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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에 드는 원인 (마 26: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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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 생활에는 시험이란 과목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여러 가지 경위에서 시험이란 것을 통과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많이 한 후에 시험을 보는 것은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시험을 볼 때 자기의 실력이 얼마만큼 자랐는지 인정되는 것처럼 우리 신자들에게도 신앙의 시험이 있습니다. 시험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시험인지 모르고 당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은 누구나 다 당합니다. 그런데, 시험의 종류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선한 시험이 있습니다. 신앙을 연단 시키고 키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연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시험하는 것이니 성격이 선합니다. 예를 들자면 창 22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는 시험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잘 감당했고 그 시험을 통과 한 후에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신 그 시험은 통과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복이 임합니다. 그런데, 그 시험을 걱정하고, 엄청나게 큰 시험이라 감당하지 못하고 넘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둘째는 성도의 신앙을 넘어뜨리고 신앙을 뺏으려는 마귀의 시험이 있습니다. 이 마귀가 우리에게 주는 시험은 성질이 악합니다. 예를 들자면, 욥의 시험이 그런 것입니다. 마귀가 욥을 시험하는데 욥의 모든 재산은 다 거두어 가고 갑자기 도적 떼가 오더니 그 많은 재물을 죽이고 빼앗아 가고, 남은 것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살라 죽이고, 바람이 불어오더니 집을 무너뜨려 그 좋은 10남매도 다 죽여버리고, 욥은 병에 걸리는 등의 시험들이 닥쳐오는데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욥은 시험은 받으면서도 그 시험을 이겨냈습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자도 하나님이시라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마귀가 졌습니다. 그 시험 후에 욥기 42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배로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잘 통과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아서도 알고 욥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시험을 잘 통과하고 이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베드로가 시험에 들것을 예언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 부인하는 시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날에 제자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예고해 주셨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모른다고 도망갈 것이다." 그때 베드로는 "절대 나는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잡혀가서 대 제사장 마당 뜰에 심문을 받을 때 그곳에 베드로도 따라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마당 뜰에 그 대제사장 하속들이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워 놓고 밤을 세웁니다. 그런데 한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예수의 제자다"라고 폭로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주 강력하게 3번씩이나 부인을 합니다. 시치미 뚝 떼고 모른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시험은 우리 입장에 말하면 모든 것을 예수 안 믿는 사람처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런 시험에 드는 그런 일은 없는지를 돌아보며, 또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베드로가 당한 시험의 원인을 알아야겠습니다.

첫째로 자기 과신입니다. 자기를 너무 믿었다는 것입니다. 26장 33-35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하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자신 만만했습니다. 이렇게 자기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자기 도취에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 불과 몇 시간후에 "나 예수 모른다 너 무슨 소리 하느냐" 했습니다.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후의 일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가 예수를 잡아 뗄 것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 과신에 충만해 있었습니다. 인간의 무지를 몰랐던 사람의 약점에서 오는 자기 과신이었습니다. 한치 앞은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약점이요 실수입니다. 앞날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과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를 모르는(무지)의 치사입니다. 자기 의지의 허약성이 얼마나 허약한 지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담대한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허약한 존재인지를 알았던들 이런 장담은 안 했을 것입니다. 