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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한이 본 수난과 부활 (요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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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은 18장에서부터 21장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 에 관계된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복음서의 끝부분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가지 말씀과 교훈들을 주시다가 갑자기 주님의 수난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 절정 을 맞으면서 급격히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다른 공관복음도 이와같은 흐름 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는 수난 이후의 사건들이 아주 급하게 돌아가면서 끝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이전까지는 어떤 사건보다도 그 사건이 갖는 뜻과 의미들에 대하여 훨씬 많이 할애되어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런 데 18장 이후부터는 별로 설명이 없이 수난 당하신 사건과 부활로 끝애 버려서 여태 껏 진행되었던 속도에 비하여 굉장히 급박한 느낌을 줍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없었더라면 아마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만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그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제 자들이 예수님의 하신 일들과 말씀들을 꺼꾸로 그 의미를 재추적하게 되었던 것입니 다. 그러므로 복음서 뒤에 나타나는 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사건이 예수님의 삶 과 말씀 그 모든 것들의 의미들을 뒤짚어서 생각한게 해줄 정도로 복음서 앞부분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수난과 부활은 복음서에 있 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갖는 엄청난 사실과 충격이 있어져야만이 그것을 기초로 해서 드디어 예수님의 말씀들이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수난과 부활이 예수님에게 없었다면 예수님의 말씀들과 그 생애는 그냥 세상 역사가들이 이야기 하 는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분에 불과하고 말 것입니다. 그저 좋은 말씀을 하신 분, 옳은 말씀을 하신 분으로 끝났다면 성경은 참으로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 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지 모르는 것 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기록은 앞에 나온 마태 마 가 누가복음과는 아주 판이합니다. 앞의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같은 시각 속에서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이 가졌던 시각과는 다른 면에서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과 진리의 내용을 전 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요18-21장에 걸쳐서 나오는 이 수난과 부활 사건에 있어 중요한 개괄들을 먼저 살펴봄으로 다 풍성한 우리 신앙의 기초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요한복음 18-21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기록에 있어서 먼저 특이한 점 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서 와는 달리 예수님의 수난이 감상적인 차원에서 기록 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어떤 감정적인 분위기가 먼 저 떠오릅니까 승리로 보입니까 아니면 처절한 것으로 보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 그러면 먼저 비감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찬송 가사 중에서도 `걸음 마다 자욱마다 피로 물든 골고다 언덕길...'라는 가사가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수난 이라고 그러면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 같았던 기도, 처절한 피로 물든 십자가 등으로 거의 색칠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감상들입니다. 물론 이것이 성경의 묘사 가운데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26:36-38절을 보십시다. "( 마 26:36-38)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 기 앉 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 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여기에 고민하여 슬퍼하셨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묘사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일을 얼마나 어려워 하셨는가 힘들어 하셨 는가 하는 묘사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을 보십시다. (막 14:32-34)"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 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베드 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또 누가복음 22장을 보시겠습니다. (눅 22:39-44)"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 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 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 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 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 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 막 15: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 기록이 누가 복음에서도 나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오늘 우리가 살피는 이 요한복음에서는 그런 묘사들이 전혀 없습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해 보이느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 것은 상당히 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만 해도 여기엔 기도한 사건부터 없습니다. 기도한 사건도 없고 거저 기드론 시내를 거쳐 동산에 가셨는데 잡으로 왔 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다른 공관복음에서 본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수난이 얼마나 힘들어 하셨고 이 수난이 얼마나 처절한 것이었느냐 하는 묘사 보다 는 당당한 묘사가 더 많습니다. 예를들면 너희가 홰 나왔느냐 예수를 잡으러 왔다 가 내가 그로다. 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이렇게 상당히 당당하신데 그 당당하사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이런 표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요 18:4-6)"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 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 드러지는지라" 여기서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 지는지라'는 말씀은 `튕겨져 나가 땅 에 곤두박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명히 앞에 나온 공관복음의 표현과는 다른 표현입니다. 공관복음은 할 수만 있으면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하시는 모습으로 그려 져 있다면 여기서는 전혀 드릅니다. 수난 당하시는 것이 잘 하시는 일 같고 승리의 길 같고 기쁜 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당당히 오시고 찾으러 오니까 `바로 나다 !'라고 하십니다. 이 때에 그 말이 얼마나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었든지 그 말을 들 은 사람들이 잡으러 왔다가 오히려 놀라서 나가 떨어져 엎드러 지는 것입니다. 그러 니까,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군졸들의 검과 창에 의하여 잡혀간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잡혀 주신 것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감히 주님을 잡혀 주신 것입 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잡혀 줄테니까, 내 제자들은 너희 가 찾는 자들이 아니니 보내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보내줍니다. 무슨 협상이 아 닙니다. 이 제자들을 보내주면 내가 잡혀주겠다가 아니라, 내 제자들을 보내라 나만 잡히면 되지 않느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잡혀 가셔서도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는 최후의 음성이라든가, 예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가 시다가 피곤하셔서 못 지고 가고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갔더라는 그런 기록들이 전혀 없습니다. 아주 놀라운 기록입니다.

