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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엡 05: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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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장 14절에서 27절까지 있는 말씀을 보면서 '성령을 충만히 받으라' 하는 말씀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신자에게는 성령의 감화와 감동 이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거나 주님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 라 아예 신앙 생활이 안됩니다. 또 감화와 감동을 알았다 해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성령의 충만함을 요구하는 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귀하고 당연한 사실입니다. 하나님도 이것을 원하시고 주님도 성령도 말씀도 원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친히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사 도행전 1:4, 누가복음 29:49)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주시기로 허락하신 성령, 준비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 씀은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동시에 귀한 것은 '몇 날이 못되어 너희는 성 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사도행전 1:5)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귀한 말씀이 오늘 수많은 교회 안에 또 우리들에게 아주 익숙한 말 씀인가,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는 말씀인가 그렇지 않으면 지나가는 말 로만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될 줄로 압니다.

동일한 말씀이지만 이 세 가지 말씀,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성령을 기다 리라', '몇 날이 못되면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성령의 충만 함을 받으라' 하는 이 말씀에 도전한 생명, 그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해서 이 사실을 누리는 사람은 참으로 귀한 사람이 요, 복된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알 뿐만 아니고 직접적으로 접근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계시느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느냐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능하냐, 불가능 하냐 하고 도전하는 것은 신자로서 당연한 의무입니다.

성령은 개인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살려 해도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가정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직업도 필요합니다. 이 런 것이 다 끊어지면 온전한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필요한 것이 없거나 파괴될 때에는 불완전합니다.

그와 같이 신앙에 있어서도 성령의 감화와 감동과 풍성과 내주는 반드 시 필요합니다. 필요라기 보다 절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 로 여기지 못하는 것뿐이지 사실상 신앙에 있어서 성령의 감화와 감동과 풍성과 내주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가 사람이 많고 돈이 많고 사회로부터 짓밟힘을 당하지 않는 모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런 모 임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는 교회, 성령의 일하심이 살아 역사하 는 교회를 원합니다.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 경제가 부하냐, 약하냐 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고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의 충만함이 있느냐, 감화와 감동으로 성령께 서 일하고 계시느냐 하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사람 이 많아도 돈이 많아도 사회적으로 뽐낼 수 있는 규모라 해도 하나님 앞 에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약속된 사실이 유업으로 임할 때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개인의 신앙도, 교회도, 복음도 시작 자체가 성령으로 시작됩니다. 하나 님의 일, 주님의 일, 복음의 시작은 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진행 되고 성령으로 완성됩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바리새교인으로서 주님과 교회를 향해서 쓸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 중에 하나요,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용납하시고 사랑하셔서 성령의 감화와 감동과 내주로 그와 함께 계심으로 역대 사도들 중에 가장 흠모 받는 신앙의 사람이 되었고 성령처럼 사모하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 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도 쓸데 없는 무익한 종이었지만 로마 옥에서 바울을 만나 말 씀으로 양육을 받고 바울의 신앙을 이어 받았습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낳 은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 없 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또 충만으로 사는 것 이 그의 삶입니다. 다시 종으로 돌아가서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빌레몬에게 부탁한 것도 '전에는 무익한 종이었 으나, 오네시모를 이제는 종으로 받지 말아라, 사랑 받는 형제로 받으라.' 하는 것입니다.

이 분들 안에 역사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과 충만하심과 내주하심, 이것이 없으면 이 세 사람 중에 하나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감화와 감동과 충만과 내주를 모르거나 그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 쓸모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이해하시기 바 랍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우리 마음 속에 다른 요구, 다른 문제들이 대두 될 것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 치겠느냐. (갈라디아서 3:3)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어리석으냐-공부를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연인으로서의 지혜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 제는 육체로 마치려고 하느냐 여러분, 나 자신은 이 어리석은 사람이 아 닌가, 어리석은 사람들의 집단에 속해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성령으로 시작한다는 말이 참 귀합니다. 신앙은 반드시 감화와 감동에 서 충만으로 충만에서 내주로, 나무가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결실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신앙이 장족해서 아름다운 결실을 맺지 못하는가 하면 성령으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의 감화와 감동으로 인해서 내가 주님을 믿지 않고는 복음과 교회를 좇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일이 내 안에서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시작은 성령으로 했어도 육으로 끝을 맺으려고 하기 때문에 아름 다운 결실을 못 맺는 것입니다.

