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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을 가진 사람 (창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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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이곳에 모였다. 예배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이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있는 곳이 예배이다. 곧 하나님의 부르심(Call to worship)과 찬양(Praise)과 그 분의 말씀(Word of God)과 봉헌(Offer)등의 순서를 예배가 가지고 있다. 이러한 예배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진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이곳에 모였다.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고넬료의 심정으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는 자세를 가지고 이곳에 앉아 있는 줄 믿는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계명이라고도 하고 혹은 약속이라고도 말한다. 이 약속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사람들은 약속에 대하여 객체이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에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을 담은 책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 세상에서 성취되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약속의 현장이다. 우리는 이 약속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는 모습을 하나씩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생 곧 우리의 삶이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잘 아시는 대로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된다. 구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옛 언약이다. 옛 언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하는 약속이다. 메시야는 이스라엘과 온 인류의 희망이다. 약속대로 메시야는 오셨다. 유대땅 베들레헴에 사람의 모습을 입으시고 오셨다. 때로는 왕같이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고, 때로는 종처럼, 때로는 평범한 사람의 모양으로 생애를 보내셨다. 그러고는 어느 날 하나님의 약속하신 때라고 하시면서 갈보리 동산에 올라가 십자가를 지셨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막 10:45)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여기까지가 구약의 예언이고 이 약속은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속을 따라 생애를 마감하셨다.

 신약은 무엇인가 주후 100년경 완성된 요한의 계시록까지 신약성경 속에 포함된 것은 주후 400 년 경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초대교회의 모습을 담은 신약성경의 내용은 한마디로 "다시 오시는 예수"를 말하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어느 날 약속된 그 날이 되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신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약속이다. 분명한 언약이다. 우리는 지금 이 언약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약속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그를 가리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한다. 또는 믿음의 조상이라고도 말한다. 아브라함 ! 그런데 아브라함이라고 해서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인간적인 약점은 있었다.

 예를 들면 ......

하란을 떠나라 하실 때 네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였는데 조카 롯과 동행한 일이다.

벧엘 땅에 기근이 있어서 애굽에 내려 간 적이 있었다. 애굽에 가 보니 그 사람들이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보고 아름답다고 탐을 내는 것이었다. 바로왕 앞에 이끌려 갔을 때 사래는 자기가 아브라함의 아내라 하지 않고 누이라고 속였다. 우리가 그 당시의 사회문화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해석을 말하기 어려우나 이와 같은 거짓 증거로 애급왕 바로를 당황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곧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비록 사래의 요청이긴 하였지만 그녀의 몸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일이다.

 약속을 가진 아브라함이 자녀에 대한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녀를 생산하였다. 하란을 떠난지 10년만에 생긴 일이었다. 10년 동안을 잘 기다리다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얻기는 하였으나 그 후로 생긴 고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곧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들이 계속하여 다투는 현실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에게 약점이 있었으나 우리가 그를 말하는 것은

1. 75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다.(창 12:1-) 아브라함이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은 너의 본토,친척,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정든 땅 하란을 떠난 때가 75 세였다. 창 12:4 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다고 기록하였다. 후세에 기록된 히브리서 11 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라고 기록하였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75세가 되도록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연령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하였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 언제까지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떠났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떠나 가나안 땅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벧엘이라는 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창 12:5)

2. 절망의 순간에도 약속이 있었다.

창세기 13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지는 장면을 본다. 원인이야 종들의 다툼 때문이지만 혈육이 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서운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조카 롯이 여러가지 입지조건이 좋은 쪽을 선택하고 떠났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더없이 서운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같은' 넉넉한 삶의 터전을 놓쳐버린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하나님께서는 절망의 순간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일깨워 주셨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헤브론으로 장막을 옮기고 제단을 쌓았다.

 3. 의심이 있을 때에도 그를 붙드셨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후손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깊은 시름이었다. 우리나라 속담에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있다. 저는 그 속담의 근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듯이 자녀가 많다보면 자연히 우수사려가 많이 있으니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뜻이리라.

 아브라함이 고향 땅 하란을 떠날 때에 너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였는데 1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으니 염려가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끌고 장막 밖으로 나가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 너 하늘을 우러러 부고 저 별들을 세어 보라. 저 별들을 다 셀 수 있겠느냐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별처럼 무수한 자녀들을 주시마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아브라함은 그 후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4. 희생을 요구하실 때에도 아브라함은 약속을 기억하였다.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모리아산의 사건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너무도 잘 아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지시하신 대로 모리아 산을 향하여 사흘 길을 간 후에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에 올려놓고 아들을 잡으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만류하셨다. 바울 선생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리켜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고 기록하였다. 과연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는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고 말씀하셨고 그 약속은 오늘 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믿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렇게 모리아 산의 제물로 드리려 했던 아들은 하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25년만에 얻은 아들이다. 다시 말하면 4 반세기, 이 말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25년만에 약속이 응답되었다는 말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아무리 시대가 발전하고 급변해 간다고 해도 변함없이 가지고 있어야 할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가 있다면 또 그것은 무엇인가

1.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권 (요 1:12)

2. 자기 죄를 고백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 (요일 1:9)

3.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자에게 주시는 응답 (요 14:14)

4. 충성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 (마 25:21,)

5.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에게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 (계 14:21:)

2차 대전 당시 오랫동안 편지로 교제하던 젊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사랑은 오로지 종이에 담겨진 잉크 속에서 진하게 전달될 뿐이었다. 지금처럼 사진 한장 전해 받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두 사람의 사이였지만 그렇게 뜨거울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였었다. 두 사람은 만나고 싶은 생각이 불같았지만 너무 거리가 멀고 전쟁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전쟁이 끝나고 용맹있는 전사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때에 사랑하는 여인이 사는 곳을 들려서 꼭 만나고 싶다고 편지를 썼다. 그러나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데 어찌하랴 여인은 편지에 쓰기를 한 송이 장미꽃을 들고 역 맞은편 전봇대 아래 서있겠노라고 회답을 하였다. 청년은 귀대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여인도 그 날을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렸다. 기차를 타고 가는 병사는 여인의 얼굴을 그리며 기차 바퀴가 더 빨리 굴러가기를 재촉하였다.

마침내 병사가 역 광장에 내려섰을 때는 날이 어둑해 질 무렵이었다. 맞은 편 전봇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들어오는 장미꽃 한 송이는 얼마나 붉게 타오르는지......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옷차림이나 얼굴을 볼 때 청년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병사가 생각했던 그런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40은 훨씬 넘어 보이는 중년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생각하였다. 그냥 갈까 모른 체 하고 떠나가자. 그냥 가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을..... 얼마동안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장미꽃을 손에 들고 있는 여인도 그냥 그곳에 서서 초조한듯 서있었다. 자 어쩔 것인가 가서 내 이름을 대고 만나보고 싶었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떠나 갈 것인가 망설이다가 그는 결심하였다. 만나자. 그녀와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병사가 다가서서 말했다. 내가 바로 당신과 약속한 아무개 병사요.

그때 이 여인은 대답하였다. '나 참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소! 웬 아가씨가 나더러 잠깐만 이 장미꽃을 들고 서있으라기에 들고 있는 것뿐이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장미꽃의 주인이 나타났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약속은 지켜질 때에 가치가 있는 법이다. 스펄전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3,000 가지 이상의 약속을 이 책 속에 담아 놓으셨다고 말하였다. 이 약속은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진다. 바울은 히 6:17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않음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 하였다. 고후 1:20 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기록하였다. 약속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더구나 그 약속의 주체자가 분명하신 분일 수록 더욱 크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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