 중요한 단어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두말
을 아주 즐겨썼다. 그는 그의 서신속에서 '주안에'란 말을 무려 80회나
썼다. '주안에서'란 말과 '주밖에서'란 말은 불과 한글자 차이지만 전
혀 다른 운명을 결정하게 한다. 방주 '안에' 들어가 자 여덟식구만이구
원을 받았고 (창7:13) 양의 피가 묻은 문설주 '안에' 있는 자만이 구원
을 얻었고 (출12:22,23) 도피성 '안에' 있는 자만이 살았다 (수20:1-9)
아버지 품밖으로 나간 아들은 불행했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아들은
행복했다.

밖은 불행한 곳이다. (마8:12,22:13,25:30)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이
유라로라도 주안을 떠날 수는 없다.
그리고 '굳게선다'고 하는것이 중요하다. 흔들흔들 하는 믿음가지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영광을 드러낼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동시에
이 말을 즐겨썼다.
"주안에 굳게 서라" (빌4:1) "깨여 믿음에 굳게서라." (고전16:13) "
그 안에 뿌리를 박고 믿음에 굳게 서라"(골2:7) 우리는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굳게서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눅10:28) 어느날 어느 교법사
가 예수님에게 와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
고 물었다. 이때에 예수님은 도리어 반문을 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
록되어 있으며 어떻게 읽었느냐라고 그 교법사는 자기가 읽고 배운대
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
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고
말했다.

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예수님은 그의 유창한 말이 끝나자 "이를행
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말씀했다.
이 교법사사는 무슨 굉장한 것이라고 가르쳐 줄 것으로 잔뜩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네가 알고 네가 배운 것을 '행하라' 는
말씀뿐이었다.
제아무리 굉장한 교훈과 진리를 깨우쳤다. 하더라도 행하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는것.
신28장에 기록된 축복받는 비결에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지켜 행하면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것"이라
고 했다.

또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경책했다. (약2:
26). 우리는 이상으로 우리의 참살길이 무엇이냐 하는것을 성서를 통해
살펴보았다.
오늘 주신 말씀을 믿음안에서 굳게 행하면 참살길을 얻을 것이요,그렇
지 아니하면 비뚤어진 생의 욕구가 자신을 파멸의 나락으로 이끈다는사
실을 성도는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면

