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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한 병과 제일 건강한 사람 (마 0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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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은 잘사는 사람을 그렇게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가난해도 웃으며 살 수 있고, 또 잠 잘자고 건강하게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의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을 제일 부러워합니다. 질병으로 인하여 걷지 못하는 사람은 한 번만 걸어 보았으면, 음식을 못 먹는 사람은 한번 마음껏 먹어 보았으면 하면서 얼마나 소원하는지 모릅니다. 건강은 모두가 갖기를 원하고 또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병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6, 7천 종류의 병이 있다고 했는데, 요사이 얼마나 많은 병들이 더 생겨나고 있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병에 한 번도 안 걸리고 신체적으로 약한 곳이 한 군데도 없이 다 건강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대체적으로 나이가 들면 신체적으로 약해지고 여기저기 아픈 곳도 생깁니다. 그러나 불치병이나 난치병에는 걸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선진국 병이라고도 하는 고혈압, 당뇨, 간염 같은 병은 미국에서도 고치기 어렵습니다. 어떤 나라에도 특별한 치료약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 걸리는 것이 약이랍니다.
또 각종 암이 얼마나 많습니까 암은 고칠 수 없습니다. 일단 걸리면 하나님의 나라에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암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어떤 장로님은 “죽을 때는 암에 걸리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너무 무서운 기도라고 생각했는데 그 장로님 말씀을 들어보니까 이해가 됩니다. 불평, 불만으로 잘못된 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교통 사고라도 당해서 회개도 못하고 하나님 앞에 급하게 불려가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암에 걸리면 3개월에서 1년 정도의 기간이 주어지니까 기도원에 가서 준비 기도하면서 원수 맺었던 것도 풀고 화해하고 갔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암이 아니더라도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금방 데려가시는 것보다는 우리에게 죽음을 미리 알려주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에 이사를 해도 준비를 해야 하고, 대학 입시도 준비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나라에도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기름과 등을 준비해서 가야지 벌거벗은 몸으로 아무것도 없이 들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육적인 병이 있는가 하면 영적인 병이 있습니다. 성경은 육의 병보다 영의 병을 더 무섭게 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고 상처와 아픔을 주는 병은 바로 영적인 병입니다. 육의 병은 치료하는 약이 있지만 영의 병은 이 땅에 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병에 절대로 걸리지 않아야 되지만 혹시 걸렸을 때에는 영적으로 치료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본문 말씀처럼 남을 비판하는 삶은 바로 암을 앓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보면 불치병, 난치병과 같이 가장 큰 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별로 아프지 않으면서 생명을 빼앗아 가고 새포를 파괴시키는 암과 같이 우리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 바로 비판하는 삶인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이 뭐 잘못이냐”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생각하고 경홀이 여깁니다. 대다수가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더 큰 병입니다.
본문 “(마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네가 비판을 받으려거든 비판하라는 것입니다.
“(약4:11)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약4: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라고 말했습니다. 네가 누군데 감히 비판하고 판단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은 영적으로 중한 병인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이러한 죄를 짓기 때문에 늘 영적인 피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은혜되지 아니하는 것은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비판은 영적으로 배경이 있습니다.
첫째, 비판은 교만한 데서 나옵니다. “내가 잘하고, 내가 잘나고, 내가 잘 믿고, 내가 훌륭하고, 내가 흠이 없다”하는 생각이 남을 비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겸손해 보십시오. 비판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비판할 리가 없습니다. 입으로 비판하는 것 같지만 그 마음에 벌써 교만이 들어앉아 있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9-14절에 나오는 바리새인도 자기의 교만한 생각 때문에 옆에 있는 세리를 비난한 것입니다.
둘째, 비판은 이기적인 데서 나옵니다. 내 마음에 안 들고, 내 마음에 안 차고, 싫어서 남을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병입니다. 성경에도 십계명 가운데 아홉 번째 계명이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입니다.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비판은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악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선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지만 악한 생각은 남의 잘못을 들추어 비난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까 예수님을 비난하고, 모세를 비난하고, 사도 바울을 비난합니다. 예수님께서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 성경에는 예수님을 나쁘게 비난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넷째, 비판은 시기하고 질투하는 데서 나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좋지 않게 보고 남이 잘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랑하는 마음, 긍휼하는 마음에서는 비판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좀 이상합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여러분, 축복받고 잘되고 성공하는 사람이 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고 부지런하고 바쁘고 행복한 사람이 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되고 속상하고 실패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늘 시기와 질투가 나오는 것입니다. 선진국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옛사람에 사로잡혀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비판은 마귀에게서 나옵니다. 사단이 내 안에 오면 나를 보는 눈은 감기게 되고 남을 보는 눈은 뜨게 됩니다. 사단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나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그러나 남에 대해서는 인색합니다. 사단이 내 안에 역사하면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나의 눈의 티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 안에 들오와 보십시오. 성령 충만해 보십시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혀서 비난이라고 하는 틈은 아무데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역사하실 때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고 도와주게 될 줄 믿습니다.

