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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 죽고자 하느냐 (겔 3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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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개척 당시 텍사스 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무법천지인 그 때에는 총을 난사하는 등 많은 살인이 저질러져서,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 제정,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에 덕망 있고, 선량하고, 이웃으로부터 존경받는 아주 온순한 한 청년이 술집에서 실수로 살인을 했습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제 집행날짜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온 동리 사람들은 그의 사람됨됨이를 익히 아는지라,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 해서 구명 운동에 나섰습니다. 모두가 서명을 하고 탄원한 끝에, 드디어 특별사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지사는 사면장을 들고 감방에 있는 청년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이미 그 전의 온순한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못되고 포악해졌는지, 주지사를 향해서 폭언을 하고 거칠고 난폭한 행복을 했습니다. 뉘우치는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주지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게다가 청년은 사면장 마저 거부해버렸습니다. 자가를 구하려는 동리사람들의 은혜를 저버린 채, 그는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그가 왜 이래야만 했겠습니까 이미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입니다. 누구의 위로도 받아들일 수가 없고, 누가 나를 용서한다고 해도 그 용서는 나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는 마치 자살하는 사람처럼 그대로 사형집행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정당화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의 죄인됨은 내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의 왕이 세 사람의 현자(賢者)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괴로운 일이 무엇이냐” 한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늙어서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가난해도 상관없지만, 늙어서 가난 해지면 참으로 비참합니다.”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는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주어질 때에 그것에 한계를 느끼고 제일 괴로운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아무 선행도 없이 임종을 맞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제야 왕은 “네 말이 맞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잘살고 못살고가 뭐 그리 대단한 일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선한 일이라고는 한번도 한 적이 없는, 후회와 뉘우침밖에 없는 그 시간에 임종을 맞게 된다면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진리일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면 난센스같은 질문을 합니다. “어찌 죽고자 하느냐(11절)”--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모든 생물, 모든 사람 중에서 죽고 싶어하는 것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욕망 중에서 가장 큰 욕망은 끝까지 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닙니까 좀 불편해도 살고 싶고, 병신이 되어서라도 살고 싶고, 어떻게 해서라도 살고 싶은 생명에로의 욕망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찌 죽고자 하느냐”--때때로 우리는 죽고 싶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살고 싶은 마음이 달리 발산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상실할 때, 존재의 의미가 결여될 때에 사람들은 죽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다시말하면, 동물적으로는 살 수 있지만 인간적으로 살지 못할 때, 먹고 입고 꿈틀거리는 것으로 살 수 있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고 느낄 때에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살고 싶은 욕망 이상으로 이 고통은 우리를 누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자살이란, 정신적 궁지에 빠진 사람들이 절망에서 탈출하려는 마지막 수단이다.” “정신적 궁지에 빠질 때에 사람들은 현실감과 자기 의지의 균형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택하는 것이 자살이다.” 이상하게도 인도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합니다. 거기에는 종교적인 이유가 큰 것 같습니다마는, 그들의 자살에 대해서 통계를 내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좀 특별한 사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에서의 경우, 대체로 45세 넘은 사람들이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1분에 한 명꼴로, 그것도 18-25세 사이의 젊은 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의 자살그것은 생의 의미의 상실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말합니다. “현대인은 두 가지 병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자기를 잃어버리는 병이요, 둘째는 자기를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병이다.”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깨닫지 못해도 병은 병입니다. 병이 든것을 나는 모르고 있어도 나는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의식하거나 말거나 간에 병의 결과, 다가오는 사망--그것은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병을 알아야 병인것이 아닙니다. 병은 내가 몰라도 병입니다. 전혀 아픈 것을 모르고 있어도 병은 병이요, 죽은 것은 죽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루소는 인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열 살 때에는 과자에 움직이고(먹을 것만 있으면 그쪽으로 끌린다는 말입니다), 이십 대에는 연인에 끌리고, 삼십 대에는 쾌락에 끌리고, 사십 대에는 야심에 끌리고, 오십 대에는 탐욕에 끌린다. 그러나 이렇게 무엇엔가 끌리고 있는 동안에 인간은 허수아비일 뿐이다.” 그 어느 때라도 인간 실존에 직면하면서 존재의식을 가지는, 그 때부터 비로소 인간입니다. 존재에로의 고민이 있을 때, 도대체 나는 왜 사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는 그 때부터 비로소 인간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지니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해답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살아간다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빅토르 프랭클리라고 하는 교수가 미국 대학생 수천 명을 상대로 이런 설문조사를 해보았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삶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데 어이없게도 설문에 응답한 80%가 ‘삶의 의미가 전혀 없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여러분은 지금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삶의 이유와 의미가있다고 생각합니까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어찌 죽고자 하느냐” 사실은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살기를 원하면서 죽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건강을 원하면서 꼭 건강에 해로운 짓만 합니다. 성공을 원하면서 꼭 성공할 수 없는 짓만 하고 있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 불행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찌 죽고자 하느냐” 어찌하여 살기를 바라면서 꼭 죽을 길로 가고 있느냐 하심입니다. 이 얼마나 답답하고 가슴아픈 질문입니까