성경에 귀한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믿는 자에게는 더 주어 풍성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백 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천 원을 주고, 천 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만 원을 주는 그런 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 있는 것, 주 안에서 가지는 것, 이것을 그 사람에게 충만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시작했다고 하면 충만케 하리라 하시는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 중에 하나입니다. 참 귀한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신자에게만 이런 말씀이 해당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지금 말씀하는 이런 사실이 필요치 않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돈 버 는 방법이나 명예나 지위를 얻는 방법이 필요할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시작해서 있는 자에게 더 주어 풍성케 하신다는 말씀이 저들에 게는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나아가서 종교인으로 살다가 종교인으로 끝을 마치는 사람에게도 별 필 요가 없습니다. 왜 아무리 들어도 이 말씀에 자극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 다. 사람들이 사탄의 세력이 살아 있어서 역사하는 것을 모두 눈으로 봅니 다. 귀신 들린 사람을 봅니다. 그러면서도 이 성령에 대해서는 감화와 감 동에 대해서는 그렇게 예민하게 감각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사람, 모든 죄에서 구원하심을 받 는 사람, 주님으로 말미암아 성결함을 받는 사람, 주님으로 말미암아 의의 칭호를 받는 사람은 그가 무식하든지 유식하든지 세상적으로 똑똑하든지 저열하든지 반드시 그 자신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압니다. 성령의 감화 와 감동을 아는 사람이 성령의 풍성하심과 내주하심을 알고 사모하게 됩 니다.

이런 말은 제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지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의 사람이면 누구나 갖는 동일한 호소, 동일한 느낌, 동일한 누림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이 말씀이 내 신앙의 목표, 교회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 목표된 말씀이 있으나마나 한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 는 그렇지 않습니다. 들림 받는 교회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 나 버림 받는 교회에게는 감화와 감동과 풍성과 내주가 필요 없습니다.

들림 받는 교회에게는 이런 사실이 반드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됩니 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모르는 사람이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합니까 어 떻게 주님 앞에서 깨끗하고 흠이 없는 신부가 됩니까 무엇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습니까 성령은 한 분이십니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주님 되시는 하나님, 성 령 되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하나님이시요, 성령도 하나님 이시요, 주님도 우리의 주님이시요, 성령도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다만 사 역이 다릅니다. 아버지의 사역이 다르고 아들 되시는 주님의 사역이 다르 고 성령의 사역이 다를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을 아들 되신 주님께서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아들로 인하여 성취된 아버지의 뜻, 기정적인 사실을 우리 마 음 속에 믿게 하십니다. 또 그 사실을 우리 안으로 옮겨 주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하시는 일입니다. 만일 이 일이 아니면 자연인의 지식으로 기독교 를 아는 것뿐입니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신령한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일하시되 먼저 듣게 하시고 들은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깨달은 말씀을 믿게 하십니다. 또 믿는 말씀을 우리 마음 속으로 옮겨 주십니다.

사람들의 환경과 처지는 다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고운 사람, 착한 사람 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거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운 사람도 그 고운 것으로 하나님을 못 찾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됩니다. 또 사납다 고 해서 예수를 못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도 이 성령의 감화와 감동 이 함께 할 때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가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외형적으로는 다르지만 그들 안에 일하시는 성령은, 말씀의 내용은 똑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초대 교회 사람이나 20세 기 사람이나 그들의 문화와 환경은 달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셔서 구 속하시는 내용은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똑같은 말 씀으로 그 마음 속에 화하게 하십니다.

