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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신앙의 증거 (행 0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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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도 한 명이 주민 모두가 천주교를 믿고 있는 한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 니다. 선량한 천주교도인 주민들은 모두 다 그를 따뜻하게 환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독실한 천주교도였기에 그들의 교리에 따라 금요일에는 붉은 고기인 쇠고기를 먹지 않 았습니다. 때문에 새로 이사 온 개신교도가 금요일에 스테이크를 바베큐로 구워 먹기 시작 하자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 하고는 그를 찾아갔습니다. 한참을 얘기한 끝에 개신교도는 천주교로 개종하기로 하였습니 다. 다음 일요일에 개신교도는 신부를 만났습니다. 신부는 그에게 성수를 뿌리면서 말했습니 다. "너는 개신교도로 태어났노라. 너는 개신교도로 자랐노라. 하지만 너는 이제 천주교도이 니라." 다음 금요일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생선 요리를 먹으려는데 그의 집에서 쇠고기 굽는 냄새가 또 풍겨왔습니다. 그들은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천주교로 개종한 개신교도는 마당에서 쇠고기에다 캐챱을 뿌리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너는 소로 태어났노라. 너는 소 로 자랐노라. 하지만 너는 이제 생선이니라." 여러분, 신앙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는 신앙이란 종교 기관에 하나쯤 가담하여 그 종교가 요구하는 것을 행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아니, 그건 신앙을 신앙 되게 하는 한 방편은 되겠지만 신앙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면 대체 그 신앙과 종교라는 것은 서로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본질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종교는 오직 기독 교 하나뿐입니다. 이미 7영리에서 대개 배우셨기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종교의 시작 자 체가 신적인 접근 방식과 그 방향이 아니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발이 신 본적인 토대 위에 서 있으며, 신 쪽에서 먼저 그 자신을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계시 하고 인간이 그것을 우러러 믿을 때 마침내 종교와 신앙이 성립될 수 있기에, 그렇다면 기 독교 외에서는 모두 인본적인 것에서 시작되므로 신앙이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세계 4대 성인을 보십시다. 예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석가를 숭상하는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입니다. 공자의 유교는 윤리이고, 소크라테스는 사상의 범주에 넣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만이 진정한 종교요, 여기에 신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학문적인 분류로 위의 몇몇 가지를 종교의 범주에 넣어 말하더 라도 같은 종교라고 생각하는 착오가 없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종교학적으로도 세상에 있는 그 잡다한 여러 가지를 모두 동등한 수준의 종교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고등 종교와 하등 종교가 있습니다. 그 두 가지를 나누는 기준이 있는 데, 그것은 그 종교에 진정한 '자기 부정'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굿하는 무당에게 도 '자기 부정'이 있습니다. 굿을 할 때에는 그들은 절대로 부부관계를 갖지 않습니다. 자신 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늘 목욕재계하고, 소위 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것 들을 절대로 만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하는 '자기 부정'이란 자기의 목표를 달성 하기 위한,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일시적인 행위로서 진정한 의미의 '자기 부 정'은 아닙니다.

종교학에서 고등 종교의 '자기 부정'이란 영원한 가치를 위한 자기 욕망의 부정을 말합니다.

