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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마움의 생활화 (신 26:1-11, 눅 17:11-19)

첨부 1


우리나라의 남단에 있는 소록도에 가면 지금도 전국에서 이곳을 찾아와 정착하고 평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름철에 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때는 불쾌한 냄새가 예배당에 가득합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들은 난로를 꺼버리고 창문을 열고 예배를 드리었습니다. 사연을 물은즉 손님 목사님이 오셨는데 자신들의 추한 냄새가 될 것 같아서 손님 목사님이 오실 때마다 이렇게 난로를 끄고 문을 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인상은 정면으로 보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악수를 하려고 하면 송구해 하면서 겨우 악수를 하곤 합니다. 자신들의 손이 휘어지고 손의 형태마저 없어진 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한 예배입니다. 그들의 열심, 그들의 청아한 찬송, 말씀을 사모하는 절박한 심령, 쉼 없는 기도의 함성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 만난 그곳에서 만난 어떤 장로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이 세상에 살면서 감사할 일이 많지만, 제일 감사한 일은 이 병에 걸린 것입니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분의 말은 바로 이어집니다.
"저는 이 병이 걸리기 전에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가정이나 사업이 남의 앞을 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모두 즐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오히려 지금이 감사합니다. /또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세상의 즐거움은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에 제가 현재 누리는 이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병에 안 걸렸으면 이렇게 좋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겟습니까 그래서 감사하고 마냥 즐겁습니다."
그분의 육신은 상처투성이였으나, 그 분의 신앙은 너무나 푸르렀고 생기가 차고 넘치었습니다.

본문접근 및 재경청

오늘 구약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소중한 규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새로운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받은 땅에 곡식을 일구어 그 결실의 첫 열매들을 하나님 앞에 바쳐 하나님의 도와주신 사랑 앞에 감사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의 40년 생활 동안 늘 이동을 하느라고 목축을 기르면서 땅의 소산을 차분히 경작하여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야 했던 광야는 전혀 토양이나 기후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짓게 될 때 그들은 하나님이 때를 따라 비를 내려주시고 해 빛을 주시는 고마운 사연을 경험하게 되고 감사의 신앙을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이기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명령하시었습니다.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 오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즉 여호와여 주께서 저에게 주신 이 땅의 첫 곡식을 이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아뢴 후에 그 모든 예물을 하나님 앞에 놓고 그 앞에 엎드려 예배드릴 것을 명령했습니다.
신약을 통하여 주신 말씀은 구약의 자연 조건에서의 감사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에서 받은 은총에서 외쳐야 하는 감사의 신앙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일컫는 문둥병은 나균으로 생기는 만성 전염병입니다. 1874년 노르웨이의 한센씨가 나균을 처음 발견한 후부터는 이 병을 한센씨병이라고 이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서 말씀을 증거 하시던 당시에는 메소포타미아와 동양지역에서는 이 병으로 시달린 사람들이 아주 많았었습니다. 이 병은 아주 불결한 병으로 취급을 받아 그 이름도 "징계"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병이 천민들에게만 발생된 병이 아니라 유다 왕 웃시야, 모세의 누이 미리 암과 같은 고급 신분의 사람들에게도 걸리게 된 무서운 병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 병에 걸리면 동네에서 격리를 당하고 징계를 받은 죄인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를 받아 제사장으로부터 깨끗한 몸이 되었다는 선언을 받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 경계를 지나시면서 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나병환자 10명을 만나게 됩니다. 가까이서 감히 만날 수 없던 이들은 멀리 간격을 두고 소리 질러 말을 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때 예수님은 이상할 정도로 예수님은 아무 질문이나 설명이 없이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나병이란 하늘이 내리는 병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이 낫게 된 경우는 제사장의 확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 열 명의 나환자들은 바로 발길을 옮겨 제사장에게로 가고 있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가는 도중에 모두가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모두가 기쁨이 충만합니다. 이 때 열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의 회복에 뛸 뜻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 중에 단 한 사람.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 유대인들이 지극히 멸시한 바 있는 사마리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기쁨을 주시는 분을 찾아 자신의 고마움을 표현해야 한다는 예의 깊은 결심을 합니다. 그는 자기의 회복된 몸을 보고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는 지체 없이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아홉은 어딜 가고 너 혼자만 왔지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밖에는 없단 말인가"
무척이나 괴로운 표현을 하십니다.
당연히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 사람들이 그 흔적마저 없을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은 별로 편하시지 못했습니다. 섭섭한 마음을 가진 체 그리고는 자기 앞에 엎드려 있는 사마리아인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거라. 고마움을 아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 때 그 사마리아인은 정상인의 몸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주제부상

