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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의 모리아 산 (창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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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을 보겠습니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까지는 약 70 입니다. 아브라함은 2박 3일째에 목적지가 시야에 들어오는 지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는 낮에는 자신의 헌신과 순종을 매 발걸음으로 확인해야 했었고,밤에는 뭇별들을 바라보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는 말씀을 회상하며 이삭의 임박한 죽음을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일순간의 흥분된 결단을 위해서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지만 장시간의 긴장이나 지연속에서는 쉽게 마음을 바꾸고 용기를 잃습니다.

아브라함은 2박 3일 동안 얼마든지 뜻을 바꾸고 발길을 돌릴 수도 있었습니다.

또 2박 3일의 여행길을 연기하여 당장 모리아산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금방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이 분명히 가라고 지시한 '한 산' 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마 여장을 챙기고 아침 일찍 출발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다 보면 정말 그럴 필요가 있을까 지금 당장 실행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만 돌아서자! 등의 유혹에 이끌리기가 일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몇 날 몇시까지 모리아산으로 와야 한다고 시간을 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2박 3일이 걸리건 230일이 걸리건 우리들의 진행 속도에 달려 있습니다. 천천히 가든지,제자리 걸음을 하든지,돌아서든지,아예 가지를 말든지,모두 우리들의 결정과 실행에 달려 있습니다. 순종은 우리가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해주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모두 아브라함처럼 모리아산의 제단으로 나아오라고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곧장 가면 '제 삼일에'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얼마동안 그 산을 향해 걸어 왔습니까 제 삼일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직 지시한 산이 시야에 안 들어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직 믿음과 순종의 걸음만이 제 삼일에 나를 모리아산이 보이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리아산으로 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들의 믿음과 자발적인 순종의 절대 가치를 재는 시금석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처음으로 믿게되었을 때 아브라함처럼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장을 꾸린 자들어었습니다. 이때 이미 우리들의 목적지는 모리아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자고 정해 주신 곳은 모리아산의 제단이었습니다. 그 곳이 모든 순례자들의 최종 집결지입니다. 그 곳에서 모든 성도들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 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리아 산은 우리가 죽기 전에 겨우 한번 가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지리적인 순례에서는 목적지는 제일 나중에 닿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 순례에서는 목표는 변하지 않을 지라도 목적지는 날마다 가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내가 나의 이삭을 주의 제단 위에 올려 놓으면 그 제단이 곧 모리아산의 제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주 앞에 전폭적인 순종과 헌신으로 살면 그것이 곧 모리아 산의 체험입니다. 우리에게는 먼 후일에 등반케 될 모리아산이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올라가야 할 오늘의 모리아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의 모리아산 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쥐고 있는 그 마지막 한 가지를 오늘 바쳐야 한다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내일이 오면 내일 바쳐야 할 우리의 이삭이 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다만 오늘의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등반하는 헌신을 지금 익혀야 할 소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4절> 하나님은 우리가 정상의 체험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모리아산의 제단 위에서만 받을 수 있는 영적 축복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있었기에 '여호와이레' 의 신앙을 극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쳤기에 선물보다 선물을 주신 자를 더 붙잡고 산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 위에서 칼을 뽑아 들었기에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요구한 본 뜻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의 제단 앞에서 자식을 제물로 내어 놓을 수 있었기에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는 원대한 축복의 약속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모리아산의 제단을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때 그의 눈에는 수풀에 걸린 수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수양은 내가 제단을 쌓고 나의 이삭을 올려놓은 후 내 손으로 비수의 칼을 높이 들 때까지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결말을 다 안 후에 제단을 쌓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제단의 희생은 각본에 짜인 연극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목적은 우리들의 믿음을 연단시키고 헌신의 결의를 다져주는데 있습니 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는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일단 헌신으로 모리아산의 제사를 단행하면 우리는 그 곳에 수양의 제물이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다시 한 번 경탄케 되는 놀라운 영적 체험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은 모리아산에 오를 자가 받는 특권입니다.

한편 우리들은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으로 올라갔던 숭고한 정신과 경건한 하산 자세를 통해서도 중요한 교훈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그의 등반 정신을 살펴봅시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아브라함은 모리아산 밑에 이르자 종들을 남겨두고 이삭만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는 인생 최대의 헌신을 드리는 엄숙한 자리에 아무도 참관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믿음의 실천장에는 관객이 필요치 않습니다.

믿음의 행위는 퍼레이드의 전시효과를 싫어합니다. 믿음의 헌신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랑도 광고도 불필요합니다. 헌신의 제단을 보시는 분은 그것을 요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헌신을 내 보이고 싶어하는 장식들과 선전들은 희생의 순수성을 오염시킬 뿐입니다. 모리아산의 제단에는 그 희생물인 이삭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보도와 사진과 관객들이 우리들의 작은 제단 위에 운집되어 있습니까 그는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이 몰라주고 하나님이 보아주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럼 끝으로 아브라함의 하산 자세를 생각해 봅시다.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합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19절> 아브라함은 5절에서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사환에게 일렀듯이 이삭과 함께 무사히 하산하였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극렬한 불시험을 통해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몸소 체득하였고 하나님의 약속은 더 깊은 차원에서 보장 받았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곧 이같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과 그의 변함없는 약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내려온 후 브엘세바로 귀향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을 오르기 전에 에셀나무를 심었었고,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제 그 땅으로 돌아가는 곳은 과연 자기의 하나님이 모든 약속과 필요를 채워 주시는 영원히 신뢰할 수 있는 분임을 다시 고백한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고백했던 어제의 제단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다시 돌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모리아산의 승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제단에서 내가 고백했던 신앙의 내용들이 오늘의 모리아산에서의 체험으로 재확인되어야만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모리아산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리아 산정의 체험이 마무리 되는 곳은 믿음의 제단을 쌓고 나의 신앙을 고백했던 브엘세바의 제단입니다. 브엘세바가 고백의 제단이라면,모리아는 실천의 제단입니다.

브엘세바에서는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21:33>, 모리아에서는 하나님이 나의 이름을 부릅니다.

브엘세바의 제단은 모리아산의 제단이 있기 때문에 제단다워 제단은 브엘세바의 제단이 있으므로 참다워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모리아의 산정에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동시에 브엘세바의 제단에서 우리들의 믿음이 다시 고백되기를 기다리는 분입니다.

모리아산은 대치시켜주는 산입니다. 나의 이삭을 바치기 위해 올라가보면 하나님이 먼저 자기의 이삭을 준비해 놓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리아산은 오를 때 까지는 나의 제단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정상에 당도하면 나의 제단은 하나님의 제단으로 변환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손에서 칼을 거두어 가십니다. 묶여진 우리의 독자를 풀어 주십니다.

모리아산은 내가 하나님의 제사를 목격하는 곳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이삭을 놓고 가슴을 저미던 고통과 한숨이 기쁨과 감사의 찬송으로 바뀌게 됩니다. 모리아산은 변화의 산입니다. 죽음의 산이 생명의 산으로 환원되는 곳입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올랐던 등산은 가벼운 걸음이 되어 하산케 됩니다. 그리하여 브엘세바의 제단으로 되돌아 갑니다. 거기서 내 하나님이 과연 신실하시며 나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능력과 자비의 주님이심을 다시 진실로 고백하게 됩니다.

모리아산에로의 부름은 여러분과 저에게도 울려지고 있습니다. 내 믿음의 여장은 지금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벌써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태양이 지기 전에,황혼이 물들기 전에,죽음의 밤이 내리기 전에, 속히 준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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