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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 (요 04: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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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를 지나시다가 행로에 지치신셔서 우물곁에 앉으셨을 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한 사마리아 연인이 예수님과 대화 의 대화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피곤하고 지치신 예수님을 위해서 동 네에서 먹을 것을 준비해 와서 예수님께 드렸더니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 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중심 내용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피곤 하셨고, 제자들이 볼 때에도 마땅히 양식이 필요했었는 데도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시 면서 그것을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데 대하여 깊이 연구를 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물론 이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하면 간단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먹고 마시는 것보다 한 영혼을 중생시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말 하는 것이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쉽게 이야기 할 만큼 간단 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가 명분론자들입니다. 그래서 현실론과 명분론이 말 싸움 을 하면 항상 명분론이 이겼습니다. 왜 이깁니까 명분을 앞세우다 본면 처절하게 싸워야 하는 현실을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다분이 있기 때문에 이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분론에 있어서 가장 큰 위험성은 성급한 결론입니다. 결론이 멋있고 위대하다는 것은 좀처럼 놓치지 않으면서 그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 겪는 온 갖 힘들고 어려운 처절한 과정과 방법과 인내와 갈등들은 간과해(그냥 지나쳐)버리 는 것이 명분론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 육신의 피곤함을 인하 여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을 먹는 것보다는 죽어가는 한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돌 아오게 한 것을 양식이라고 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포함된 의미를 다 파헤체지 못하면 이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감격 으로 와 닿지를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문제 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모를 양식이 나에게 있다'고 하신 이 말씀은 그렇게 쉬운 이 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와 동떨어진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가 모방해 본 받아야 할 말씀인 동시에 실제로 생활 속에서 있어져야 할 이야기 입 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양식이 무었이며 왜 이같은 이야기를 꺼 내셨는 지 를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양식이다'라고 하는 말을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밥을 먹는 것보 다 이것이 더 좋다'는 의미입니다. 즉, '나는 양식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뜻입 니다.

예수님게서는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향해 가시는 중이셨습니다. 이스라 엘의 지도를 보면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처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예루살렘은 지도의 중간 아랫 부분에 있으며, 갈릴리 지방은 윗 부분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 고 사마리아 지방은 갈릴리 지방으로 가는 도중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살펴 보고자 하는 점은 과연 예수님께서 우연히 갈릴리로 가는 도중에 생긴 사건이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말씀에 '나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고 하셨는데 밥보다 더 좋아하 할 일이 그렇게 우연히 할 수 있느냐고 다시 반문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밥먹는 일보다 더 좋 아하는 일을 우연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때를 걸르지 않고 먹는 문 제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적어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먹는 문제는 절실하고 선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먹는 문제보다 더 좋 은 일이 있다면 그것음 분명히 우연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분명히 의 도되고 계획된 집념 속에서 성취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요한복음 4장의 사건을 읽으면 예수님께서 그저 우연 히 갈릴리행 길에 피곤하셔서 잠시 쉰 사마리아 한 동네에서 기회가 오자 전도하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느낌을 받을 뿐이지 사실은 그렇 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저 잠시 쉬려고 않았다가 생긴 사건이 아니라 이 사건은 예 수님께서 이미 의도하시고 계획하신 집념의 사건이라 것이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부분입니다.