오늘의 구약의 말씀 속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자연 속에서 얻게 된 결실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당연한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신약의 말씀에서는 우리의 눈앞에 고마움을 아는 사람의 행동과 우리 주님의 반응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함을 아는 것은 하나의 믿음과 연관된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한 인간이 고마움을 안다는 것은 실로 인간의 삶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인격, 지식, 따뜻한 인품, 남다른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고마운 사연에 감사할 줄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인간의 모습은 가졌으나 인간으로서는 결격자 입니다. 고마움을 알고, 고마움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못될 때 그 인격 그 지식 그 신앙은 별로 그렇게 자랑스럽지는 못한 것입니다. 혹자는 '감사하다'는 표현 '수고했습니다'라는 표현은 속으로 하는 것이지 밖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폐쇄된 동양의 사고를 앞세우겠지요.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성경에는 감사 찬송 또는 할렐루야라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배의 동기도 감사 때문이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찬송도 감사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I. 감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주제의 정의)

요즈음 세상에서 구경할 수 있는 감사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면 고마운 사연에 대하여 전화 한통화로 간단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잊어버리는데 이러한 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권력과 부가 대단하고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자신에게 적은 것이라도 베풀어주었다면 감사하다는 명목으로 지나치게 표현함으로 뇌물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것은 오늘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감사의 뜻입니다. 요즈음은 마음과 행동이 너무나 차이가 많은 감사가 가득합니다. 눈앞에서는 머리끝이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고, 지나면 비난과 욕을 해대는 그러한 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감사의 원어의 뜻은 받은 복을 찬양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복의 사실을 찬양하고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감사의 깊은 뜻입니다.
오늘의 구약의 말씀에 나타난 감사의 뜻은 자연을 통하여 우리 인간이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감사는 한 인간이 육적인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주신 감사의 사실을 다시 우리의 삶에 적용한다면, 진정한 감사의 뜻은 하나님께 진 빚을 깨닫는 것입니다. 즉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하나의 채무 감에 젖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회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형편을 자세히 보면 우리는 서로 서로 빚진 자입니다. 우리 교우들에게도, 벗들에게도, 형제지간, 부모와 자녀 사이도 우리는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활의 구조는 서로 서로 돕고 사는 가운데 우리의 생활은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 자신도 빚을 지고 사는 인생임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로마서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서로 빚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느낄 때 우리는 고마움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고맙습니다. 수고했습니다"라는 말을 인간 앞에, 하나님 앞에 하게 됩니다.

Ⅱ. 왜 고마움을 표시해야 하는가 (필요성)

여기 고마움의 신의를 지키지 못한 한 가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땅에 이민을 간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나라에 자신을 책임져줄 친 인척이 없이 이민을 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곳에서 이민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님들에게 신세를 끼치게 됩니다. 목사님은 한 가정을 비행장에서부터 그 대가족을 모시고 와서 우선 자기 집에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그 집의 형편에 맞는 아파트를 한 달 후쯤 찾아서 우선 독립을 시킵니다. 그리고 그동안 운전을 가르치고 직장을 알선하여 안정을 찾게 해줍니다. 목사님은 우선 자신의 교회에 새로운 교인이 생기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고 열심히 도와줍니다.
그러나 도움을 받은 가정은 기반을 원만히 닦은 후에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 교회에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동안 목사님으로부터 진 빚을 언제나 생각하고 항상 머리를 숙이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에게 불편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다른 교인들은 전혀 문제로 여기지 아니하는데 이 가정은 남달리 이것을 문제로 삼아서 시비를 계속하다가 이것이 기회이다 하고서 그토록 자신을 돌아보아 주던 목사님에게 고마웠다는 한 마디의 인사도 없이 그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몇 년이 지난 후입니다. 막상 집안 식구 가운데 건강에 문제가 생겨 급작스럽게 입원을 하였으나 보험은 없고 돈도 여유가 없는 긴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옮긴 교회의 목사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무 길이 없었습니다. 너무 급한 형편인지라 고개를 숙이고 다시 첫 번째의 목사님을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구하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수만 불의 병원비를 해결 받는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하여 어려운 고비를 넘기었습니다. 고마움의 마음이 가득하여 한동안 열심히 그 교회를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은 1년을 다 넘기지 못하여 다시 배은망덕의 기록을 남기는 행위를 하고서 그 교회를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마움을 마음에 간직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한 한 가정의 부끄러운 기록입니다.

III. 우리들이 고마움을 생활화하는 데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오늘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을 주관하시면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건강을 지켜주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서 감사의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은 땅에서 얻은 첫 열매를 가지고 감사의 예배를 드릴 것을 명령하십니다.

(말씀)
오늘 주신 신명기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험준했던 과거를 먼저 회상하게 합니다. 어떻게 해서 그들이 가나안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평화와 기름진 가나안 땅에서의 농작물을 거두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고마운지를 먼저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절차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 오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즉 여호와여 주께서 저에게 주신 이 땅의 첫 곡식을 이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아뢴 후에 그 모든 예물을 하나님 앞에 놓고 그 앞에 엎드려 예배드릴 것을 명령했습니다.