인간은 다 한가지입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조금 달콤한 말만 들려 오고 유혹을 받으면 이성을 잃어 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좀 협박을 하고 미혹을 하면 참과 거짓을 밝히지 못할 정도로 겁이 나서 벌벌 떠는 것이 인간의 허약성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오고 자기에게 좀 좋은 것이 온다면 양심에 기능도 잃어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누구나 자기를 믿고 살지만 자기의 약함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위가 높은 관리 앞에서 허약한 것이 아닙니다. 여종, 비자 앞에서 예수를 부인했으니 세상에 베드로가 어떻게 이렇게 허약해 질 수가 있겠습니까 베드로만 그랬습니까 베드로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나가서 베드로처럼 처신하며 살지 않습니까 자기 과신에 병든 사람만큼 취급하기가 곤란한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의 병은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시험에 잘 듭니다. 자기의 연약을 알고 자기의 부족을 아는 사람은 실수를 하고 죄를 지어도 고치기가 쉬운데, 자기 과신의 병에 들어 있는 사람은 회개도 않고, 고치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습니다. 참 힘들고 다루기 어려운 것이 자기 과신의 병입니다. 자기는 옳다는데 자기는 완전하다는데 누가 고쳐줄 수 있습니까 제일 무서운 병입니다. 지기의 연약성을 알면 이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인간은 자기 연약을 배울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느냐 세상의 어디를 가도 인간이 자신의 허약성을 바로 배울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고후 12:10에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니라." 이 말은 나의 연약을 알 그때에 강해진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위치가 연약할 때만이 다른 것을 의지고자 합니다. 자신 있고 강한 사람은 절대 남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필요 없습니다. 그만큼 강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약해졌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때,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하는 것을 깨달을 때, 그때 가장 강하다"고 했습니다. 사람 붙들어 봐도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고 물질, 명예, 권세 붙들어도 아무 소용없다. 오직 날 사랑하시는 주님을 붙잡을 때 그때에 강해지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잘 믿는 사람입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하나님이 힘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힘이신 줄 언제 알았느냐 내 연약성을 깨달을 때 그것을 압니다. 그래서 자기의 연약성, 자기의 무지성, 자기의 형편없는 허약을 알 때에 하나님을 붙듭니다. 그때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때가 비로소 강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지하고 다른 것을 과신하는 사람은 아무리 큰소리쳐도 별 모양이 없이 형편없이 무너집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서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할 때에, 나 같은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엎드릴 때 천사가 단에서 핀 숯을 가지고 와서 입에 대며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때에"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그때에 사명이 오고 그때에 능력이 오고 그때에 일어나서 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아도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보라."고 하셔서 깊은데서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 앞에서 엎드리며 하는 말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메시야로 믿었기 때문에 엎드리었습니다.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때 너 같은 죄인 필요 없어 저리가! 했습니까 그때 붙들어 주고 그때 안아주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예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자기의 무능을, 자기의 허약을 깨닫는 사람이 천지를 붙드신 하나님을 강하게 붙들 수 있고, 하나님을 붙든 사람이 강자입니다. 베드로가 왜 예수를 맥없이 부인하고 무너졌느냐 자기 과신 때문입니다. 나는 훌륭한 예수의 제자이다. 그것 때문에 그것만 믿었기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둘째로 사전에 준비기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40-41에 보면 예수님이 다 예고해 주셨습니다. 시험에 든다 내가 붙잡혀서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고 삼일만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까지 다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데리고 와서 하시는 말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시험이 오니. 이것이 보통 시험입니까 예수님과 마귀가 싸움하는 절정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을 고비에 처해있는, 예수님과 마귀가 접전하는 싸움의 절정입니다. 이런 큰 시험이 앞에 놓여졌는데 "너희들도 깨어 있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부탁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한 채 피곤하니까 잤습니다. 기도 준비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했을 때, 기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마귀와 싸우는 시간입니다. 기도 중에서 마귀와 싸워 이기면 실제 생활의 사건에서도 이깁니다. 기도의 생활 속에서 승리의 기쁨이 없으면 생활의 사건에서 마귀에게 져 버리고 맙니다. 기도는 영적인 영력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중요한 일이 있거든 반드시 기도 준비하고 하십시오 큰일이 있거든 특별기도 하십시오 교회 일이나 가정일 이나 단체 일이나 반드시 그렇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큰 일을 앞두고, 신경 쓰고 걱정하면서, 하나님 앞에 내놓고 기도 안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큰일은 크게 기도해야 합니다.

