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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움과 떨림의 지도력 (고전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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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렇게 한국의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여러분들이 함께 모여서 교회를 생각하며, 또한 교회와 민족이 나아갈 길을 서로 나눈다는 것은 어찌보면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예루살렘 사도회의와 같은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보여주었던 주된 관심은 두가지였습니다(행 15 장). 하나는 하나님의 교회가 복음의 진정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계 선교를 지향하며 성장하고 있는 교회가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정성에 대한 물음은 소위 기득권을 지니고 있었던 사도들(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등)을 중심으로 하는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가 중심이 된 안디옥 교회의 신학을 받아들임으로 해결되게 됩니다. 이방인들도 율법준수와 할례를 받지 않고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론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통일성 문제는 예루살렘 교회가 복음의 어머니 교회임을 알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교회가 전 세계에 확장되어야 함을 안디옥 교회가 확인하게 됨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난과 기근으로 고통받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정성어린 모금운동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지닌 관심 또한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복음의 진정성의 문제로서 이 복음이 어떻게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으로 말씀으로 계속 유효할 것인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해야 우리의 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일 것입니다. 늘 그렇듯이 어떤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의도 그러했습니다. 사도행전 15 장에 의하면 이 두 교회 진영(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이 함께 모였을 때 그리 쉽게 그같은 결론에 이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 심각한 토론과 논쟁이 있었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2 절: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7 절: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그러나 다행히 그러한 토론과 논쟁은 분열과 투쟁으로 끝나지 않고, 용납과 포용으로 나아 갔습니다. 곧 논쟁 때문에 두 교회의 지도자들은 서로 갈라서게 된 것이 아니라, 논쟁하므로써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고 더불어 가야할 존재들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사도 회의를 통해 기독교 복음은 유대종교의 한 분파로 머물게 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세계종교에로의 발돋움을 가능케 했던 계기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말씀을 함께 연구함으로써 우리 교회의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이 시간 성경공부의 본문은 고린도 전서 2장 1-5 절입니다. 이 본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목회자와 설교자, 그리고 교회 지도자로서의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것은 마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영적인 열광주의에 빠져서 신비주의적 경험을 자랑하고 있고, 또한 그 때문에 서로 시기하며 분파하고, 도덕적으로는 타락의 길을 걷고 있으면서, 영적인 은사들을 서로 뽐내는 은사주의에 빠져 있는 모습들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말씀은 비슷한 위기에 처해 있는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을 먼저 생각해 보면, 바울은 제 2 차 선교 여행을 통해서 자신이 직접 세운 고린도 교회로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구두로 전한 내용과 고린도 교회의 편지를 통해서). 그것은 바울의 마음을 무던히도 상케하고 아프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아주 담대히 자신이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상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만이 그들이 지닌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합니다. 바울의 표현은 매우 직설적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바울 자신이 매우 편협한 기독교인임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은 거절하고, 오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만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폐쇄적인 지식주의를 뜻하는 것입니까 세상과는 단절하고 수도원적인 신비주의에 빠져 들어가 예수를 아는 지식만으로 살겠다는 비세상성과 몰역사적인 자기 주장을 하는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탄생, 공생애, 부활, 승천, 재림등 기독교의 중요한 여러 메시지보다 오직 십자가만을 그의 신학의 전체로 삼겠다는 의미입니까
본문의 앞 뒤 문맥을 더 자세히 읽어보면, 결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서 바울이 제시하는 그의 결심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신학도이며, 목회자이고 설교자이며 교회 지도자였던 바울이 지닌 그의 신학적 사고의 중심에로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I.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두가지 원리 가운데서 고통받고 있는 바울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래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의 인간의 문제는 욕심과 자랑에 의한 죄악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은 후에 나타나는 교회의 문제는 복음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에 발생하는 것임을 바울은 분명히 말씀해 줍니다. 즉 복음의 이해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왜곡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비단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교회에 복음을 증거한 설교자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전 1-4 장에서 바울은 교회 지도자(설교자)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을 자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들이 헛된 것을 가르칠 때에 그 업적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점검될 것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 이것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포함한 교회의 지도자, 설교자들을 향한 바울의 심판 메시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작정했다'(고전 2,2)는 결심의 뒷면에는 두 가지의 비판의식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을 아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추구가 당시의 고린도 교회의 분파와 자기 자랑과 도덕적인 타락과 영적 열광주의를 발생케 하는 요인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어리석은 자기 자랑만을 일삼는 고린도 교회, 그것도 모자라 서로 분열하고 다투며 분파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이 말로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한 다른 설교자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는 달리 그 무엇, 곧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어떤 지혜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선언했을 가능성과 현실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복음만으로는 만족하게 여기지 못하게 한 그 선포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1-5 절 사이에서 네 번에 걸쳐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지배하는 두가지 모습을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1-2 절:'인간의 말과 지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증거인가'
