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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주님의 변모 (출 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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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마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에서는 "우리 주님의 변모" 주일을 전통적으로 8월 6일에 지킨다. 그리고 장로교의 성서일과는오순절 후 스물 일곱째 주일의 성서일과와 일치한다.

<주석>

제 1주제:출애굽기 24:12, 15-18
출애굽기는 천지창조에서 가나안 입성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처음에는 구전의 형태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문서의 형태로 결합하여 발전시킨 오랜 기간 동안의 문헌적인 작업의 소산이다. 신조의 요약들과 신조의 성격을 띤 설화들이 원래 구전의 형태로존재하여 오던 구전기(口傳期)를 거친 후에 J 기자(Jahwist)가그 전(全) 역사를 문자로 정착시켰다. 이 작업은 다윗 시대 무렵에 있었으며,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도 제의(祭儀)에서 보다는 역사(歷史)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하는 편으로 작업이 이루어졌다. 반면, 다만 핵심적인 내용들 만을 보존한E기자(Elohist)는 구전과 마찬가지로 제의를 강조하였다. P문서(Priestly writing)는 바벧론 포로생활이 시작되던 주전 587년과성전이 재건된 주전 515년 사이에 기록된 문서이다. 독립을 잃자이스라엘은 한갓 종교적 집단으로 존재했으며, 따라서 예루살렘성전과 성전 의식의 신적 기원이 국가의 재단합(再團合)을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경 비평의 기본적인 사항들에 관해 이같이 많은 부분을 할애한 까닭은 오늘 우리의 본문이 P문서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예루살렘 성전의 계시의 설화에 서론의 역할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비품들, 그 성전의식관 관련된 의상들, 제사장들, 그리고 재정적 지원에 관한 문제 등은 모두 출에굽 동안광야에 세워질 장막을 위한 규정들에 따른 것이었다(25:1-31:17). 12절은 원래 P문서 설화의 일부분이 아니라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 사건의 서문이었다. P문서의 제의적 계시 기사가 이곳에삽입되어 거기에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4:15에서 산을 덮고있는 구름은 출애굽기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임재하심의 상징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16절)은 바로 그임재하심을 나타낸다. 1주일 간의 예비적 대기(待期) 기간이 지나자 의미심장하게도 일곱째 되는 날에 여호와의 음성이 모세에게 들려왔다. 이번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또 다른 전형적인 방법인 불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모든 지시를 받기까지 모세는 40일간을 산 위에 머물러야만 했다(이 지시들은 12절의 "돌판" 에는포함되지 않은 것들이다). P기자에게 있어서는 진정한 계약이란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었다(창 17장). 달리 말한다면 P기자는시내산 사건을 계약의 사건으로서 보다는 제의를 위한 지시들의계시 사건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설교를 위한 해석

그리스도의 최종적 권위는 이 절기의 우뚝 솟은 주제로서 이절기를 압도하고 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명령하고 있다(5절). 이 사건은 꿈처럼 압축된 형태로 독자들에게 하나의 환상으로서 감명을 주고 있으며, 우리 주님 자신의 말씀을 기록한 마태복음 저자의 기록속에 이 환상은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그 꿈 상징의 언어(dream-symbollanguage)는 지극히 권위있는 두 인물과 대화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두 인물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경외감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8절). 태양을 잠깐 본 사람이 온통 주위에 반짝이는 잔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누구나 자기 주님의 관점을통해 모든 경험과 모든 문제를 보게 마련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화"(God talk)에 당혹해 하면서도 보다 덜초월적인 어떤 주제속에 우리 자신을 은닉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유혹은-뒤따라 나오는 간질병 걸린 소년의 기사에 유의하라(14-21절)-환상의 산들로부터 급히 하산하는 일을 추진하기 위해인간적인 봉사를 가장 중대한 일로 높이는 것이다. 오늘 복음서본문은 그러한 도주를 지지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이 본문은 초월(超越)로 점철되어 있다. 다음의 상징들을 주목해 보라. 해 같이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과 빛과 같이 희어진그의 옷(2절)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눈같이 흰옷(단 7:9)과병행을 이루며 또한 부활시의 천사에 관한 마태복음 저자 자신의언어(28:3)와도 병행을 이룬다. 하나님의 등을 보았던 모세(출33:23), 그리고 세미한 소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던 엘리야