존재의 의미를 감지하는 기관은 양심입니다.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양심의 자유를 얻기까지는 그는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찾기까지는 그는 결코 자유할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십니다.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죄는 미워하시면서도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죽고자 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죽는 길로 가는 것을 걱정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11절).” 죄악과 더불어 죽는 것을 바라지 않고, 죄악과 더불어 벌받는 것을 바라지 않고, 저주받고 심판받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고 하심입니다. 죄인을 벌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의가 아닙니다. 돌아와서 살기를 원하노라, 악인이 살기를 원하노라 하심입니다. 얼마나 간절한 말씀입니까
생명의 길은 오직 회개에만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합니다. 이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간혹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죄책이라는 것은 미개한 사람들의 자기 연민이다.’ 죄에 대해서 이렇게도 변명해보고 저렇게도 합리화해봅니다. 죄는 좀 있다 하지만 결과는 좋은것이 아니겠는가,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도합니다. 그러나 어떤 변명도 소용 없습니다. [The cocktail party]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실리아라는 여자가 나오는데, 그녀는 죄책으로 괴로워합니다.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그저 괴로워만 하다가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갑니다. 혹 이것이 무슨 정신병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의사는 그녀의 얘기를 모두 듣고는 이렇게 물어봅니다. “당신이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자라면서, 죄에 대해서 부모님께 어떻게 배웠습니까” 실리아는 대답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내게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죄를 생각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해로우니까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말고, 될수있는대로 죄를 무시하고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죄에 대한 의식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죄를 좀 지으면 어때 이까짓 것 쯤이야 괜찮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죄에 대한 불쾌감을 지울 수가 없고, 이 실패감과 수치스러움, 이 더러움과 저주의식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양심이, 내 영혼이 자유한 것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회개하는 것으로 가능할 뿐입니다. 오직 회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 길 외에는 누구도 자유하지 못합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안돼, 이것은 잘못이지’ 알면서도 돌이키지 못합니다. 왜입니까 여기에 큰 장애물이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은 그것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교만한 자는 회개하지 못합니다. 또한 적개심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더러는 억울하고 분해서 한에 맺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또한 시기와 질투입니다. 내가 회개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마치 누구로부터 내가 실패하는 것 같고 누구한테 지는 것같이 생각을 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한마디 하면 누구는 살고, 나는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싫어서 못합니다. ‘I am sorry' 한마디면 편해질 수 있는데도 못합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에 누구는 살고 나는 무너지고, 누구는 잘나고 나는 못난 것처럼 되는 것 같아서 못합니다. 회개를 못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절망입니다. 뉘우쳐봐도, 회개해봐도 도리없고, 오늘 회개한다고 내일 나아질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구제불능입니다. 이 절망감이 회개하는 데에 무서운 장애이며 자기 파멸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를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은 여기에 복음을 전해줍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 회개하지 못합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믿음 없이는 회개하지 못합니다. 또한 자기를 부인할 때에만 회개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내 의를 완전히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 의를 얼마는 남겨두고 나는 나대로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는 회개하지 못합니다. 백기를 들어야 합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자기 의를, 심지어는 의롭고자하는 마음까지도 깨끗이 포기하고, 은혜 앞에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고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귀한 것은 사랑의 확신입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타락된 고통에서 내 아버지 집을 생각합니다. 왜입니까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있습니다. 마지막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이는 사랑이 믿기지 않고 회개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보십시오. 부모앞에서 부모의 사랑을 느낄 때에 회개하는 것이 진짜 회개입니다. 몽둥이를 들고 때리는 순간에 자녀들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사랑과 긍휼, 온전한 사랑 앞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랑의 확신이 참으로 회개를 가능케 합니다. 여기에 새 창조의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11절)”--이 복음, 이 말씀을 들을 때, 이것이 내 마음에 와서 닿을 때에 비로소 참 회개가 가능한 것입니다.
옛부터 전해지는 고대 기도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새로운 진리를 피하려고 하는 비겁함으로부터, 진리를 반쯤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게으름으로부터, 모든 진리를 안다고 하는 오만함으로부터, 오! 진리의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어찌 죽고자 하느냐”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의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정녕 살리라”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참으로 회개하는 순간에 기억되지 아니하리라 하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으시고 내 기억에서도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 순간에야 비로소 그는 자유의 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들일 수 있고, 내 삶의 존재를 느낄 수 있고, 이웃을 반가이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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