3 절:'자기과시와 강력함인가' 아니면 '약하고 두렵고 떨림인가'
4 절:'사람을 설득하는 지혜인가' 아니면 '성령과 능력이 나타남인가'
5 절:'사람의 지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인가'

이것은 곧 한 인간에게서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 속에서도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원리로 인생을 살 것인가에 따라 그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전자로 사는 것은 다툼과 자기 자랑과 남에 대한 멸시와 이기적인 욕망의 채움으로 표출되며, 후자로 사는 것은 감사와 나눔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 자신에게서도 내적 갈등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이 두 모습을 자신과 고린도 교회의 모습으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후자를 택하고 있으나, 고린도 교회와 그 어떤 설교자는 전자를 택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도 이 두 원리 가운데 쉽게 후자를 택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복음의 선포자인 사도 바울도 자기 자신이 이 두 가지의 삶의 원리 때문에 고통받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서야 할 자기 자신 속에도 이러한 갈등의 구조가 있음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인간의 사고와 삶을 지배하는 이 두 원리는 복음선포와 교회 속에도 서로 갈등하며 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에게 부딪친 갈등은 이런 것입니다. 헬라 문화권에서 터득한 자기자신의 말과 지혜, 그리고 수사학적인 언변으로서 복음을 증거할 것인가 아니면, 말씀의 능력만을 기대하며 복음을 증거할 것인가 자신의 훌륭한 언변과 지혜를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를 보여줄 것인가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 인간의 설득하는 말의 기술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시는 은총 때문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요 설교자이며 신학도인 바울에게도 끊임없이 이러한 삶의 원리가 내적인 갈등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원리로 살 것인가에 따라 그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지기에 바울은 매 순간마다 결단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말과 지혜로 증거한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인간 내면에 깊이 도사려 있는 자기 주장, 자기 과시, 자기 자랑의 요소가 드러남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 믿는 내가 설교 속에도 주인처럼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도 실은 자기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태도가 은연중에 교회 안에서 분파를 만들고 남을 멸시하는 자기교만을 만들며 도덕적으로 타락케 하는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II.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결단한 신학도로서의 바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음이라."(2 절)
이 말씀은 부정을 다시 부정하는 강력한 긍정의 표현입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겠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에서 우리는 바울의 의도, 곧 그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삶으로 정향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자신의 전 삶을 걸고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24). 바울은 십자가의 거리낌이 사실은 능력이며, 십자가의 미련함이 사실은 지혜라는 역설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가 드러나는 삶의 방식과 성령과 능력이 드러나는 삶의 방식이 서로 다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절에서 바울은 '나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증거하는 자 곧 자신이 주의 복음의 증거자임을 스스로 자처합니다. 그리고 2 절에서는 또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작정함'이라고 함으로써 이제 그에게는 세상의 어떤 자랑도(빌 3,4 이하) 의미가 없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3 절에서도 이제 그는 자기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기도하는 사람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사고와 판단, 그리고 행동의 중심에 오직 하나님/그리스도/성령이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2 절에 "알기로 작정했다"는 바울의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닌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그의 사랑과 관심의 대상에 대한 전폭적인 결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물을 대하는 그의 해석학적인 눈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갈 바를 알지 못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자기 자신을 맡기고 그의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날 수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결단을 상기하게 합니다. 옛 것은 내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미래에 자신의 전 존재를 내거는 결단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의 결단의 모습을 떠오르게도 합니다:"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4-15)
그러나 이러한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과 바울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구약의 사람들은 신론적으로 결단한 반면 바울은 기독론적으로 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6,14)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있어서 이렇듯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유, 곧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경험한 세상보다 더 크신 분, 자기의 삶을 바치면서 헌신했던 율법보다 더 크신 분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의 거짓 지혜와 자기 자랑을 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신비하심을 보고 있으며, 또한 인간을 위해 자기 아들을 내 놓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우주적 사랑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역설적인 지혜와 능력이 감추어져 있음을 목격했기 때문인 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통해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저 참혹한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안에 영광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시고, 인간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연약함을 포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인간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했다는 것은, 이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세상과 모든 사물을 보겠다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그의 세계를 보는 새로운 관점이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고, 교회를 보고, 사회와 국가를 보고, 그리고 자연피조물을 보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렇듯 십자가만을 알고 자랑하길 결심한 바울의 삶은 그 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습에 자신의 전 삶을 접목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는 바울이 회중들 앞에 설 때마다 "약하고 몹시 두려워하고 떨었다"(3)라고 말하는 데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와 설교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표현입니다.