주와 말씀으로 그 사람들을 회개케 합니다. 그 사람이 1세기에 있든지 15세기에 있든지 20세기에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 얻는 사람에게 는 자기 자신을 알게 하시고 주님을 알게 하십니다. 회개하게 하시는 것이 동일합니다. 옛날 사람은 옷을 벗고 살았고 지금 사람은 옷을 입고 삽니 다. 먹고 마시는 것도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은 동 일합니다.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 인해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시고 주와 주의 말 씀을 인해서 성결케 합니다. 참 귀합니다. 흠이 없는 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누가 나를 길을 들여서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자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겠습니 까 무엇으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서양 사람이 인도하는 그 사실이 서양 사람에게 유익하고 동양 사람이 인도하는 그 사실이 동양 사람에게 유익할지 몰라도 그 내용이 하나님 앞 에서 나를 세우지는 못합니다.

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거룩하게 서지 못합니까 다른 이 유는 없습니다. 다만 나 자신이 아직까지 성령의 감화와 감동에 접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여기는 것이 합당합니다.

내가 구원의 말씀을 못 들었는가 성결의 말씀을 못 들었는가 다 들었 습니다. 그런데 왜 들은 바 말씀이 내 마음 속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되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성령은) 일을 하십니다. 먼저 감화와 감동으로 일하십니다. 일 시적으로 깨닫고 일시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성령의 감화 와 감동을 수없이 알았습니다. 수없이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또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일시적으로 알게 하시는 것 즉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울이 바울로 되는 과정 안에, 빌레몬이 주의 동역자로 없어서 는 안될 사람이 되는 과정 안에,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다시 돌아가서 은 혜로 살게 되는 과정 안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무엇이 있었기에 그렇게 살 수 있었습니까 내가 신앙하는 가운데, 어느 교회에 나가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가운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나로 하여금 복음과 주님과 교회를 위해 살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로 된 것이나 빌레몬이 참으로 아름다운 복음의 동역자로 된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만일 그들에게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지나서 충만에 나아가는 일이 없었다면 바울도 그럴 수 없었고 빌레몬도 그럴 수 없었고 오네시모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죽기까지 복음과 함께 길을 못 걷 습니다. 오늘이라도 찬바람이 불어오면 낙엽이 떨어지듯이 우수수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내주로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고 성숙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아주 존귀한 유업이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성령을 받아라', '몇 날 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이 나와는 상 관이 없습니까 우리 교회와는 상관이 없습니까 만일 상관이 있다면 직 접적으로 이 말씀을 거론해서 도전해야 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죽든지 살든지 이 문제는 해결되어야 된다' 하고 그 사실에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사실을 우리의 신앙 생활의 목표로 또 교회의 목표로 우리 일생의 목표로 삼고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 하신 말씀이 언제 내 마음 가운데 이 루어질 것인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하신 말씀이 언제 이루어지겠는 가' '있는 자에게 더 주어 풍성하게 하신다 하는 말씀에 내가 언제 아멘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기다림을 가지고 구해야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나 봉사하는 것이나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다 부족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나 들을 때에 그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하는 일, 마음에 품고 있는 일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일을 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아무리 귀한 말씀을 들어도 듣는 그 시간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시간에 그 말씀이 그 내용이 교인들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볼 수가 없 습니다. 그 정도로 말씀이 무시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렇게 봉사해라,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라 하 는 요구보다도 먼저 잠자는 자도 또 술에 취해 있는 자도 성령의 충만함 을 받으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시와 찬미와 화평한 노 래가 흐르는데 성도와 성도 사이에 물줄기 같이 흐릅니다.

이런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순간적으 로 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하루 이틀에 된 것이 아니고 또 빌레 몬이나 오네시모가 한두 시간에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편 성령의 감 화와 감동은 짧은 순간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감동과 감화가 성령의 풍 성한 자리에 나가기까지는 시간을 따질 수 없는 계속된 은혜의 길입니다.

