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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의 믿음 (히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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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 사람은 중국의 정치 지도자입니다. 이 사람은 나이 불과 16세에 불란서 유학의 행운을 얻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운동에 관계하면서 불란서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고 소련 모스크바로 도피합니다. 그후 다시 중국으로 귀국하여 20대초에 정치교관이 되지만 장개석에 의해 다시 공산당원으로 숙청을 당한후 본격적인 중국 공산당 운동에 투신합니다. 그는 일생을 통해 세 번의 가정적인 실패와 세 번의 결정적인 정치적 좌절을 경험합니다. 아무도 그가 다시 재기하리라고 예상 못했지만 그는 국내외 예상을 깨고 극적인 재기에 성공합니다. 그의 정치철학은 소위 '묘론'( 論)이라 일컬어집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것입니다. 소위 이런 실용주의 노선으로 중국식 사회주의 정책을 표방하며 개혁 개방 정책을 펼쳐 오늘의 중국을 살려낸 지도자입니다. 그의 별명은 '부도옹' 즉 '오뚜기'입니다. 그의 이름은 등소평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또 하나의 오뚜기 인생을 살아간 믿음의 선배가 소개됩니다. 그의 이름은 요셉입니다. 형제들에게 시기를 받아 죽음의 구덩이에 던져졌던 사람입니다. 자기 상관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여 감옥으로 갔던 사람입니다. 감옥에서 꿈의 해몽을 도왔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오뚜기처럼 일어나 마침내 애굽과 자기조국, 그리고 자기가정을 구원하고 자기 시대에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에 서서 쓰임을 받는 지도자가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모든 것이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1.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의 떠날 것을 말하고--" 이때에 요셉은 애굽에 있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였습니다. 그에게 애굽은 성공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후손들에게 애굽에 머무르지 말고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유언을 남긴 것입니다. 왜 입니까 그는 약속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요셉이 믿음으로 말했다고 한 것입니다. 무슨 약속이었습니까 창15:13-14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이 약속의 말씀을 요셉이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는 자기의 동족들에게 고통의 때가 가까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사후에 그의 후손이 시온의 땅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죽으면 약속된 4대째가 되지 않습니까 (이삭-야곱-요셉-다음 4대) 창50:24-25의 말씀은 실제로 요셉이 임종시에 남긴 말씀입니다.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여기 25절에 요셉은 '정녕'(surely)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을 확실하게 믿고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이 확신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지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은"것입니다.(롬10:17)

요셉이 이 유언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의 후손이 그가 성공했던 땅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다 나은 선택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의 선택을 위해서는 언제나 약속의 말씀을 아는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새 언약의 시대에 살고있는 여러분과 저를 위해 기록된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주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그리고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평생을 걸어가십시오. 그때 요셉의 오뚜기 인생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2.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한 믿음입니다.

요셉이 이 유언을 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민족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공동체적 차원을 갖습니다. 대체로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 곳에 민족이 융성하고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 들이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헌신한 까닭이었습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개화와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기독교신앙의 특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저 자신과 우리 교회를 포함해서 우리가 가진 신앙의 가능성에 비해 사회적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정직하게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인과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 정신에 취약한 이유는 대체로 오랜 농경문화의 영향이었다고 지적됩니다. 농경문화는 한곳에 오래 정착하여 살면서 울타리를 쌓고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는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집안에서는 내 것을 잘 챙기지만 일단 집밖으로 나오면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해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쓰레기 투기나 공공 질서준수의 부족이 모두 내 영역이 아니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우리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사유화하려고 합니다. 산에 가서 꽃을 꺽으면 내 것은 되지만 우리 것이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우리 것을 크게 내 것으로 생각할 줄 아는것-이것이 바로 공동체 정신이 아닙니까 서양의 지식인과 한국의 지식인을 비교하면 한국인이 훨씬 더 많은 장서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서량은 한국 지식인이 오히려 뒤떨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소유만 하는데, 서구인은 도서관에 책을 두고 공유하는 삶이 생활화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매우 공동체적 특성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일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곡 천국 시민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때마다 주님에 의해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개인적으로만 예수를 잘 믿는자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가정에서 교회에서 더 나아가 직장과 사업의 장에서 적용되는 일에 진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을 부르신 주님의 본래의 의도대로 믿는자들이 세상의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이런 이상을 실천한 믿음의 선배였던 것입니다. 그가 보디발의 집에서 일할 때 하나님은 요셉을 인하여 그 집을 축복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후일 감옥에 가서도 축복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애굽의 축복이었고 민족의 축복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축복으로 살아가는 한해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교회생활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훈련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교회생활에서부터 질서를 지키고 더불어 축복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유익이 되는 믿음을 사모하십시오.