III.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과 교회 앞에 선 목회자로서의 바울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3 절)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삶 전체가 매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에 접목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회중들 앞에 설 때마다 약하고 몹시 두려워하고 떨었다(3)고 말합니다. 여기서 '연약하고, 두려워하고 떨었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피조물로서의 그의 감정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선 피조물 인간의 기다림과 낮아짐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현실 앞에 선 피조물 인간의 실존적인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두려움과 떨림이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된 인간들의 삶의 실존 형태를 가리킵니다. 즉 거룩한 두려움과 겸손한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마치 불이 붙는 떨가나무 앞에선 모세의 두려움과 같은 두려움과 같은 두려움이며(출 3 장),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언자 이사야의 두려움과 떨림(사 6 장), 그리고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고기를 낚은 후 말씀이 그대로 사건이 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린 베드로의 두려움(눅 5 장)과 같은 두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 앞에 서는 겸손함과 회중과의 동참을 의미하는 '더불어'의 정신을 보여주는 으미입니다. 바울은 자기 과시나 자랑이 아니라, 회중들과 더불어 같은 마음을 갖기 원했음을 보여줍니다. 곧 그들의 고통과 연약함에 동참키 위해 스스로 연약함과 두려움과 떨림의 자리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오만하고 강력한 모습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는 사람들처럼, 두려움과 떨림으로 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스스로 고난까지도 감내하겠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만큼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순간에도 그의 교인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마음으로 서지 아니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설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가 자기 속에 나타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연약함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미련함에서 나타남을 깨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제 기꺼이 자기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하게 됩니다(고전 4,9-13; 고후 11,16 이하).
이렇듯 바울이 복음의 선포자로서, 또한 목회자로서 보여준 것은 사도로서의 자기 자랑이나 자기과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과 두려움과 떨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사도적 권위를 사용하여 교인들에게 겁을 주거나 강제적인 힘을 보여주려 하기 보다는 마음을 움직이는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지도력은 사람을 억지로 굴복시키는 힘의 지도력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케 하는 사랑의 지도력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의 지도력은 공동체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자리에 동참하려 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IV. 말씀 선포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설교자로서의 바울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4 절)
그렇다면 바울의 말씀 선포 속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쉽게 떠오르는 것은 그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것은 성령과 능력이 설교자의 말씀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말합니다('성령의'의 속격은 목적을 지칭하는 속격이 아니라 주격적인 속격이다). 즉 성령이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는 주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말씀 자체가 지닌 역동적인 능력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선포되면 성령이 원하시는 사건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설교자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 자체의 능력이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즉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을 통해 삶의 구체적인 변화와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이것은 마치 사 55 장에서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안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10-11 절)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낸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에 비추어 오늘 우리의 설교에 있는 문제를 본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설교의 가현설이라고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나타난 적그리스도의 이단은 육체로 오신 예수를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또 하나의 가현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바로 설교의 가현설입니다. 영지주의의 옛 가현설이 예수의 역사적 실체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을 역사와 창조의 주님이라는 자리에서 저 하늘에 가만히 계시는 분으로 가둬버렸다면, 오늘 우리는 설교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건으로 나타나게 하지 않은 채 다만 소리로써 머물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설교가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선포자가 성령의 언어를 먼저 깨닫기 전에 자기 지혜로 설교를 하려함으로써 자기 언어를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수사학적인 언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인간 지혜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교자는 그의 설교 속에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선 선포자가 성령 앞에서 자기의 말의 지혜를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 앞에서 자기 침묵을 배우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 앞에서 선포자가 침묵을 해야 하는 이유는 성령께서 이 세상의 말을 침묵케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자 안에서 만드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선포자가 말씀 앞에 절대 침묵하기를 시작할 때 성령께서는 비로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도 이 침묵으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음 증거의 사역이란 오직 성령의 능력과 역사만으로 가능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그것을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갈릴리 나사렛 회당에서 공식취임 설교를 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셔야 했고, 이어 성령에 의해 광야로 내쫒김을 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막 1,9-13). 그 분은 버려진 광야에서 금식하며 절대 침묵의 시간을 가지시며 성령의 언어로만 살아야 할 것을 확인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취임설교의 첫 시작에서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눅 4,18).