가룟 유다는 항상 비판했습니다. “(요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고 했습니다. 네 마음에 도적이 있기 때문에 넥가 훔쳐 가려고 남을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은 바로 그 마음에 악한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대로 비판하지 말아야 내 영혼이 잘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시들해지고, 기도하면서도 은혜가 되지 않고 우리의 생명이 소생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남에 대해서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들은 하나같이 비판을 나쁘게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죽을 때까지 남의 원망을 사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남을 신랄하게 비판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테일러는 “비평가라는 것은 문학이나 예술이나 실패한 사람들이 남을 비판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에스티 콜리지는 “비평가들, 그들은 살인자”라고 했으며 또 그는 “일반적으로 비평가들은 시인이나 작가가 되려고 했던 사람으로서 자기의 재능을 시험해 보고 실패했기 때문에 비평으로 전향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알프로우는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기의 약점을 가리기 위해서 비판하는 수가 많다”고 했고, 톨스토이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극복했을 때 비로소 남을 비방하지 않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자신과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비판이라고 하는, 남을 비방ㅎ는 병에서 건강을 얻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암과 같이 고침을 받기가 어려운 병이 비판하는 병입니다. 중상은 중상당하는 자보다 중상하는 자를 더욱 나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자닐 때 학장까지 지내신 교수님 한 분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자기가 비판을 많이 했더니 비판하는 사람만 찾아오더랍니다. 비판하다가는 영혼이 죽을 것 같아서 그곳에서 빠져나왔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한 일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판하면 다 죽습니다. 비판하면 친구도 없어집니다. 비판하면 당하는 사람도 나쁘게 되지만 내 자신도 말할 수 없이 나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각가지 질병이 많지만 우리는 특별히 비판하는 벼에서 건짐을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입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감사하며 남을 향하여 좋은 말로 위로도 해주고 사랑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고 했으므로 모든 사람을 향하여 긍휼을 베푸는 사랑의 입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혀는 길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다 고쳐도 이것은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이 땅을 떠날 때에야 길들여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입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입술을 성령의 화저로 지져주셨듯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여러분의 입술도 성령의 화저로 지져주셔서 입을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비판은 주로 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그래서 목사도 비판하기 쉽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목”으로 먹고 “사”는 것이 목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회도 잘못하면 하나님 앞에 비판하는 죄를 저지르기 쉽습니다.
목회자가 비판을 하면 자기도 지옥 같은 삶이 되고, 한 사람의 영혼도 바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비판으로는 좋은 양떼를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입으로 먹고 사는 언론엑 있는 분들, 목회자들, 학교에 있는 분들은 입이 살기가 쉽습니다. 사람이 많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실수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약 3:1에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으며 2절에는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지금까지 설교 시간이 비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비판을 했는지 목회자의 길은 바판하는 삶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안됩니다. 내 자신이 안됩니다.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이 괴롭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목회자의 얼굴에 웃음이 없습니다.
비판은 비판을 낳기 때문에 비판을 하면 비판의 은사를 받습니다. 모든 것을 비판의 눈으로 보면 비판할 것이 자꾸 보입니다. 또 비판하는 사람을 가까이합니다. 당연히 주변에 전부 그런 사람들뿐입니다. 결국에는 자신이 견뎌내지 못합니다.
비판하는 눈으로 보니까 가정이 안됩니다. 집에 들어가도 기쁨이 없습니다. 지금은 어디를 가도 보는 사람마다 저의 집사람을 미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저렇게 못생긴 사람이 어디 있나”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끊임없는 가정불화로 늘 집안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비판하는 눈으로 집사람을 보고, 비판하는 눈으로 아이들을 보고, 비판하는 눈으로 부모를 보니 만족함이 없습니다. 좋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가 안됩니다. 심령이 안됩니다. 강퍅하고 거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천국이 있어야 되지만 우리 얼굴에도 우리 입에도, 우리 눈에도 천국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내 눈은 독사의 눈과 같았습니다. 내 입은 뱀의 입과 같았습니다. 얼마나 남을 헐뜯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다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비판하는 사람이나 비판받는 사람이나 다 비판의 대상이지 비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니다. 성경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 앞에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버림받아 저주받은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시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14: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누가 있는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가 비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 앞에 합격한 사라미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바로 걷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전부 옆걸음질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한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땅위에 살아가고 있으면서 자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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