요18:19절 이하에서도 빌라도와 대제사장 앞에서의 심문당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굉장히 당당하십니다. (요18:19-23)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 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 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 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 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 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 를 치느냐 하시더라" 체포된 자 같은 모습이 여기에 하나도 없습니다.

(요18:33-37)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 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 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 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 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 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당당하게 왕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19장을 보십시다.

(요19:8-11)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 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 세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 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요19:21-22)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 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 요 19:28-30)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 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 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나도 고난과 고통과 처절한 묘사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에 자 기를 스스로 맡기시는 모습으로 나와 있습니다. `네가 왕이냐' `왕이다!' `내 제자 들을 보내라!'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기 위해서 왔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래서 마지막 돌아가시는 장면도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기억할만한 구절입니다.

(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여러분, 사람이 죽으면 고개가 떨어지는 겁니까 아 니면 고개가 떨어지면 죽는겁니까 죽어서 고개가 떨어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여기 주님에 대한 묘사는 다릅니다. 고개를 숙이시고 나서 그 영혼이 떠나 가십니다. 다 시말해 예수님께서 허락하셔야 비로소 죽음이 찾아 왔던 것입니다. 죽음이 예수님을 결코 찾아 올 수 없습니다. 단지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기록이 다른 기록들과 다른 특성들입니다.

28절 이후에도 보면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 시려고 `내가 목 마르다!'하십니다. 다른 복음서의 기록과는 그 관점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목마른 것도 그 분이 목말라서 목 마르다기 보다 말씀이 응하게 하려고 함이었으며, 예수님이 그렇게 호락호락 잡혀가실 분이 아니신데 바로 그 말씀을 이 루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 요한복음이 기록하고 싶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요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 아 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믿게 하며 그를 힘입어 그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게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만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 신가와 그를 힘입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기에 모든 힌트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강조는 상대적으로 인간은 무엇인가가를 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망 아래 자신을 두시고 십자가를 지시러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느냐는 말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요한복음 이 의도되어 있는 것이므로 요한복음 1장부터 인생이 자기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을 모르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 1:9-11)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인이 없이 나아가는 신앙은 그야말로 성령의 뜻을 거스리는 정 욕을 따라사는 생활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같은 생활을 디모데전서 6장에 서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딤전6:3-5)"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 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과 변 론고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 나느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은사 베스트 Three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병고치는 은사. 둘째가, 예언 은사. 셋째가, 방언 은사입니다. 그런데 왜 이같은 은사를 그토록 많이 받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이 은사를 이익의 재료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면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여기기 때문에 교회 안에 다툼이 그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일들을 신령한 경건 을 위한 목적으로 사모하지 않고 단지 육신적이고 인위적인 이해관계로 인하여 추구 한다면 십자가를 밀쳐내는 행위요, 다 사기일 뿐입니다.