성경 본문:암 8:11-14

구약의 선지자 '아모스'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있었던 때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역대 어느 왕보다
정치를 잘했고, 무엇보다도 경제를 발전시켜 국력을 신장시킨 훌륭한 왕
입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그를 솔로몬 이후 최고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발전했지만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빈부의 격
차가 너무 심했습니다. 나라의 부가 극소수의 권력과 부유층에 사람들
소유였지, 일반서민들은 오히려 살아가기가 더욱 어려웠고, 극빈자들의
생활은 비참하기가 이루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에 정치를 지도하는 사람들은, 불의한 생활들을 했고, 그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한 일들을 거침없이 자행했습니다. 또 부유층의 사람들
은 극도의 사치와 향락에 빠졌을 뿐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몰인정하게
대함으로, 부자들의 포학이 극심하였습니다. 또한 그 당시의 종교인들
은 타락과 부패에 빠져있었으며, 이러한 사회상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
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은 밑바닥을 살아가는 가난한 서민층에게는 참으
로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일이며, 어디를 가든, 그 누구를 바라보든, 아
무런 기대와 소망이 없었던 일이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경제가 융성하고 나라가 강대해진다고 해도 그 힘과 그 풍성한
결과는 다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국민이 잘 살게 되야합니다. 그런
데 겉으로는 잘 살고, 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저 밑바닥, 인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담한 일들이 너무나 많
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국민 대다수는 불만에 쌓여 있었고, 포학
과 부정과 타락상을 목격하면서 심한 번민과 갈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
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
하시려는 하나님의 뜨거우신 사랑이 선지자를 그들 앞에 보내시게 되었
고, 아모스는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묵시와 말씀을 용감하게 위정자
와 백성들 앞에 선포하게 되였습니다. 그 때는 과연 '양식이나 물이 없
어' 기갈을 당했던 때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들을
수 없어서 기갈을 당한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탐욕과 타락과 향락
에 깊이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따르지도 아니했습니다.
먹을 것은 풍성하나, 진리의 말씀은 기근을 당했습니다. 풍요로운 물질
들은 있었으나, 영적인 만족은 없었습니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져 있
어, 무엇이던지 다 할 수 있었으나, 영적 시각은 캄캄하게 어두웠습니
다. 그래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그것을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사람들에게 올바른 판단력을 주며, 또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도 없고, 또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말씀이 없음으로 당한 국가적인 위기였습니다.
저는 요즈음 신문에 보도되는 일련의 큰 사건들을 보면서 지금 우리나
라는 아모스 때외 비슷하다 하고 생각되였습니다. 일부 재벌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돈만 많이 벌겠다는 지나친 탐욕은 사회와 국
민에 대한 포악입니다. 또 일부 정치인들이 뇌물같은 것을 수수하는 것
은 국가에 대한 범죄입니다. 또한 오늘날 종교인들이 이와 같은 불의한
처사들을 보면서 말하지 아니하고, 그런 일을 큰 문제로 보지 아니하는
태도도 무책임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언자적 양심과 열정을 가지고
이러한 사회적 비리와 부정을, '문제로 의식해야 하고', 기도하고, 또한
겸손히 충고하고 규탄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아모스선지는 그 당시에 그 일이 예언자로 부름받은 자기의 사명이라
고 깨닫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부르짖는 예언자가 됐습니다. 그는
원래 드고아라는 벽촌에 살며, 양을 기르며 뽕나무를 재배하는 순박한
농부였습니다. 이 이름없는 순진한 농부가 자기의 농산물을 팔기 위하
여 여기저기 큰 도회지를 두루 다니며 도시 사람들의 생활을 볼 때, 그
는 충격과 울분과 반발과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오로지 돈을 버는 데
혈안이된 장삿군들이 저울과 됫박을 속이며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있었
으며 관리들은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고 있었
고, 이런 것들을 뻔히 보면서 오히려 묵인하고 두둔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극도의 향락과 과소비로 계층간에 위화감을 갖게하
는 부유층의 여성들, 그러한 부패와 타락상를 보면서 아모스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목표를 찾게 됐습니다.
그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여호와를 찾으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습니다.(암 5:6) 그리고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
의를 하수같이 흘릴띠로다.'(암 5:24)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오늘과 같
은 새대의 하나님의 교회가 해야 할 사명중에 하나가 바로 이 메시지가
아닐까 하고 느끼게 됩니다. 물론 아모스새대와는 달리, 이 시대는 메
스컴들이 이런 사명은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런 것을 문제
로 '의식하는' 그 의식을 가지고 바른 길을 찾기 위해 생각하며,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뜨거운 기도가 무엇보다도 먼저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개인뿐만 아니라, 정부나 국가가 잘못하는 죄, 그리고 사회 전
체가 저지르는 사회적인 부정과 불의를 예민하게 의식하고, 거기에 대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
지 않으면 나 자신이 아무리 깨끗아다고 해도, 우리도 별수 없이 사회악
에 물이 들거나 희생을 당하는 존재밖에 될게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이 '도덕적 위기', 이 겉잡을 수
없고, 개인이 감히 손을 댈 수도 없는 엄청난 부정과 범죄를 어떻게 극
복해 나갈 수 있습니까 정부는 정부대로, 법은 법대로, 위정자는 위정
자대로 같은 고민을 가지고 애를 쓰고 있지만, 그러면 여러분 이런 때
교회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러
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그 말씀을 따르는 일을 해야만 하겠습
니다. 아모스도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
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살 길이 거기 있습니다. 우
리의 살 길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베델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 나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
겠고, 베델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5:4-) 물질을 우상시하여, 그것
때문에 자기의 인격과 신임과 양심을 팔아먹는 일, 한도 없는 탐욕때문
에 국민과 국가를 저버리고 간교한 수단으로 제 욕심만을 채우려는 일,
그것은 정녕 사로 잡히겠고, 그것은 모두 허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
니가 '너희는 살기 위해서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5:14)고 했
고 '너희는 악을 미워하며 선을 사랑하고 성문에서 공의를 베풀라.'
(5:15)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우
리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는, 가시적으로 나타난 부정과 비리와 범죄가
아닙니다. 더 중효한 것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 않는데 있고, 그 말
씀을 따르지 아니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외치는 자가 많고,
온갖 전달 매개체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들려져도, 이것을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수십만개 처의 교회가 있고, '1,200만'신자가 있고,
수천만권의 성경이 팔리고, 훌륭하고 타당한 설교가 전해져도, 여러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따르지 아니하면' 그것은 말씀 풍년중
에 말씀의 기갈입니다. 따르지 않으면 결국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 왜
사람들은 말씀을 따르지 아니할까요
첫째는 듣지를 않아서 그렇습니다. 아이의 듣지 않는 것은, 길바닥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밭이 아스팔트 바닥같이 굳을 때