그 종교가 추구하는 진리를 위해 인간의 욕망이 부정되고 있다면, 그것은 고등 종교의 범주 에 넣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나 유교, 회교 등등을 사람들은 종교학적으로 볼 때, 기독 교와 더불어 고등 종교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등 종교에서 '자기 부정'이 희석되어질 때, 좀 더 나아가서 사라지게 될 때, 그 종교는 결국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에서 구원받기 위해 종교가 존재한다면, 이제 그 종교가 타락하니 대체 이 노릇을 어쩔 것입니까 [예화] 미국, 영국, 이탈리아, 한국 사람에게 파란 낙타를 가져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답니다. 그러자 미국 사람은 얼른 생명공학 연구소로 뛰어 들어가서 현미경을 드려다 보면서 어떻게 하면 DNA를 조작해서 파란 낙타 를 만들 것인지 연구했답니다. 영국 사람은 대영박물관과 왕립도서관으로 달려가 파란 낙타 에 관한 고대의 유물과 문헌부터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탈리아 사람이 가 장 빨리 파란 낙타를 몰고 왔습니다. 시장에서 하얀 낙타를 사서 파란색으로 염색한 것이었 습니다. 과연 한국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요 푸른 머리띠에 크고 작은 플래카드를 들고 전 부 여의도 광장에 모여서 요란한 구호를 외치고 북을 치면서 한바탕 궐기대회를 하고는 아 무 소득도 없이 사라졌답니다. '파란 낙타를 잡아라, 잡아라!' 그렇습니다. 구호를 외치는 것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배고픔과 목마름의 증거입 니다.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배고프다고 아무 것이나 먹을 수 없고 목마르다고 무엇이든 마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행복은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 회는 다 목마르고 굶주려 있으며, 갈급해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과거 88 서울 올림픽 때 입장권을 구입하는데 100대 1이 넘더니 그로부터 10년 후에 우리는 경제에 허덕이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태지가 컴백 공연하는데 그 입장 권을 사려고 서로 밟고 밟히고 난리였다고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2002년 월드컵의 로열 박스 특별석이 5000만 원을 홋가할 것이랍니다. 그도 그럴 것이 냉장고, TV, 소파 등, 그리 고 언제나 부르면 달려와서 시중들 웨이터들이 대기하는 자리이니 안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지금 예매 신청이 쇄도하고 있답니다. 또 한 쪽에서는 건당 3000원을 벌겠다고 고급 망원 카메라를 숨겨 놓고 일은 하지 않으며 교통법규 위반 차량을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습 니다.

사람들이 다 굶주려 있습니다. 대기업도 배고프고 중소기업도 배고픕니다. 근로자는 근로자 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아우성입니다. 약사도, 의사도, 환자도 다 죽겠다고 난리입니다.

그래서 서울역 앞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고수부지에서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 입니다. 그 속에는 기독교 인구도 다수 있습니다.

'아간'은 물질에 배가 고팠고, '압살롬'은 권력에 목말랐습니다. '삼손'은 여자에, '발람'은 탐욕에, '롯'은 부동산에 목말라서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갔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하나같이 망했습니다. 왜입니까 '자기 부정'이 사라진 타락한 신앙 때문입니다. 도대체 예수를 믿어 도 제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주님을 따라다니기는 했지만 자기 욕망 달성이 그 목적이요, '자기 부정'은 생각도 못한 형편이었습 니다. 신자가 자기 부정이 없으니 결국 주를 부정하게 되고, 그래서 그들은 뿔뿔이 도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릅니다. 그들은 그 무섭던 공회 앞에 당당합니다. 당당할 뿐만 아니라 그들 에게 예수를 전하고 있습니다. 속된 말로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들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 를 위해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들입니다. 왜입니까 죽어도 다시 살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 입니다. 주를 위해 죽는다면 주와 함께 다시 살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부활 하시므로 그걸 입증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41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는 그 일이 왜 신자에게, 왜 우리에게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이 주를 위하여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왜 기쁜 일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 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 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먼저 우리가 알 것은 신자가 비록 세상에 속해 살고 있기는 하나 그의 생애가 세상이 추구 하는 대로 살도록 부름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 니라는 것은 세상에서 살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다르고, 세상이 평가하는 것과 우리가 평가하는 것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세상을 불성실하게 살자거나 외면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이 추구하는 것, 주님께서 가치 있고 영원한 진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 눈앞 세상의 헛된 것들을 구하는 삶과는 전혀 함께 하지 말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거기엔 당연히 단련이 있고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받는 욥은 욥기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그리고 결론을 이 렇게 맺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단련을 통하여 듣는 신앙에서 눈으로 보는 신앙, 부활의 주님을 뵙는 신앙, 부활 의 목격자로서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역으로 잠시의 능욕은 눈으로 보는 신앙 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신자에게는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 까 만일 주님께서 여러분 중 어떤 분에게 '너, 일년만 어려워도 꾹 참고 있어. 그건 네가 내 편이며, 내가 내년에 다시 와서 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야' 라 고 하신다면 그는 그 1년 동안을 어떻게 살 것입니까 당연히 욥처럼 할 것이지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어떻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능욕을 받을 때에 기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신앙의 진전, 주께 서 요구하는 수준, 그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크기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자리 로 가는 이 일 때문에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그 고난이, 그 능욕이 세상이 우리를 반목하기 때문에 또는 내가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하는 훈련 때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서 맞는 고난은 그걸 통해 주께서 누군가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기 위한 '복의 근원'의 통로로 준비하신 것으로 오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 '나는 이 고난을 극복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 다, 또는 이 고난을 통과하고 나면 내가 정금같이 될 것이다' 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 고, 내가 이 능욕을 받아야 하는 이유 속에는 하나님께서 내 이웃들, 아직도 주를 모르고 흑 암의 권세에 잡혀있는 그들에게 베푸실 은혜와 긍휼이 있는데, 그 것을 오직 나를 통해서만 이루실 계획이 따로 있다는 의미입니다.

