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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백성을 보시는 하나님 (출 03:6-9, 살전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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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우리 모두가 부활의 기쁨이 충만하시 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현재적 계획과 섭리에 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제적 부활을 체험하는 것은 중요한 신앙생활의 면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의 요건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직접 체험하는 것은 일꾼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모세의 전기 40년은 애굽에서 학술 을 익혔습니다. 중기 40년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만났습니다. 후기 40년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였습니다. 스티븐 아터번과 데이빗 스툽이 쓴 '영성회복을 위한 일곱 가지 열쇠'란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세는 나이 40세 때에는 문제를 보았으나 80세에는 하나 님을 보았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문제를 보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세상을 보는 것보다 중 요합니다. 이것이 일꾼의 조건입니다. 바울의 소명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요건 때문에 가능했 습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완전히 굴 복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그는 "만삭되지 못한 자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다"고 고백 합니다. 다른 사도들의 소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불렀고 예수님을 만났고 예 수님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십니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며, 가족의 하나님이시며, 언약의 하나님이십니 다. 이 하나님 앞에서 모세는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가리웠다는 것은 '숨기다' 혹은 '감추다 '의 뜻입니다. 신을 벗음과 같은 경외와 존경의 표시입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로 뵈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웠다 고 합니다(왕상 19:13). 이사야 6:2에는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 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라고 합니다. 천사들 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모습을 가리우는 것은 피조물의 생래적 태도입니다.

 첫째, 보시는 하나님 성경은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라고 합니다. 이것은 '의인법'입니다. 하나님을 사람 처럼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입니 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도 그렇게 보고 계십니다. "보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아입니다.

꿰뚫어지게 보고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신다는 생각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은 하나 님의 백성의 고통을 잠시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나 홀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위에서 우리를 보시니 얼마나 잘 보이겠습니까 요즘에는 수천 킬로 상공에서 인공위성으로 사람의 움직임도 다 보고 있다고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눈에 안보 이겠습니까 9절 말씀에 다시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계속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이 얼마나 밝은지 아십니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 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라고 합니다.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라고 합니다. 계시록 1:14에는 "그의 눈은 불꽃같고"라고 하였습니다. 무서 운 눈으로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계십니다.

 둘째, 들으시는 하나님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듣고 계십니다. 또 다 시 의인법이 나옵니다. 9절에는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라고 합니 다. 하나님의 들으심을 반복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귀가 백성에게서 닫힌 적이 없습 니다. 하나님의 열린 귀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시편 34:15에는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보 고 듣고 계십니다. 복음성가의 한 구절을 들어보세요.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 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 라". 우리의 작은 경험에서 볼 때도 하나님은 얼마나 귀가 밝으신지 모릅니다. 모든 것을 다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께는 농담도 못합니다. 농담으로 해도 다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또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보혜사이십니다. '보혜사'라 번역된 말은 웹스터 사 전에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은 보혜사가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보 혜사는 상담자입니다. 내 말을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조언자입니다. 갈 길을 인도하시고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대변자입니다. 구하는 것을 대변해 주시는 변호사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듣고 인도하십니다.

 셋째, 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그 우고를 알고"라고 하셨습니다. '알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입니다. 야다 란 지식적,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뼈저리게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 님은 우리의 고통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동참하여 아픔을 아십니다. 왜 예 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인간의 고통을 체험적으로 아시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히브 리서 9:22에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의 근본 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omniscience).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시편 139편은 하 나님의 전지성에 대하여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에는 "주께서 나의 일어섬을 아 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모든 행위를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 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6절에는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 이다"라고 하나님의 지식의 높음과 인간의 지식의 낮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 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었습니다(마 10:30).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 님은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그렇게 알았습니다. 떨기나 무에서 하나님을 보았고, 부르시는 것을 들었고, 애굽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 었던 것입니다.

 넷째, 인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내가 내려가서 인도하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십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백성들을 인도하시려 이 땅에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인도하여'라는 말은 히브리어 로 알라인데 '오르다', '회복하다', '고무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이 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9절 말씀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절 말씀입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제란 말은 '이제부터'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울분입니다. 백성을 구원하시 려는 하나님의 단호한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경륜의 때가 찬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 원의 주권적 경륜의 때가 가장 두드러지는 구획선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일입니다. 카 를로 카레토는 '사막에서의 편지'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주신다. 즉 자신의 영, 현존, 출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출현하셔서 직접 내 려오셔서 인도하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들을 위하여 선택한 땅 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가나안의 풍요함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가나안에 는 젖과 꿀이 흘러서 끈적끈적 하겠다고 합디다. 젖은 목축의 번영을 의미합니다. 꿀은 농업 의 번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려고 하신 땅은 가나안의 7족이 살 고 있던 땅이었습니다. 이 땅은 그냥 얻는 것이 아니라 공짜가 아니라 힘겹게 얻는 땅입니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우리를 인도하실 땅은 빈땅이 아닙니다. 그 땅을 얻는 수고는 항상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8절)라고 하셨 습니다. 그런데 10절에는 모세에게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을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고 했으면 하나님이 인도하시지 왜 모세에게 인도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내가 인도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 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지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의 설교를 보세요.

신명기 1:33에는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 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고 하십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인도는 명확했습니다. 그리고 평안했습니다. 그들을 인도하던 모세가 보이지 않았을 때에 백성들은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광야에서의 인도는 그들에게 생존이 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을 삼촌의 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40년의 광야생활에서 꾸준히 인도하셨습니다. 별을 통하여 박사들을 베들레헴 아기 예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인도하여 많은 고기를 잡게 하였습니다. 피어슨이란 분이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간 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 간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간다. 지난 20년간 내 인생의 기도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런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빕니다.

 결론 하나님이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고,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 여 내시기 위함입니다. 구속은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구속받는 것이 하나 님의 목적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고 인도하 셨습니까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구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고, 인도 하십니다. 왜요 구속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잠시도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작은 소리도 들으십니다.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인도하십니다. 그 옛날 하 나님은 모세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사람을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고통을 보고, 듣고, 알고 인도하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셔서 구속하십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내려오셨습 니다. 그후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직접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완성하셨습니다. 이 구속을 완성시키려고 부활하신 주님 을 찬양합니다.

 이 한 주간도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 가운데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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