(왕상 19:13)-여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두 사람도 각각 산위에서-는 이제 하나님의 현현 앞에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저희를 덮은 빛난 구름"(5절)은 모세가 시내산을 오를 때의 구름 이미지(출 24:18)와 다니엘의 초월의 환상의 구름이미지(단 7:13)를 연상케 한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기뻐하심을 선포하고 있다(5절). 그리스도의권위에 대한 복음서의 이 선포를 강화하기 위해 교회는 주로 초월자와의 만남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한 구약 귀절들을 택했던것이다. 이 설화를 어떻게 다루든 우리는 초월성에 대한 이 본문의 증거에 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쟁점이 되는 문제는 우리 주님의 종국성(終局性)이다. 그 분께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궁극적인 말씀을 하실수 있는가 이 기사가 암시해 주듯이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같은분이신가 윤리적인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재고(再考)되고 있는이 시대에 명령의 권리가 담긴 "저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세계의 종교들이 각기 다른 주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근본은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서로 접근을 시도하고있는 이 추세에서 제자들이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변모 사건에 관해 설교한다는 것은 곧 이러한 질문들의 한 가운데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예수님-그 분께 순종하는 것이 의미있는일임을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는 바로 그 분-이 영원자의 사명을띠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만일 어떤 진정한 척도로써 인간 예수의 거리를 듣고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국성에 관해 말해보았자 전혀 쓸데없는 짓이다. 종국성의 문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초월적인 하나님-인간이 그 분의 뜻을 조정할 수 없고, 인간이 그 분의 심판에기속되어야 하며, 인간이 그들 중에 임하시는 그 분의 불가항력적인 임재를 어쩔 수 없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 하나님-을 만나고 또 그 하나님에 의해 만나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의 두번째 본문은 사도적 경험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시금 자기의 것으로 삼아도 좋으냐 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서신의 저작권 문제, 그리고 처음 목격자와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그것을 친히 목격한 자의 증언으로인용하는 것이 정직한 태도인가에 관한 문제들을 다룬 주석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설교자는 이러한 문제들을 다룸에있어 방어적인 입장을 취할 필요는 없다.
이 본문의 말씀 자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했던 사도적 경험을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도록 초청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인 주관성에 입각해서는 안 된다.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기"(20절)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 생성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신앙 공동체 내에서 우리는 2세기의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었다"(18절)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그러한 성서들이 어떻게우리 주님의 진정한 경험을 우리들에게 반영해 주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야기 전체를 제1인칭으로 읽을 수 있다. 정말이지 이것은 결코 적은 스릴이 아니다. 이러한 방법으로우리는 예수님을 에워싼 많은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할 때까지 밀고 당기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만일 이 사람들 속

에서 우리 자신을 확인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주님을 알아볼 수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일시가 이루어질 때까지는 예수님은어쩌면 우리의 주님이 아닌 그들의 주님으로서 역사 속의 한 등장인물로 남아 계실 뿐이다. 우리가 그 경험 속에 깊숙이 들어가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하고 우리 또한 "이는 내사랑하는아들이라"(17절)는 음성을 듣게 된다.

그 다음 우리는 이론적인 생각에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채용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에서 이 시대의 신화들과 이데올로기들과대면하게 된다(16절). 초기의 논쟁은 예수의 위격(位格)을 하나님의 성품 내지는 구원에 관해 결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이단교리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그러한 이단 교리들에 대해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처음 예수님을 알았던 자들이 그들로 하여금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당신 자신의 더없이 중요하고 최종적인 계시라고 주장하셨음을 확신케 해 주는 경험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닻을 내리고 있다(17절, 참조:마 17:5).
오늘날의 해석자들이 "현대인"의 회의주의를 두려워한 나머지이 메시지를 약화시킴에 따라 그 나머지 공백은 새로 싹트기 시작한 신비로운 것에의 몰두에 의해 메워지고 있다. 오늘의 두번째 본문은 이에 맞서 "우리는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주축을 이룰만한 역사적 실재(實在)를 다루고 있다.
"베드로"는 변모 사건에서 파루시아의 전조(前兆)를 보고 있다(16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실 것이다. 복음서 본문의 기사는 그저 아무렇게나 만들어낸 에피소드가 아니다. 그것은 궁국적인 것의 계시이다. "주 예수의 강림"이란 말은 예수님의 최종적인 승리를 표현하는 교회의 문구(文句)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기념비적인 투쟁들에 직면해 있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촉구하면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에반스톤 총회(EvanstonAssembly)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충분하시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다가오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다가오고 계시는지 알고 있다. 그 분은 날마다 우리를 만나시고 마지막 때에 우리를 만나실 분,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께 말합니다-"소망 중에 기뻐하십시오." 오늘의 두 번째 본문은 우리에게 신앙 공동체 안에서 바로 그 소망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으라고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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