'주의 이름을 위해 사도들이 능욕 받는 일을 준비하셨구나. 우리 생애에 이런 것을 준비해 놓으셨구나. 그 일을 나보고 하라고 그러시는구나.' 좀 더 쉽게 말하면, '그분이 연출자이신데 나로 그분의 작품을 이루기 위해 미리 각본에 비록 힘들긴 하지만 그 능욕 받는 일의 배역을 맡도록 준비하셨구나' 하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 일은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드라마에서 그분의 말 할 수 없는 은혜와 자비와 지혜와 능력으로 준비하신 것이요, 그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자 비하심과 사랑의 산물이란 차원에서의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그리고 이어 5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 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신자에게 시험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이요, 그걸 기뻐하 라는데 지혜가 없어서 이해 못하겠거든,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깨닫게 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화] '헤르만 헤세'의 작품 가운데 '어거스터스'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어거스터스'가 탄 생되었을 때 이상한 노인이 산모를 찾아와서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는 뜻으로 이 아이를 위 한 소원 하나를 이루어 주겠소. 그 소원이 무엇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대답하 기를 "이 아이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고 했습니다. 그 후 '어거스 터스'는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부모도, 친구들도, 스승들도, 그를 만나 는 사람들 모두가 '어거스터스'를 사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많은 사람의 사랑에 취하여 갈 수록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사랑만 받을 줄 알았지 전혀 남을 사랑할 줄을 몰랐습니다. 마침 내 그의 말년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외롭고 쓸쓸한 노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그 노인이 다시 그를 찾아와서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지 그 소원을 들어주겠소" 라고 말했습 니다. 그때 '어거스터스'는 서슴없이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이라는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너 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명령하시며 그에게 한 약속을 주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여러분 깊이 생각하십시오. '네가 복되게 살리라' 가 아니고 '네가 복의 근원이 되 리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너 자신도 행복해야 하겠지만, 너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복을 받 으리라.'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나, '복의 근원'의 나를 만들 기 위하여 하나님은 나로 고난을 감수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오늘 사도들을, 그리고 우리들을 합당한 자로 여기셨다는 말 씀입니다. 여기에 이의 있으십니까 아니요, 이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신앙인으로 당하는 모든 고난과 능욕에서 여러분이 처신하 는 행동들, 거기서 겪는 여러분의 신앙적 갈등과 아픔, 그리고 흘렸던 그 많은 눈물이 절대 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께서는 세고 계십니다. 네가 그때 이 일로 인하여 고민했었고, 이 일로 인하여 눈물을 흘렸느니라. 그때 네가 이것으로 속이 상해 내게 무릎 꿇고 기도한 것을 기억하노라. 그로 인하여 옆에 이 사람이 회개했고 그가 돌이켜 생명을 얻었느니라. 그 때 넌 복의 근원이었느니라.' 그런고로 여러분, '왜 난 예수를 믿었는데 잘 되는 일이 없는가 왜 난 예수를 믿었는데 남 같이 잘나가지 못하는가' 이런 일로는 괴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흘린 눈물 한 방울도 헛된 것이 없고, 여러분이 쉰 한숨 한 번도 하나님이 기억하시지 않는 것이 없으 며, 주를 위해 받은 고난은 아무 열매 없이 돌아오는 건 없기 때문입니다. 매일 부어주는 물 은 흘러내려도 콩나물은 자라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그냥 그렇게 세월만 흐르고 한숨만 쉬 다가 밀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왜냐구 요 예수님 부활 이전에는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저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이것을 알 게 된 후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기뻐하게 되었으니 그게 곧 부활 신앙의 증거가 아니겠습니 까 그런고로 이 신앙을 위해 애쓰십시오. 이거야말로 하나님께로서 난 신앙입니다. 그러면 여러 분을 무너뜨릴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대적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것이 아니라면, 그게 비록 신앙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사람에게서 난 사상과 소행이기에 곧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다만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 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는 신자, 부활 신앙의 증거를 가진 그는 평생을 부활의 주님과 동 행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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