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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0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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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라는 것에는 상당한 허영이 있습니다. 사실 옷은 나 자신에게 보이기 위 하여 입는 것아 아니지 않습니까 나 자신보다 오히려 남을 위한 것이라는 데 에 옷의 의미가 큽니다. 저 자신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목사 된 탓에 할 수 없 이 제가 넥타이늘 맵니다만 한창 더운 여름에는 이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고 목사 까운을 입으면 한증막에 들어 온것 갑습니다. 이것이 봉사입니다. 사실 굉 장한 봉사입니다. 내가 입은 옷은 어차피 내가 보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단 정한 옷차림이라는 것이 나 자신한테는 얼마나 불편합니까 앉고 서기가 얼마나 거북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남에게 불쾌감을을 주지 않기 위해서 옷을 단정하게 입어야 합니다. 다 남을 위한 봉사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이것 이 잘못되면 지나친 허영, 쓸데없는 관심으로 흐릅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 아줄까 하는데에 너무 신경쓰고 그것에만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평판 과 명예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지나쳐서 허영으로 거짓으로 위선으로 빠지게 됩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에 대한 오해들이 있습니다.

1)삶을 진지하게 대하지 말라고 하신 아닙니다. 예수는 어떤 사람도 그보다 더 진지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는 그의 강렬한 진지성 때 문에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우리가 진지해 지기를 바라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삶에 대하여 무덤덤한 태도로 사는 것을 걱정하 십니다. 영혼의 흙이 너무 얕아 정작 해야 할 걱정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 습니다.

 2)생각하는 생활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내일 일을 위하 여 염려하지 말라."(마6:34)고 하셨을 때 앞날을 생각하는 것을 금하신 것이 아 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내일 일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 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한"(히12:2)분이었습니다. 주님께 서 자신이 내일을 생각하셨기 때문에 참고 견디셨으니 그를 따른 그리스도인들 도 이와 같이 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불안한 생각 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애타 하고 안달하는 불안한 자세가 아니라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내일 일을 대할 것을 바라십니다.

 본 론

1.<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필요한 이유

1)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인이야 어떻든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염려에 빠져있습니다. 아는 것이 부족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염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아는 사람에게 염려할 일이 더 많습니다. 연세 많은 분들은 염려가 많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도 염려가 있습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세상에서 살아야할 세월이 너무 많아서 걱정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믿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온갖 사람들이 다 염려에 빠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 이 다 염려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온갖 일에 대하여 염려하고 있 습니다. 교인은 목회자를 염려하고 목회자는 교인을 염려합니다. 결혼한 것 때 문에 염려하고 결혼하지 못한것 때문에 염려합니다.

그러나 지금 염려하고 있는 일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며칠 동안 걱정하는 일이 있었다면 적어도 75%내지 90%는 아직 일어 나지도 않았거니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데 사람들은 시기가 가장 나쁜 때에 가서야 염려합니다. 시간에 여유가 있을 때, 가지고 있는 염려를 다 해버린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염려는 일이 힘들고 짐이 무거워질때까지 기다렸다가 나타납니다. 꾸준한 신경과 명석한 머 리를 써야 할 필요가 가장 많은 때가 이르러서 염려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염려할 일 때문에 처한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없게 됩니다.

 2) 염려해 보아야 아무 쓸데없기 때문입니다.

 "너희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작은 키를 염려 한다고만 하여 키가 커질 리가 없습니다. 분주히 살고는 있습니다만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염려하는 일보다 더 쓸데없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염려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주는 법이 없습니다. 염려가 우 리의 짐을 덜어 주지 못합니다. 염려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염려가 우리의 주름살을 펴주는 법이 없습니다. 염려는 다만 주름살을 늘게 해 줄 뿐 입니다.

 염려해서는 아니 될 일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1)자신의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해서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할 수 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나 피할 도리가 없는 일이라는게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한 그런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중력의 법칙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력의 법칙과는 시비하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 다. 이유는 중력의 법칙이 우리와 시비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력 의 법칙을 무시하고 높은 곳에서 무작정 뒤어 내리면 크게 해를 입습니다. 그 러므로 이런 자연의 법칙은 염려를 하지 말고 그냥 받아 들여야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나이를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 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 보아야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분의 나이를 짐작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늙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작년만큼 올해도 많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젊어서 하신 일 만큼 나이들어서 할일도 준비하고 계십니다.