(해석)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으로서 독특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거가 하나님의 보호가 없었으면 모두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독특한 역사의 기록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대로 이집트 이주를 비롯하여 그곳에서의 강제노동으로 시달렸던 그들의 역사는 실로 비참하였습니다.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출하여 광야의 40년을 지나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신 드라마와 같은 역사의 기록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한시라도 잊어버릴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독특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의 말씀대로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어 얻은 첫 곡식은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와서 감사의 예배를 드릴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일기에 의하여 지어진 농사의 첫 열매를 가지고 단순한 연중행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민족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회상하면서 드리는 신앙적인 삶을 지속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용)
오늘의 이 구약 말씀은 단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내려진 명령이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내려진 명령입니다. 사실, 이 민족도 숱한 역경 속에서 오늘을 지탱해온 민족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속에 보호받은 민족입니다. 지난 한해를 돌이켜 보면 너무나 많은 사랑을 듬뿍 받은 우리의 민족이요 개인입니다.
북녘의 땅에서 전쟁을 무기로 하여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이 나라는 하나님의 보호 속에 오늘을 지탱합니다.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가 왕성한 나라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가난의 수준을 벗어났습니다. 우리의 땅에서는 아직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곡식이 이 가을도 풍성히 열리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북녘 땅이 가난과 기근에서 몸부림치는 아픔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마는 필연코 우리의 땅은 통일이 될 것이고 그 통일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를 새롭게 장식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에 펼쳐질 하나님의 손길은 분명히 감사의 사연을 우리에게 주실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의 땅은 해 마다 하나님의 보살핌 속에서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재배할 수 있는 여건이 구비된 나라입니다.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을 우리가 재배하여 먹을 수 있는 아름다운 땅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의 말씀대로 우리의 민족도 하나님 앞에 우리의 첫 열매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은총을 기리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림이 너무나 마땅합니다.
사실 우리가 받은 모든 삶의 은혜는 값을 지불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마시는 공기에 값을 지불하십니까 마시는 물의 주인에게 값을 지불하십니까 철 따라 주시는 식물의 주인에게 한 푼이라도 그 값을 지불하십니까 지불한다면 모두 그것을 관리하고 키우는 사람의 인건비를 줄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우리는 지불하지 아니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감사의 생활이 감사주일이라는 오늘에 끝나지 아니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에 우리의 마음과 언어는 감사로 가득해야 합니다. 잠자리를 찾을 때는 오늘을 무사히 넘기게 보호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잠을 깰 때는 지난밤을 주의 품에 쉬게 하심을 계속적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즐거운 일을 만날 때는 즐거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날 때는 그 어려움을 통하여 새로운 경험과 연단을 쌓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처럼 삶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 감사로서 그 생활이 이어져 간 사람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공적으로 이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오늘의 복음서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주님은 그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먼저 마음과 언어와 행동으로 감사의 표현이 있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말씀)
오늘의 신약의 본문 가운데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은 열 사람이었습니다. 아홉 사람은 자신이 입은 놀라운 은총에 대한 구체적인 감사의 언어와 행동을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으로 그 열 명 속에 끼였던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자신의 병을 낮게 해주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때 우리 주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하시면서 감사를 언어와 행동으로 나타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하여 섭섭함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이 감사를 드리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서 가거라. 고마움을 아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 때 그 사마리아 인은 정상인의 몸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해석)
그 시대의 나병환자란 천벌을 받은 사람처럼 가장 비참한 병의 소유자로 사회로부터 격리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병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기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불치병 환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린다는 소문은 이 나환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멀찍이 멈추어 서서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애걸을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시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이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 가는 길 그토록 무섭던 병이 낫게 됨을 경험합니다.
이 순간에 두 형태의 인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은혜를 망각해 버린 유대인과 은혜를 감사하는 사마리아 인이 대조적으로 우리 앞에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은 감사하는 자에게는 더 많은 것을 허락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고도 감사의 마음과 행동과 언어가 없던 아홉 사람을 원망스럽게 찾고 계시었습니다. 주님의 모습이 매우 섭섭한 감정을 갖는 듯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적용)
이 순간 우리는 고마움의 은혜를 베푸신 주님 앞에 돌아와 언어와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은 본문의 아홉 사람의 유대인들을 경멸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면 은덕을 알아야 하는데 기본적인 예의마저 없는 인간들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한국인의 고마움의 표현은 마음에는 어떻게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의 언어와 행동으로서의 표현은 미약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잘 분석하여 스스로 들어보시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주시옵소서"의 말은 기도의 문장마다 계속되는데 지금까지 받은 것에 대하여는 "감사 합니다"의 표현이 너무 들리지 않은 것이 우리의 실정입니다.
우리의 고마움의 표현은 좀 이상합니다. 우리 민족은 일반적으로 고마운 사연 앞에는 씩 웃고 지난 것이 고작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아주 들리지 않은 곳이 바로 우리의 사회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남편이 한 달 내내 직장에서 긴장하고 땀 흘리고 상사의 눈치를 살펴가면서 일하고 받은 월급봉투를 가지고 집에 온 한국의 남편들은 월급봉투를 건네주는 순간부터 긴장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다 세어 본 부인이 조금이라도 액수가 차질이 생기면 그걸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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