3. 죽음으로 신앙을 고백한 믿음입니다.

본문이 증거하는 요셉의 믿음의 또 하나의 중요한 차원은 그의 믿음이 고백적 간증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의 장례행렬까지도 그의 믿음을 증거하는 순간이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본문은 요셉이 "믿음으로--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라고 기록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애굽이 아닌 가나안에 자기를 묻어 달라고 유언한 것입니다. 요셉의 장례행렬을 상상해 보십시오. 애굽의 제2의 정치지도자인 총리가 죽었으니 얼마나 국가적 관심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유해가 애굽에서 묻히지 않고 가나안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장례행렬이야말로 요셉의 마지막 증거였던 것입니다. "나의 소망은 시온의 땅 가나안에 있었다"고. "나의 소망은 하나님이었다"고 증거하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죽을때에 비로소 이런 증거의 삶을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상시에도 늘 그렇게 주님을 증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생각나십니까 그가 감옥에서 만난 장관들에게 꿈을 풀어 주기를 요청받았을 때 "해석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는 바로에게도 동일하게 증거합니다. 창41:16을 보십시오."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그는 살아서 증거했고 죽음의 순간에도 증거한 것입니다. 이런 요셉과 모세의 영향, 그리고 후일 아기 예수님의 애굽 피난사건으로 애굽땅에는 적지않은 소위 콥틱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입술의 증거는 삶을 강화하는 심리적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 씨앗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독교 역사속에 신앙을 고백하지 않고 신앙인답게 살아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당신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에수님의 구주이심에 대한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십시오.

우리교인이 나가시는 회사의 직원을 만난일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그 회사의 간부였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교회 나오신다고 하니까,"아, 그분이 교회 나가세요. 몰랐네요. 정말 몰랐네요."그말을 반복 하더리구요. 그러니까 그분은 신앙을 숨기고 공적 생활을 하시던 일종의 007 비밀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그 직장을 믿음으로 변화시키는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에 영향을 주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젊은이들의 표현을 빌려 커밍 아웃하셔야 합니다. 성경에 한 비밀 그리스도인의 커밍아웃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니고데모란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공의회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신분노출을 꺼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의 도전을 받고 복음을 전해 듣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밤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더 이상 그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일종의 비밀 그리스도인 행세를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드디어 그의 커밍아웃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 의해 비방당하시고 체포당하실 위기에 처하자 드디어 그가 나섭니다. 요7:50입니다."그중에 한 사람 전에 곧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전에 판결하느냐"라고 나선 것입니다. 드디어 그가 커밍아웃한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신 직후 장례식 장면입니다. 요19:39을 보십시오. 이렇게 기록됩니다. "일찍 밤에 나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온지라" 과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밤중에 예수님을 찾았던 니고데모 이제는 대낮에 공개적으로 예수를 시인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의 반열에 서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인생의 마지막 결산은 우리가 주님앞에 서는 날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당신의 사람으로 인정하실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날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으실 기대가 있으십니까 그러면 이제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태10:32-33)

우리모두 커밍아웃 하십시다. 우리가 우리의 공적인 삶의 자리에서 "예수는 나의 주님이십니다."고 고백하기 시작할 때 세상은 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의 제자임을 부끄러워한다면 이 세상은 사단의 제자들만이 계속 커밍 아웃할 것입니다. 그들이 커밍 하여 죄가 아름다운 것이라고 선전하도록 버려두시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커밍 아웃하여 예수의 주되심과 소망되심을 선포하시겠습니까 지금은 선택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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