이 길을 우리의 소유로 삼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구약의 성령과 신약의 성령이 다르지 않습니다. 구약의 성령도 신약의 성령도 지정의를 가지신 분입니다. 성령은 지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지정의를 가지고 지정의를 가진 사람에게 일하십니다. 다른 동물들이 우 리와 같이 비슷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지정의가 없습니다. 또 우 주에 가득 차 있는 만상 중에도 지정의가 없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든지 지정의가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지정의를 말씀합니 다. 지정의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지정의를 가지신 성령이 오셔서 우리 의 지정의를 무시하지 않고 그 지정의와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구약에서 성령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신으로, 부리시는 영으로 많이 묘 사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으로만 생각 해서는 안됩니다만 구약에는 그렇게 많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 '여호와 의 부리시는 악신'이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입니 다. 이런 것도 확실히 아는 것이 여러분의 신앙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신'이 있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신'이 있습니 다.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신이 다 윗에게로 옮겨 가고 사울에게는 악신이 임합니다. 하나님이 부리는 악신 이 임함으로 그 부리는 악신과 함께 사울은 멸망의 대상이 된 것을 우리 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4절 말씀에 '여호와의 신이 사울을 떠났고...' 라는 말씀 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을 떠나신 일입니다. 또 '부리시는 악신 이 그를 번민케 했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조용하고 찬찬하고 깊이 들어 가는 정돈된 심령이 아니고 '번민한다, 미친 것같이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사무엘상 16장 23절을 보면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르 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부리는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18:10)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다' (19:9) 하는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신을 거두어 가시는 것도 악신으로 그 를 번민케 하는 것도 전부 다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신약에서는 성령을 '아들의 영, 주의 영, 양자의 영, 지혜의 영...' 등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참 귀합니다. 만일 이런 칭호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 가 하나님의 성령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 28:20) 일방적으로 나와 상관 없이 거한다고 하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정 의를 가지고 있는 내가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모른다면 내 신앙은 어 엿이 설 수도 없고 찬송할 수도 없고 안식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명칭이 많은 것은 그 명칭을 따라서 일하는 모습 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먼저 성령, 거룩한 영입니다. 악신, 사신, 사탄에 비해서 성령, 거룩한 영입니다. 또 성신인데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 의 아들이라.-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알게 하시는 영입니다. 이 영 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살아서 우리 영과 함께 거하며 일하십니 다. 또 주의 영입니다. '주의 영이 오셔서, 주의 영이 함께 하셔서...' 참 귀 합니다.

또 하나는 보혜사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보혜사의 뜻이 참 귀합 니다.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보혜사,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아시면서 보혜사로 우리와 같이 계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는 지혜의 영입니다. 그가 오셔서 나를 알게 하는 지혜입니다. 영적 지혜입니다. 주를 알게 하는 지혜입니다. 구원과 성결과 의와 거룩함과 성 경 안에 있는 모든 비밀을 나에게 알게 해 주시는 분인데 그 칭호가 지혜 의 영입니다.

세상에서는 무식해도 이 지혜의 영이 오시면 하나님을 아는 일,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그 앞에 서는 모든 일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 지혜가 아닙니다. 세상의 지혜가 아닙니다. 관원들이 알 수 없는 지혜입니 다. 앞서 간 성도들 안에서 나타나셔서 일하시던 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사람인데 '주재여,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십니다.' 라는 말이 어 디서 나오느냐 주님을 아는 지혜에서 나옵니다.

나아가서 진리의 영, 은혜의 영, 생명의 영입니다.

더 말씀하는 것은 양자의 영입니다. 아들의 영, 양자의 영이 우리 안에 와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은, 바로 양자의 영 되신 주님이 내 안에 오실 때에 그가 내 입을 통해서 겁없이 기탄 없이 '아버지, 아버지' 하며 부르게 되는 것 입니다. 주님의 영이 나를 접했을 때에 내 입으로 주님을 나의 주로 영접 하게 됩니다.

믿음의 영이요, 의의 영입니다. 또 하나는 심판의 영입니다. 나아가서 소멸의 영입니다. 심판, 소멸까지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입 니다. 또 영광의 일입니다. 이렇게 많은 이름을 가지고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대강만 생각하고 말씀한 것이 15가지입니다. 그 중에서 어느 칭 호가 나를 격하게 했습니까 이 15가지 칭호를 따라서 내 안에서 하는 일 이 많습니다. 그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등한히 여기거나 있으나마나 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문제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신에게 있 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영이 양자의 영이 보혜사가 내게 와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 하는 점을 잘 생각해야 됩니다.

