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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혹을 이기는 길 (약 01: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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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시간에는 하나님의 자녀가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시련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시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지난 시간 말씀드린 시련의 의미를 가진 시험이 있습니다. 다른하나는 오늘 생각하게 될 유혹이라는 차원의 시험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시험이란 말로 쓰여지고 가끔 시련으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의깊게 살펴보면 어떤 경우에는 시련이란 말로, 다른 경우에는 유혹의 차원에서 시험이란 말이 쓰여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시련이란 일반적으로 밖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이고 유혹이란 우리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시련은 하나님이 우리를 유익하고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말하자면 테스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육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중요한 수업을 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시련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반면 유혹이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이것은 사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그 목적이 파괴적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고 망하게 하기 위하여 유혹합니다. 그런데 이 유혹을 이기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옛날 왕양명은 ‘산중여파적이나 심중나파적’(山中如破賊 心中難破賊)이라 했습니다. 산 속에 있는 적을 물리치기는 어렵지 않은데 마음속에 있는 적을 물리치기는 어렵다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생애의 마지막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간곡한 권명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도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도 “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밀려오는 유혹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사실 엄격히 말하면 시련과 유혹이 동기의 차원이 다르지만 완전히 별개의 문제로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같은 단어로 설명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시련이 찾아올 때 조심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유혹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에게 시련이 올 때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가진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을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하면서 르비딤이란 곳에 도착했을 때 마실 물이 없는 시련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이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파괴적인 시험의 자리를 주저앉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세요. 그는 하나님의 지시한 땅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심한 흉년을 만났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그것도 하나님이 가라고 지시해서 오게 된 땅에서 뜻하지 않은 시련을 당하게 될 때 아브라함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자기 생각대로 애굽땅으로 내려갔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자기 처세대로 움직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얼마나 큰 망신이고 치욕이었습니까
이렇게 믿음이 훌륭한 사람도 유혹에 빠졌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까 유혹을 이기는 길이 무엇입니까

1. 죄악의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어 유혹에 빠지게 되면 죄를 범하게 되는데 그 죄의 결과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15절을 보세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솟아나는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죄를 범하게 되고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죄가 가져오는 궁극적인 결과를 바라 볼 수 있다면 우리의 태도와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을 당할 때 우리가 흔히 취하는 자세가 어떻습니까 13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은 파괴적인 의미에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보통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나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내가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십니까 하나님이 정말 저를 사랑하십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잘못을 범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시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자리에 처해서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것처럼 교육적인 목적의 시련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련은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를 망하게 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시험과 유혹일지라도 우리는 잘 견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도 선으로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그를 망하게 하려고 악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모든 악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것입니다. 사탄은 욥을 시기하여 사람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고통을 욥에게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잘 참아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갑절로 받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를 파괴하려고 오는 시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시험을 잘 통과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삶 가운데 주어지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시험을 잘 통과하기 위해서 우리의 자세와 태도가 아주 중요합니다.
시험을 바로 치르면 성적이 향상됩니다. 그러나 컨닝을 하면 그것은 성적 향상에 도움이 안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세로 시험을 치러야 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시험을 올바른 자세로 치뤄야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4절에 보면 유혹의 차원에서의 시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욕심과 건전한 욕망을 구별해야 합니다. 먹고 싶은 욕망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탐식은 죄입니다. 건전한 욕망을 부정하는 금욕주의는 참된 의미에서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건전한 욕망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욕망이 바르게 지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욕망은 사람의 종이 되어야지 욕망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욕망을 바로 잘 사용하면 인생의 목적을 성취하고 인격 성숙에 기여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욕망에 끌려 갈 때 범죄 속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 통제된 욕심이 우리를 유혹에 빠지게 합니다.
‘욕심에 끌려’라는 말은 낚시꾼이 고기를 낚으려고 미끼를 끼운 낚시를 던져놓고기다리고 있다가 고기가 물면 재빨리 그 고기를 끌어올리는 모습을 말합니다. 사탄은 욕심이라는 미끼로 강인하게 우리를 낚을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혹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낚시꾼이 미끼를 낚시에 꿰놓고 물에 던져 고기를 꼬이는 것을 말합니다. 미끼는 아름다울수록 좋습니다. 사탄은 아주 아름다운 것을 우리에게 미끼로 던집니다. 바울은 사탄이 아주 아름다운 것을 우리에게 미끼로 던집니다. 바울은 사탄이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고 말했습니다. 요즘 텔레비젼에서 공익 광고 협의회의 마약에 대한 경고를 선전하는 것을 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미끼요, 미끼로 유혹하고, 유혹된 고기가 미끼를 무는 순간 다시 헤어나올 수 없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에덴 동산의 하와에게 아름다운 미끼를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전략에 말려든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보았을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느껴지고, 목에서 침이 나오고, 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 이 미혹의 전략에 말려들어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인간의 실패였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땅을 난눌 때 아브라함은 모든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롯에게 선택권을 먼저 주었습니다. 롯은 아름다운 평원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습니다. 신앙은 보는 것이 아니라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그럴듯한 미끼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다윗 왕은 지붕 위를 거닐 때마다 미끼를 보았습니다. 미끼는 언제나 죄악의 결과를 보여주지 않고 쾌락만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모세에 대해서 말한 것을 보세요. 히브리서 11장 25절에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그의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위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공주의 양자로서 온갖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지위와 환경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삶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의 백성과 함께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죄악의 낙’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악에는 쾌락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죄악에는 모험이 있고, 흥분이 있고, 짜릿함이 있고, 달콤한 맛이 있고, 스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있는 단어 ‘잠시’라는 말을 잊지 마세요. 죄악에는 낙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낙은 잠시입니다. 내일 이침 눈을 뜨면 죄가 가져온 독침이 우리를 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바로 눈앞만 보여주어서 우리를 근시안적 인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원시적인 안목으로 죄가 가져오는 결과를 바라보며 우리 삶의 순간 순간을 바로 살아가도록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욕심이 가져온 미혹이 어떻게 됩니까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았습니다.” 욕심의 결과는 범죄입니다. 범죄는 불순종을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지식도 감정도 중요하지만 의지 관리에 유의해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이란 말을 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이 믿음 안에 우리 인격의 삼요소인 지식, 감정, 의지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사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사실을 생각할 때 마음에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신앙에는 감정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 구원을 지식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결과를 알아도 망할 수 있습니다. 마귀도 알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주님 앞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신앙은 아닙니다.