오늘날은 예수믿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왜 어려워졌 을까요 그것은 물질적으로 부요하여졌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번영만큼 신앙에 큰 유혹도 더 없습니다. 물질적 이익에 철저히 단련된 사람들이 무엇이 답답해서 주일 아침 일찍 교회에 나아오겠습니까 신앙을 육적인 이익의 재료로 계산하는 사고방식 속에는 참 신앙이 자리잡을 틈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신앙은 경건 을 육적인 이익의 재료로 여기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며, 영원한 나라가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원하시는 뜻을 나도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차원의 신앙 이 참 신앙의 차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믿고 기독교인이 된 것을 교양인이 되는 것으로 가지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나오고 신앙 생활이라는 것을 하면 여러분에게 무슨 좋은 교훈되는 일 이 많을 것이며, 이익거리가 많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신앙생활한다면 그것이야말 로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길은 영원한 것이고 지리에 관한 것입니다. 이 예수믿는것 때문 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요구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 부정적으로 되어버렸습니다. `목사가 하는 말은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목사를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다'하는 말을 이제는 더 이상 마음으로 받으려 하지 않는 것 입니다. `목사가 시키면 하나님이 시키는 줄 알고 무조건 순종해야지 듣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다'하는 말이 맞기도 했고 안 맞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천벌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면서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같은 이야기들이 다 맞는 말이 아닙 니다. 어떤 말은 맞고 어떤 말은 안 맞는 것도 있습니다. 맞는 것은 문제가 안되는 데 안맞고 틀리는 대목에 와서는 그만 그것을 핑게로 삼아 신앙이라는 것을 모두다 집어 던져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교회에 왔더니 누구는 보기 싫고, 누구는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 믿을련다'하는 이야기들을 한다는 것입니 다. 그러나 이 모든 잘못은 근본적으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난 누가 헌금 좀 내고 생색내는 것이 보기 싫어서 그렇게는 안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여러분 자 신이 손해입니다. `누가 새벽기도 좀 한다고 설쳐서 나는 기도 안 해' 이것도 자기 가 기도 안한 만큼 손해입니다. 공부 좀하고, 돈 있다고 큰 소리치는 보기 싫은 사 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하여 `난 이같이 꼴 보기 싫은 세상은 살 기 싫다!' 한다면 여러분 손해입니다. 꼴 보기 싫은 것은 꼴 보기 싫은 것이고, 살 기는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무 쉽게 믿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하여 너무 쉽게 포기하지도 마십시 오. 무엇이 기독교입니까 사실에 관한 것이요, 진리에 관한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딤후4:1-8)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 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 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 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여러분에게는 이런 사모함이 있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온당치 못한 일들 투성이입 니다.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이 오류투성이입니다. 세상 일은 본래 그렇다손치 더라도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이 진리를 사수하지 않는 일을 볼 때에 더더욱 속 썩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마저도 여러분들을 시험에 빠지지 말게 하셔야 합니 다. 하나님은 결코 빈틈이 없으시고 정확하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호리라도 남김없 이 계산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그분은 우리를 지키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지키 시며 보고 계십니다. 억울한 일들도 다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너무 억울해 하 지 마시고 시험케 하는 일들에 쉽게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결론>

목사가 실수를 합니까 장로가 실수를 합니까 혹 어떤 권사나 집사가 실수를 합 니까 그런 일들을 보고 겪었다고 하여 내가 믿고 따라야 할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후퇴하는 일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나가서 입빠른 소리 하지 마십시오. 누가 어쩌고 누가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그런 이야기는 할 것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 신앙을 바 로 준행하십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주 님이 오셨으면 우리는 다 그 앞에 죄인들입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을 붙잡아 이 약 속과 이 영혼을 준비하는 길에서 여러분이 이탈되지 않도록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게 하 신 사실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붙잡으시 기 바랍니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기로 작정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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