로 굳어져 있는 한 싹도 트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사욕의
스승이 있어, 주관이 있고, 고집이 있고 나름대로의 삶의 철학이 좍 자
리잡고 있으면, 말씀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 사욕의 스승입니다. 그래서 바른 교훈을 듣지 않고 언제나 자기
욕심에 더 기울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딤후 4:3) 그러나 사욕의 스승
이 시키는 대로 가게 되면, 필경은 멸망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건성으로 읽지 말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의
문을 열고 자세히 보시면, 이 성경에는 우리 사람의 구체적인 세부사항
들의 지침까지 다 상세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가령 '뇌물'을 받지말
라 하는 말씀도(출23:8), 신 16:19, 삼상 8:3, 12:3, 전 7:7, 사 1:23,
미 7:3, 암 8:)적어도 8번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
니라.'(출 23:8)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건만, 당장 자기 수중에 들어오는
돈이, 자기 눈을 멀게 하고, 자기 말을 굽게 하는, 그것보다 더 귀한 것
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지요. 가치관을 전도시키고 판단을 흐리게 만들
어 버립니다. 그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욕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뇌물이야 인간사회에 어디나 있는 '관행'이라고 자기 나름대
로, 자기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마는 것입니다. 공무원의 의식조사에서
뇌물을 죄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한것이 63%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
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도외시하고 듣지 않았다는 이야
기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는 건성으로 들
으면 않됩니다. '삼가 들어야' 합니다. '삼가 듣지 않으면'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정말 살 길은 또 우리가 당장 눈앞에 돈 몇푼보다 더 복되고,
가치있고, 유익한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는 데 있습니
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
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리라.'(심
28:1-)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들으십시다. 그리고
사욕의 스승은 쫓아내여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참으로 사는 길입
니다.
둘째는 듣기는 듣는데, 선뜻 하나님의 말씀에 동감하고 동의하지 않아
서 우리는 그 말씀대로 따르지 못합니다. 거기에 우리 인간들의 어려움
이 있고 또한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알지만, [아는 것
은 아는거고], 그러나 동의는 못하겠다.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천사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
느냐' 그럴 것입니다. 사실 현실을 보면,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말씀
이라도 동의하게 되지 않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인간이 땅에 살고, 혈
육을 가졌고, 죄악속에 사는 데 그래서 적당히 타협도 해야 하고, 피치
못할 입장과 사정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알기는 제가 압니
다. 그러나 이번만 봐주십시요. 이것만은 이해해 주십시요!' 그럴 때
가 왜 없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으 약한 것을 아시고, 이해하시고
동정하시고 용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탁식하시면서 '너희가 맘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
님께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용기있게 따라
가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라!' '그래야 진정 너희에게
유익이라!'라고 타이르시고 가르치십니다. '결국 무엇이 유익인지 너희
는 알아야 한다. 크게 너희의 신앙이고 결단이며 구원과 축복의 길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실이 그렇다고 하는 것을, 왜 내가 모르
겠느냐 그러나 너희들이 신자라면, 내 백성이라면, 내 자녀들이라면,
나는 너희가 '내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그것을 나는 알고 싶
은 것이다.'(신 8:3)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렵니가 우리가 하나님의 동정만 자꾸 받
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쁘고 만족하게 해드리시겠습
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결단으로 각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다
만 한가지 제가 말 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믿음
이 있는 자요, 축복과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자란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
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사모하시고 사랑하시며 거기에 내 생각을
같이 하시고, 전적으로 그러하다고 동의하십시요. '하나님의 약속은 얼
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셋째는 그러면 우리가 말씀에 아-멘하고, 동의까지는 했는데, 하나님
의 말씀을 우리의 구체적인 생활속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적용해야 될까
그게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다
양하며, 오늘의 사회는 너무나 조직적이고 복잡하기 때문데 사실상 쉽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는 하지만, 이것을 체계화해서
교리적으로 다시 배우지 아니하면 실제적인 적용과 실천이 막연하게 됩
니다. 그개서 우리는 더 배워야 됩니다. 정말 우리들의 복잡하고 다양
한 생활 전선에서 어떻게 사는가 무엇을 결단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말씀대로 한 것인다 누가 그것을 일일히 알려주고 판단해 주겠습
니까 쉬운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라고 못하게 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귀에게 송두리채 빼앗겨 버리게 된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음식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내가 그것을 먹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말
씀도 실천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됩니다. 적용은 하나님의
보배로우신 말씀을, 내 소유로 만드는 가장 중효한 작업입니다. 말씀을
적용할 수 있을 때 그 사말은 온전히 말씀대로 따른 사람입니다. 이것
을 매일 매시 매순간 계속하는 것이요, 생활화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가능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그 분은 성령이십
니다. 그 분의 지도와 도우심을 받을 때에 이 모든 일은 다 가능합니
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
다.'(요 14:26)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생활을 인도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됩니다. 성령릎 도
우심을 구하십시다. 그 분을 의지합시다. 그때 그때마다 성령이 인도
해 주시고, 알게 하시고, 결정하게 하시고, 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도
주십니다. 우리가 매일 고달픈 인생의 순례를 기쁘게 감당할 수 있는
까닭은 구짐의 영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일은 성령의 인도로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면, 그 영혼에는 언제나 만족이
없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아무리 많아도 영적만족이 없습니다.
그 영혼은 언제나 주리고 목마릅니다. 또 우리가 말씀의 기준대로 순종
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성결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기준, 철학, 처세
가 아무리 그럴 듯해도, 그런 것으로 도덕이 성경해지지 않습니다. 그리
고 우리가 아무리 지혜와 명철이 있고, 인생의 경험이 풍부하다고 해도,
말씀에 의지하지 않으면, '영적인 시야'가 열리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
만이, 영적시각을 뜨게하여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일은 이렇게 허망하고 비참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따르는 일은 복되고 유익하고 아름답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세상은 금방이라도 천국으로 화하
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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