신앙은 지식과 감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의지의 결단입니다. 그리스도를 실제로 의지하고 내 삶 속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순종과 불순종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가 살 수도 있고 죽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가져오는 이 마지막 결과를 민감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멸망하는 과정을 보세요. 욕심에 이끌려 미혹된 사람은 눈앞에 던져진 미끼만 보고 그 파멸의 결과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마지막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유혹을 이기는 길을 배운 것입니다.

2. 유혹을 이기려면 좋으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7절부터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련 혹은 유혹을 만날 때 사단이 우리 속에 찾아와서 속삭이는 음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너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과연 좋으신 분이시라고 너는 믿고 있느냐” 하면서 우리에게 접근해 옵니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속에 잔인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중요한 전략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에게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이미 우리는 사단과의 싸움에서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사단이 하와를 찾아와 뭐라고 속삭였어요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하게 하신 잔인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유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신데 그렇지 않은 분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것은 모두가 사단의 전략이라는 것으로 믿어도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절을 보세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모두가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시험을 만날 때마다 생각해야 할 사실은 모든 좋은 은사와 좋은 선물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했을 때를 제외하고 찾아오는 어려움, 더구나 시련으로 찾아오는 어려움, 그 어려움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괴롭힌 육체의 가시를 생각해 보세요.
바울은 난치의 질병을 그 몸 안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병이 무슨 병이었는지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바울의 일생을 통해서 절대 못 고치고 고생한 병이었습니다. 그는 이 병을 고쳐 달라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쳐 주시는 것으로 응답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병을 위해 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병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바울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바울이 너무 자고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가시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바울로 말하면 탁월한 지식과 훌륭한 가문, 그의 용기 등 인간적으로 말해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건강하기까지 했다면 너무 자고할까봐서 하나님이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응답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시도 하나님께서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로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원문에 보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계속해서 내려 오나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들을 계속하여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한 때 나를 사랑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법은 없습니다.
사람은 미련해서 하나님의 주시는 것보다 사단이 보여주는 것을 더 좋아할 때가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는 그럴듯할지 모르지만 사단이 주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보세요. 그는 사단이 보여 주는 것이 좋아 보여서 그것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쓰디쓴 상처와 아픔을 다윗의 생애속에 남겼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와 법죄한 이후부터 다윗의 왕국은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일생에서 석양은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자기 아들의 배반과 반역으로 다윗은 커다란 어려움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계속해서 다윗을 괴롭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요셉은 사단이 제공하는 눈앞의 찬란한 미끼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로 요셉은 더 좋은 것을 누렸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사단이 주는 것 중에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이 말씀을 믿으세요. 주께서 주시는 것은 존귀한 것입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계속해서 주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계속해서 주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3. 유혹을 이기려면 우리는 새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 범죄의 유혹이 찾아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상기할 때 우리를 유혹의 자리에서 지킬 수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절에 보면 그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그분의 자녀입니다. 이런 우리의 새로운 신분에 대한 끊임없는 자각과 각성이 중요합니다.
요셉이 어떻게 유혹을 이겼습니까 밖으로 볼 때는 종의 신분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인간의 상전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사람이 보고 보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려고 애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나는 순간 아직도 옛날 성품이 우리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옛 성품과 새 성품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내적인 싸움,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의 거룩한 성품은 하나님의 뜻 따라 살자 하고 옛 성품은 육체의 소욕대로 살자고 계속 충동할 것입니다.
어느 교회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 진리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어요. 한 사람은 아담이고요, 또한 사람은 예수님이예요. 때때로 시험이 우리 마음 문에 와서 두드릴 때가 있어요. 그때 아담이 나가서 대답하면 큰일나요. 그러면 죄를 지어요. 그렇지만 예수님이 나가서 대답하면 꼭 이기게 돼요. 알았어요”
그렇습니다. 죄가 우리 마음을 노크 할 때 누가 응답합니까 우리 자신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십니까 여러분, 예수님으로 대답하게 하세요. 주님으로 하여금 그 상황을 다루고 그 시험을 물리쳐 유혹을 이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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