 (2)우리 힘으로 해 낼 수 있는 일입니다.

일에 몰두하여 염려할 시간이 없게 해야 됩니다. 겨울철 한밤중에 일어나 한기 를 느끼고 2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담요가 있는데 일어나 담요를 가져오지 않 고 여러분은 그냥 제 자리에 누워 나머지 밤을 염려로 새웠다면 염려로 따뜻해 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염려만 지독하게 하였을 뿐입니다. 염려란 그 자체만 으로는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3)염려는 너무나 해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려처럼 비생산적인 것이 없습니다. 염려처럼 파괴적인 것이 없습니다. 염 려는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염려는 염려하는 사람에게 해를 끼 칩니다.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을 헤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이 염려는 많은 병의 원인입니다. 염려로 인해 악화되지 않은 병이 없을 정도입니다. 염려 는 염려하는 사람을 해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나븐 영향을 줍니다.

하루 온 종일 일터에서 기분좋게 일한 후에 저녘 무렵에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

식탁을 대하여 모든 염려를 쏟아놓아 자기 자신들 이외의 다른 식구들의 밥맛을 잃게 하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염려하는 일이 많아 남편과 아이들이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불만만 털어 놓는 아내들도 있습니다 염려하 는 사람은 자신에게 짐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짐이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 다도 염려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님에게 실망을 안겨 드립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그의 친구들에게 고통스럽고 놀라운 시선으로 얼마나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셔야 했습니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는냐"

2.염려를 제거하려면 1)효과없는 두 가지 방법

이상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면 염려를 하지 않으리리고 하는 방법인데 이 런 치료법은 백이면백 실패하고 맙니다. 이 치료법이 실패하는 첫번째 이유는 이상적인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둘째는이상적인 상황이 존 재한다 하더라도 그 이상적인 상황에 처하지 못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세 번 째 이유는 이상적인 상황이 존재하고 그 이상적인 상황에 처할 행운을 얻는다 해도 우리는 이 이상적인 상황을 뒤죽바죽으로 만들어 놓아 버릴 것이라는데 있 습니다.

이상적인 상황에 처함으로 염려를 극복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염려를 안하 겠다고 겸심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 결심이 대단하면 할수록 더욱 절망적으 로 염려를 하게 됩니다. 단호한 결심 이외에는 염려병을 치료하는 달리 더 좋 은 방법을 찾지 못함으로 해서 자기의 결단으로 안되는 것이 있음을 알고 자기 의 능력을 불신하고 심리적 포기 현상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2)좋은 방법 1)염려병은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염려병을 지니고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훌륭한 성인이나 노련한 인격자라면 그 이유는 여러분이 태어날 때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 아닙 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연습과 연습을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염려하는 일이 많다면 그것은 염려하는 일을 거듭 연습했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얻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익혀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염려는 버릴수가 있습니다.

 2)염려를 극복하려면 양심과 친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인간은 각자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평화로우려면 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난히 할수 있는 것 같은데 언제나 실패 감과 도덕적으로 침몰감을 느끼게 됩니까 만일 그렇다면 악의 없는 것으로 보 인다 하더라도 중지하지 않는 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 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악 한 자에게는 ....평화가 없다."고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양심 과 싸우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한 우리는 결코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습니다.

 3)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면 생각의 방향을 재조정해야 합니다.

가끔 좋게 여기는 일들을 생각해야지 나쁘게 여기는 일들을 생각해서는 안됩 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 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으십시 오"(빌4:8)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맹목적인 낙관주의를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닙 니다. 비현실적인 낙천주의자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처한 형편에서, 우리가 다니는 교회에서, 우리가 사귀는 친구들에게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 가운데서 추한 것과 무섭고 역겨운 것만 보지 말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찾는 건강함을 지니도록 우리에게 권하고 있 습니다. 염려를 극복하려면 우리는 추한 것과 더불어 아름다운 것도 보아야 합

니다. 우리는 항상 어둡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밝게도 생각하여야 합니다.