세째로 예수를 멀찍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왜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갔습니까 그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유대 당국자들이 볼 때에 예수의 제자가 맞는지 아닌지 모르도록 하기 위해서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그렇게 겁이 났으면 도망갈 것이지 왜 멀찍이 따라갔을까요 불과 몇 시간 전에 죽는데도 같이 가겠다 했으니, 더구나 수 제자인데 체면 유지라도 해야지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엔 그래도 다 도망갔는데 수 제자가 나를 따라오는구나. 예수님이 그렇게 봐달라고 그랬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엔 수제자 같고 모든 사람들이 보기엔 예수 안 믿는 사람 같은 것처럼 보이기를 원한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에겐 안 믿는 것처럼 맞추고, 예수 믿는 사람에겐 믿는 사람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장단을 다 충족시켜 주려 하니 멀찍이 따라 가게 된 겁니다. 이렇게 예수 믿으면 전부 시험에 듭니다. 죽고 싶어하면 오히려 살 것입니다. 겁이나서 멀찍이 따라가면 온갖 것이 다 시험거립니다. 이것도 시험이고 저것도 시험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람은 반드시 시험에 듭니다. 어디에 가든지 분명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예수쟁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알도록 공개하십시오. 그래야 나도 자신을 조심하고 다른 사람들도 아예 포기합니다.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주일날 놀러가자고 유혹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험거리도 오다가 시험이 안 되겠다고 도망갑니다. 멀찍이 따라가면 아무 것도 아닌데 시험이 되어서 남에게 한마디 들은 것도 큰 시험이 되고, 온갖 것이 다 시험이 됩니다. 멀찍이 따라가지 마십시오 바짝 따라서 나도 충성하고, 봉사해 보고, 열심히 열심히 일해 보십시오 무슨 소리를 들어도 웃고 은혜가 되지 시험거리가 안 됩니다. 남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은 모든 사람 앞에서 같습니다. 상황과 사건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요 모든 사람이 다 같지 않습니다. 내가 시험받으면 나 혼자 시험받은 줄 여기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다 시험을 받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더 큰 시험을 받습니다. 교역자도 시험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시험이 있습니다. 시험 없는 것은 없습니다. 마 6:12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주기도문에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이 말은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시험을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시험을 없애주십시오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기도를 안 가르쳤습니다. 왜 시험이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시험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험 없이 살려면 안 됩니다. 시험은 많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당합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시험에 이기게 하옵소서 이것이 시험에 대한 기도입니다. 시험을 통히여 우리의 실력이 인정받습니다. 시험을 받은 후에 성장합니다, 시험을 받은 후에 복이 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시험은 반드시 받아보아야 합니다. 시험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시험에 드는 것은 실패요 시험에 빠지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시험받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이겨야 합니다. 승리하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복이 옵니다. 반드시 시험 후에는 복이 옵니다.

그렇다면 이미 시험에 든 사람 , 시험에 빠진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베드로를 보니까 닭소리가 들려오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자 밖에 나가 가슴을 두드리면서 통곡을 하더라. 크게 울더라고 했습니다. 시험에 든 사람, 시험에 빠졌거든 해결방법은 울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나 같은 무능한 자가 큰소리 쳤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처럼 했습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알았습니다. 내 마음에 작정하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회개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 회개의 눈물이 베드로의 회개의 통곡이었습니다. 통곡하면 위로가 옵니다. 시험에 빠지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베드로가 통곡하고 하니 주의 위로가 옵니다. 시험에 빠진 사람은 주 앞에서 슬피 울며 회개하십시오. 시험에 든 것을 회개하면 위로가 오는데 사람의 위로가 아닌 주님의 위로가 우리 마음에 오는데 우리 마음이 즐겁습니다. 통곡하고 주 앞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믿고 통곡하면 반드시 위로가 오는데 놀라운 위로입니다. 사람의 위로가 아닌 주님의 위로가 옵니다. 그리고 새 힘을 받습니다. 새로운 힘이 오는데 굉장한 역사가 옵니다. 다윗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았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만 사랑합니다.'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간음죄도 지었고 살인죄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슬피울고 요가 젖도록 울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는 죄짓기 이전의 다윗보다 더 강하고 더 영적으로 능력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 큰 왕이 되었습니다. 회개하면 더 큰 능력을 체험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지은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영력이 생깁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을 체험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체험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시험에 낙방한 사람은 통곡해야 합니다. 슬피 울면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새 힘을 주십니다. 베드로가 통곡한 뒤에 오순절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밖에 나가 그렇게 비겁하던 베드로가 `너희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가 살아났다.'고 전파했습니다. 두려움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베드로가 나왔습니까 그가 슬피 울며 기도할 때 능력을 받아 가지고 그가 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험에 안 들고 시험에 잘 통과한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시험에 어쩌다가 넘어가서 빠진 사람은 베드로처럼 밖에 나가 슬피 울며 통곡하면 주의 위로와 새 힘을 받습니다. 시험을 가운데서라도 이러한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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