사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내게 분명히 있어도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 하기 때문에 잘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것이 분명히 내 일이 아니고 내 감정도 아니고 내 뜻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 사탄의 감정이나 사탄의 뜻도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이다, 하나 님의 선물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합니다. 나 자신이 만족하지 못합니다. 또 주님도 만족하시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화를 지나서, 감동을 지나서 성령 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인된 나를 흠이 없는 자로 세우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말로만 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나를 죄인되게 하시고 또 하나님 앞에 흠이 없는 사람으로 세웁니다. 하나님과 상관 없는 외인된 나를 하나님의 친 권속으 로 삼으십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원수된 나를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으 로 세우시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주의 보혈을 내게 알게 하시 고 그 보혈로 나를 씻기시고 새롭게 의롭게 하시는 것이 내 생활 가운데 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 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 라 하시더라. (계시록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이 교회에 소속해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 앞에서, 죄인되고 상하고 거칠고 원수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우리지만 성령과 신부는 계속해서 오라고 하십니 다. 그런데 이 소리를 안 듣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깨닫는 것이 참 귀한 데 이 소리를 못 듣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교회입니다.

만일 교회가 신자가 성령과 신부가 하시는 말씀, 오라고 하시는 그 말 씀을 듣고 돌아간다면 개인이 달라집니다. 만일 교회가 한 몫에 돌아간다 면 그 교회는 큰 부흥입니다. 아름답고 귀합니다. 시와 찬송이 그 안에서 나옵니다. 외적 상황은 다르지만 똑같은 사실입니다.

'듣는 자도 올 것이요...' 여러분들이 만일 성경 말씀을 그대로 들었다면 벌써 돌아갔을 것입니다. 만일 듣고도 돌아가지 않았다면 들었다는 말이 성립이 안됩니다. 듣는 자는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돌아가지 않은 사람 은 듣는 사람이 아닙니다. '듣는 자도 올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라...' 나는 왜 성령의 충만함을 찾는가 왜 기다리는가 이것이 그렇게 귀한 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나를 다짐하면 그 안에서 알 것입니다.

듣는 자, 원하는 자, 목마른 자입니다. 들어도 목말라도 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듣는 것, 목마른 것이 있다 해도 원함이 부족합니다.

원함이 있어야 그 원함이 나를 그 위치로 옮겨 놓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값 없이 값을 내지 말고-어떤 값도 지불할 이유가 없 고 다만 여기에 필요한 것은 듣는 것, 목마른 것, 원함입니다. 듣는 것, 목 마른 것, 원하는 것만 결합되면 다른 값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것은 다 값이 있어야 됩니다.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큰 것은 큰 것대로 귀한 것은 귀한 대로 천한 것은 천한 대로 다 값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이기 때문에 값을 지불할 수 없습니다. '듣는 자도 목마른 자도 원하는 자도 값 없이 생명수를 마시라' 하는 것이 일곱 교회를 향해서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과 무엇을 계약할 때 먼저 이런 저런 조문을 다 기록합 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반드시 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내 성명을 밝혀야 되고 도장을 찍어야 됩니다.

신구약 66권 중에 어느 것이 첫째 권이고 어느 것이 마지막 권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순서로 보면 요한 계시록이 맨 끝에 있습니다. 이 마 지막 안에 모든 것이 있다고 합니다만 이 말씀 안에 나가면 모든 것을 이 말씀이 삼킵니다. 귀하게 여겨야 됩니다.

도둑질을 했습니까 간음했습니까, 살인했습니까 '들으라' 고 하십니다.