 3.염려병을 치료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새들에게 필요한 것을 보살펴 주시는 아버지 하 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실 것으로 의지하고 인내심을 주 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보살펴 주시는 것을 깨닫고 모든 걱정을 주님 에게 맡겨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버릇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여 여러분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 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빌4:6)베드 로가 얼마나 많은 염려속에서 살았는지 아십니까 베드로는 다정다감하고 성질도 급한 다혈질의 청년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염 려도 많았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는 파도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배가 파선될까봐 염려를 했고 17장24절에서는 예수님이 가난해서 세금을 못낼까봐 염려를 했습니다. 요한복음13장24절에서는 예수님을 누가 팔것인가가 그의 걱정 이었습니다. 이렇게 걱정과 근심속에 사로잡혀 평생을 살던 베드로는 마침내 그 주님을 만나고 성령님의 다스림심에 의해서 그의 인격과 삶이 변화되기 시 작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인생의 석양에서 성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쓰 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라 이는 저 가 너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이것이 그의 평생을 통해서 배웠던 삶의 진리였습니다. 당신의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십시오 주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권고하십니다.

(예화) 어느 비행사가 이런 일을 경험하였답니다. 두 시간 가량 비행을 한 후 그는 기체에서 나는 소음을 들었으며 곧 이 소음이 쥐가 무엇을 갉아 먹는 소리임을 알았습니다. 그의 비행기가 착륙하고 있는 사이에 쥐가 기체내로 들어 와서 그의 비행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쥐의 날카로운 이빨이 정밀한 기체를 얼마나 갉아 먹을지를 몰라 그는 몹시 두려운 생각에 잠겼습니 다. 처음에는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떠나온 지점으로 되돌아 그는 데도 두 시간이 소요되고 앞으로 착륙할 지점에 도착하는 데도 두 시간이 소요되는 그런 위치에서 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는 쥐는 설치동물이기에 높은 곳에서 적응력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이 사실을 상기한 비행사는 비상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1천 피트 상공으로, 또 1천 피트 상고으로, 이런 식 으로 상공을 비상하여 고공 2만피트 높이로까지 올라 갔습니다. 그러자 쥐가 갉 아 먹는 소리가 멈추었습니다. 두 시간이 조금 지나 후 그가 다음 착륙지에 안 전하게 착륙하였을 때 기체의 구멍에 쥐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염려는 설치 동물입니다. 염려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비밀스러운 곳"에서는 살수가 없습니다. 염려는 기도로 생기가 도는 분위기에서는 숨쉴 수가 없습니 다. 그러므로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 맺는 말 +-+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중요한 것은 음식이나 옷이 아니라 목숨과 몸이라는 말씀입 니다. 여러분,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음식과 의복따위는 도무지 염려할 것이 못된다고 합니 다. 아니 염려 자체를 부정하십니다. 어차피 염려는 염려로 끝날 뿐, 염려해 보 아야 별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키를 더 크게 할 수도 없고 더 오래 살 수도 없고 더 건강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염려란 어차피 무효 한 것이요, 비본질적인 것이기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먹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셔야 입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셔야 영광도 행복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 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예화) 어느 보험회사 직원이 나이 많은 어른을 따라다니며 생명보험을 들라고 했답니다. 드십시오,드십시오 하니까 그 어른이 묻더랍니다. "그래,그 생명보험에 들면 내가 안 죽소 "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후에 다른 사람이 도움을 받게 되지요" "그렇다면 생명보험이라는 것이 내 생 명과는 아무관계가 없구만" 생명보험--알고 보면 참으로 맹랑한 것입니다. 남 을 위하여 내 목숨을 거는 것이 생명보험입니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집안에 풍파가 일어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그 나이든 어른과 보험회사 직원이 생명보험에 대하여 이렇쿵 저러쿵 몇마디 주고받다가 나이드신 분이 말했습니 다. "정 권한다면 내가 그 보험에 들어 줄 터이니 자네도 내가 말하는 진짜 생 명보험에 들게." 그게 무엇입니까 "하늘 나라 생명보험일세." 생명과 관계없는 생명보험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와 관계가 되는 생명보험, 그 참 생명보험에 들라고 말해서 그 청년을 전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물리학자 아이잭 뉴턴을 세상을 떠날 때에 그만 건망증이 생겨 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자기 나이도 생일도 다 잊어버리고 친구 나 후배들이 찾아와 인사해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 천재적인 물리 학자가 가깝게 지내온 사람들한데 조차 "자네 누군가" 하고 물었더니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한번은 누군가가 하도 답답해서 뉴 턴에게 물었답니다. "선생님, 다 잊어버리셨으면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 엇입니까" 이때 뉴턴은 두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그의 대답이 참으로 감동적입 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나의 구주시라는 것, 이 두가지를 기억 하고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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