이렇게 선포자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침묵을 배우지 않으면, 그는 본문을 통해 성령의 말씀하심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자기의 언어를 개발하는 데 주력하게 될 것입니다. 듣는 것도 없이 선포를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선포자는 머지않아 절망과 탈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선언해야 하나, 선포자의 내면 깊은 곳에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하나님 부재의 상태라고 할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말하는 설교의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말씀을 선포한다고 하나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는 말하는 법이 아니라 듣는 법을 배움으로 시작된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 선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으면서 단지 그것을 인간의 문자/언어로 나열해서 선포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지혜로운 말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IV. 신앙공동체를 늘 기억하며 섬기는 지도자 바울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난 후 곧 신앙공동체의 중요성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이웃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형제들아...너희에게 나아가(1 절)...너희 중에서(2 절)...너희 가운데(3 절)...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5 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형제들이여"(1 절)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이 그와 함께 하나님의 가족에 함께 참여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형제들이란 바울이 예수님에게서 배운 어휘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둘러 모인 민중들을 향하여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4-35)라고 하시며 새로운 가족개념과 형제개념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 속에서 그렇게도 '형제/자매'라는 말을 친근하게 자주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계속해서 "내가 '여러분 중에' 있을 때"(2 절)/ "'여러분에게' 나아 갈 때에"(3 절)라는 말 가운데 공동체를 향한 바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늘 그의 마음에 공동체가 들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안에 있기를"(5 절) 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공동체를 관심하지만 그 공동체가 자기 자신과 연결되기 보다는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하나님만이 모든 능력의 주인되심을 선언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바울이 보여준 영적 지도력은 자랑과 자기과시가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과 떨림의 지도력이었습니다. 강제적인 힘의 지도력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사랑과 겸손의 지도력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의 힘과 권위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복종의 지도력이 아니라, 교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참여케 하는 순종의 지도력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자리에 동참하는 모범을 보이는 지도력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4,16; 11,1)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IMF라는 경제적인 위기를 통해 지도력의 부재에 대한 뼈 아픈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적 지도력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마음을 상실함으로 말미암아 생긴 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말씀을 통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영적인 지도자라고 자부하는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을 알기로 작정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님과 교회 앞에 서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로 교회와 사회 앞에 서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다시금 결단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울처럼 '두려움과 떨림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작정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를 통해 말씀하시고 일하실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는 말씀 앞에서 바울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말과 지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증거인가'
'자기과시와 강력함인가' 아니면 '약하고 두렵고 떨림인가'
'사람을 설득하는 지혜인가' 아니면 '성령과 능력이 나타남인가'
'사람의 지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인가'

마지막으로 바울의 마음으로 다시 써본 고린도 전서를 읽어보겠습니다.

1. 고린도시에 거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기쁨으로 만났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 때에 나의 관심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인 복음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삶의 전체 목표였고, 또한 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증거할 때 마다 늘 생각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설교가 나의 배운 언어의 뛰어난 구사력이나, 수사학적인 틀로만 전달되어 복음이 바르게 전달되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근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말과 지혜의 뛰어남으로 나아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전달되지만 그 언어를 늘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2.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으면서 가졌던 생각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증거하고 가르치며 그분을 통해서 받은 삶의 방식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삶의 기반이며, 또한 나의 사고와 행동을 가능케 하는 해석학적인 관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 그것도 십자가에 달린 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느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을 꿰뚫고 바라볼 수 있는 사고와 판단의 중심으로서의 십자가에 달린 분에 대한 나의 결단인 것입니다. 곧 나의 생각과 언어를,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한 판단과 행위를 오직 그분을 중심으로 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3. 여러분은 여러분과 함께 있었던 나의 모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가진 삶의 태도는 늘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연약함이었습니다. 실제로 나는 늘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하여 복음을 증거할 때마다 나를 둘러싼 여러 고통스러운 일들이 나를 늘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 연약함 속에 하나님의 강력한 힘이, 나의 두려움과 떨림 속에 하나님의 거

룩함과 위대하신 능력이 나타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4.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칠 때마다 이런 역설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늘 경험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지혜나 설득하는 수사학적인 언어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설득하는 힘이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오히려 더 감추어짐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자로서 나의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과 능력이 나의 말씀을 통해 나타나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령과 능력이 주체가 되시어서 그분 스스로 나의 언어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5. 이 모든 나의 생각과 노력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와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연유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현재 모습은 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장로교 4 개 교단 목사님들을 위한 새벽 성경연구/설교(98년 6월 소망기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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