바로 이 사람들 도둑질한 자, 간음한 자, 살인한 자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 이 '들으라' 입니다. 성경이 무슨 말씀을 하고 있어요 들으면 그 들은 가 운데서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듣는 자도, 목마른 자도, 원하는 자도 오너라. 와서 값 없이 돈 없이 생 명수를 마셔라' 이것이 성경 마지막에 인치시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 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서의 55장의 말씀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 라' 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갖다 먹으라, 성령의 풍성함을 받으라, 맛만 보지 말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만족하지 말고 자랑하지 말고 충만함 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마음 놓고 먹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등한히 여기는 사람을 어떻게 보장합니까 무엇을 보장합니 까 만일 우리의 행위대로 구원이 성립된다고 하면 이런 말씀이 필요 없 습니다. 행위를 가지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성령과 신부가 하시는 말 씀, '오라, 들으라' 하시는 말씀이 필요가 없습니다. 목마른 사람, 원하는 사람은 돈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는 이런 말씀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자기 행위에서 다 결정이 났는데 이 포도주가 무슨 필요가 있 겠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선물입니다. 100% 선물입니다. 공이 없는, 삯이 없는, 대가가 없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지 않는 사람은 다른 변 명이나 다른 이유나 다른 이론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너희 중에 이같은 자가 있더니' (고린도전서 6:11)-'하나님의 나라, 유 업을 받지 못할 사람들이 있었는데...'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 게 주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 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 듣고 나아가는 사람에게 약속되어 있습 니다. 또 그런 사람에게 씻김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로마서 3:23)-이미 범했습니다. 여러분 이 앞으로 잘 살아서 옳게 되려고 아무리 애써도 이미 범한 죄로 사망입 니다. 앞으로 남은 생활이 죄라고 하는 말에 하나도 안 걸린다 해도 이미 지난 생활이 나를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세우기에 넉넉합니다. 이미 범한 죄가 사망입니다. 그것은 상관 없습니까 여러분,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말씀 가운데 이미 사망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듣지 않기 때문에, 목마르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하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 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노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 없이 얻은 바 구원을 아십니까 값 없이 얻은 바 성결을 아십니까 값 없이 얻은 바 의로움을 아십니까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에서 구원함을 얻느니라 (로마서 5:9) 성령은 나의 심령 안에서 일하십니다. 잘 이해해야 됩니다. 잘 들으십시 오. 많은 사람이 '십자가, 십자가' 합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인성으로 오셔 서 지신 그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미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그 십 자가의 사실이 우리에게로 옮겨지는 것이 참 귀합니다.

인성으로 오신 주님이 가르치시는 분이라면 성령은 어떤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같은 주님인데 인성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주 님이라고 하면 성령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에게 직접 실천하시는 주님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오신 주님은 십자가의 사실을 실천하십니다.

아는 데서 지나서 그 일을 하나 하나 실천해 나가십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께 속했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따라 충만에 이른다 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기록된 사실들이 교육으로 끝나는 게 아닙 니다. 교과서로 끝나는 게 아니고 우리 마음 속에 그 사실들이 실천됩니 다. 성령께서 이루고 계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령은 오셔서 죄인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거듭남'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 게 하십니다. 새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죄와 상관 없는 사람, 심판과 상관 없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이 오셔서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실 것을 말씀하니까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 근심이 생겼습니다. 제자들은 인성이신 주님이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주님은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오늘도 인성이신 주님이 세상에 계셔서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 고 계속해서 일하신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참 불행입니다. 인성이신 주님 을 만나려면 거기가 어디든지 주님이 계신 곳까지 가야 됩니다. 시간도 걸 리고 돈도 듭니다. 그러나 성령이신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성으로가 아니고 성령으로 시공을 초월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왜 모릅니까 왜 그 사실을 받아들이 지 않습니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 을 우리가 참으로 알아야 될 것입니다.

확실히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맛보았다, 누렸다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 니다. 또 많이 있어야 됩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어린아이가 장성하 는 것과 같이 자꾸 믿음에 장성이 됩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감화와 감동 을 아는 사람에게 무슨 요구가 생깁니까 모르는 사람은 다른 요구가 없 지만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아는 사람은 다른 요구가 생깁니다. 그 요구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기도 안에서 신앙 생활 가운데서 요구가 생기는 데 그 요구가 무엇입니까 감화와 감동을 알면 알수록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으로 너무 부족 합니다. 감화와 감동이 있는 그 시간에는 다른 것이 없어도 만족합니다.

그런데 그 만족이 계속되질 못합니다. 그 분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감화와 감동이 아주 귀하고 내게 참 좋은데 그것이 계속되지를 못하니 까 차츰 무엇을 원하게 되는가 하면 충만을 원하게 됩니다. '내게 충만했 으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느낍니다. 어제도 오면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아는 것뿐만 아니고 성령의 충만함을 여러 번 여러 번 느꼈습니다.

만일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되면 다시는 요구가 없어야 될텐데 요구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감화와 감동을 아는 사람에게 충만의 요구가 옵니다.

충만해야 되겠다는 요구입니다. 충만을 향해서 무릎을 꿇고 충만을 향해 서 자기의 걸음을 걷는 사람이 감화와 감동을 아는 사람입니다. 감화와 감 동이 우리에게 갖다 주는 것은 충만에 대해서 가슴을 열고 생활을 열고 무릎을 꿇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충만을 아는 사람에게 무슨 요구가 생깁니까 내주입니다. 어떤 목 사님들은 여기에 와서 성령의 내주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고 합니다. 처음 듣는 말이 아닙니다. 내주입니다. 내주! 성령의 감화와 감동은 밖에서 안 을 보고 일합니다. 그러나 내주는 안에서 밖을 보고 일합니다.

헌 집이 있습니다. 새 집이 아닙니다. 이 헌 집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 헌 집 주인과 새로 계약 체결한 것이 법적 구원입니다. 여러분들이 예 수 믿기 전에 예수를 알기도 전에 이미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 시 사신 것은 법적 구원이 형성된 것입니다. 법적 구원입니다. 그러나 내 게는 상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내가 원수되었을 때에 외인 되었을 때에 내 모든 죄와 허물을 개의치 않고 주님이 법적으로 구원을 성립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집은 아직까지 모르고 있습니다.

쓰지 못할 집인데 새 주인이 이 집을 계약했습니다. 주인이 바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집은 모릅니다. 법적 구원입니다. 이 집이 새 주인을 아는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새 주인을 아는 일이 여러분의 신앙이 장성하 는 과정에 반드시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안됩니다.

나는 이 새 주인을 열여섯, 열일곱 때에 알았습니다. 그리고 스물 한 살 에 분명히 이 새 주인을 나의 주인으로 모셨습니다. 그런 과정이 있습니 다. 이 새 주인은 그 집을 자기가 쓸 뿐만 아니라 자기가 그 안에 들어가 서 살려고 집을 샀습니다.

그러나 수리를 해야 됩니다. 토수를 보내고 목수를 보내서 수리합니다.

그것이 이제까지 우리가 말씀한 것으로 보면 무엇입니까 성령의 사역 중 에서 어떤 사역입니까 감화와 감동입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은 수리하 는 것과 같습니다. 목수가 와서 수리하고 토수가 와서 수리합니다. 또 도 배장이가 와서 도배합니다. 어떻게 하려고 주인이 와서 살려고. 주인이 살 수 있도록 다 정리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감화와 감동입니다.

다 수리하고 나면, 정리하고 나면 누가 와서 삽니까 새 주인이 와서 삽 니다. 이것이 내주입니다.

 (기 도) 신령한 면에서 우매 무지한 짐승과 방불한 저희지만 주께서 저희를 떠 나지 않으시고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저희를 용납하시며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저희를 이끌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 안에서 깨닫는 것, 믿는 것, 아는 것만이 하나님 앞 에서 나를 어엿이 세우는 복된 사실이 되는 것을 압니다. 다른 것은 심히 부족할지라도 이 교회 안에 주의 신의 감화와 감동과 충만하심과 내주하 심을 더하여 주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온 교회가 이 사실 안에 승복하게 하시고 우리의 것이 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면서 그 앞에 무릎 꿇는 일 을 계속하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밭을 가는 사람이나 양을 먹이는 사람이나 참으로 자기 없는 종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풍성함이 아 니고서는 이런 사실을 생각지도 못하고 흉내도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 다. 하나님의 성령의 풍성함을 받으라 하시는 이 말씀이 우리 마음 가운데 옮겨지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이제 자기의 삶을 들고 주님 앞에 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의 자비와 긍휼이 같이 하시며 말씀의 권고하심이 더하시기를 비옵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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