요4:3-4절을 보십시다. "유대를 떠나사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라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여기에는 우리말 개역 성경이 갖는 약점 하나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최근에 나온 아주 좋은 번역판인 현대어 성경을 첨가해서 읽으면 훨씬 좋습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 지방으로 되돌아가기로 하셨다. 그곳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지나가야만 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 개역 성경에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하는 말씀에서 우리는 지리적조건 때문에 사마리아를 길목으로 삼아 통과할 수 밖 에 없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원본인 헬라어로 쓰인 것을 직역하면 "사마리 라를 통과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었다" 우리 개역 성경의 교본인 KJV번역에서는 mus t 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통과해 지나가는 것이 갈릴 리로 가기 위한 지리적 통과 지점으로서 필수적인 것이냐 아니면 갈릴리로 가는데 사마리아에도 볼일이 있었기 때문에 들렸던 것이냐 하는 두가지 추측을 낳게 합니 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앉으신 것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4:6절을 보면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여기까지의 말씀을 보아서는 행로에 지치신 예수님께서 잠시 우물 곁에 앉으신 것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럽고 평범한 일 같습니다. 하지만 그 뒷 말씀을 보면 더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4:38절에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는 '노력하였 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노력하였다'는 말은 힘쓰고 애섰다는 말로서 앞의 4:6절 의 '행로에 곤하여'라는 말과 같은 단어로 원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싸우고 싸워서 지치고 피곤한 상태를 이야기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가운데서 예수님은 갈릴리를 향하여 가시다가 치치셔서 잠간 쉬시기만 하려고 앉았다가 우연히 생긴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수 가성의 여인 사건은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하여 기진 맥진할 정도로 힘을 들여 일부러 그곳까지 가셨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한 이름없는 여인을 만나시기 위하여 애를 쓰 고 있는 힘을 다하여 가시더니 우물이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앉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한 인간을 찾아오시고 구원하는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대단한 집념과 열심을 가지시는가를 이 사건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본문 34절을 보면 더욱더 분명해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엇습니다. 제 자들이 볼때에는 단지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다가 도중에 지치셔서 쉬신것으로 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단에게 종된 자를 빼앗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여러가지 영적인 전투와 영적인 방해요소를 뚫고 여기까지 들어오시는 집념이 있었다는 표현으로서 그렇게 지쳐 쉬시는 것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침내 그 한 목적지에 도달하였으며, 그리고 만난것입니다. 정작 본 싸움 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될 것은 싸우러 오 는 지점까지도 굉장한 싸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로가 거칠고 길었기 때문 이라기보다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십자가를 지시는 육체적인 아픔 때문에 어려웠 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어려웠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단 절되고 죄인 취급 당하시는 것을 참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면서 울부짖었으며 "할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픔이 있으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시는 문제는 훨씬 쉬웠을지 모릅니다. 게세마네 동산의 번민과 단절의 고통이 더 어려웠지 피흘리고 살 찢으신 십자가의 골고다는 쉬웠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만남의 지점까지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힘든 싸움인 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까이 다가 올수록 예수님께서는 더욱 애쓰 고 힘을 쓰시면서 마침내는 죽은 한 영혼 앞에까지 당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한 영혼을 찾아오는 그것이 왜 어려울까요 그것은 우리는 중립지대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존재가 아니라 사탄과 죄의 노예가 되어 남의 집 창고에 갇혀있는 자와 같은 신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뚫고 들어와 결박을 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여기까지 오셔서 우리를 건지고 구출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이 내 양식이며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나의 일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이 무었을 의미하는지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6:38-39절에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이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 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포함된 자들이 모두 구원된다는 것은 장로교의 예정론입니다 만 이것만큼 은혜로우면서도 어려운 교리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예정하셔서 구원하셨다면 우리가 할 일을 하나님께서 다 하셨고, 또한 우리 가 예정되어 있으므로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 전의 말씀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시면서 누구 누구가 내 백성이니 저들을 살리라고 말 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계획을 세우는 것과 그것을 이 루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계획을 세운 것을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 하는 것이 능력에 관한 문제일 뿐 아니라, 정성이 따르는 문제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능력이 모자라서 못 하시는 일이 없다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능력이 우리를 마치 로보트를 다루거나 무슨 마법의 지팡이 같은 것으 로 툭 건드리기만 하면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변해 버리는 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서 대면하여 설득하고 항복시키는 정성어린 작업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사실을 알려주는 대목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하는 "이것이 나의 양식이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를 설득시키는데 있어서 3번쯤 설명했다가 안되면 '무조건 따라와!'하는 식으로는 절대 안하십니다.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우리가 기꺼이 항 복할때 까지 하십니다. 셋을 셀 때까지 안 하면 다섯을 세시고, 다섯까지 세셨다가 안되면 열까지 세십니다. 한번 때려서 안되면 두 번 때리시고 설명하시고, ....

우리가 학교에 다닐때 선생님은 보통 두어번 까지는 설명을 잘 하십니다. 그러다 가도 한 번만 더 설명을 해 달라고 요구하면야단칠 기세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신의 자녀로 삼으셨다 하면 그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권세를 깨뜨리시고 우리를 붙잡고 씨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뜰ㅎ고 들어와 항복 시키시는데 얼마 나 많은 시간과 많은 정성을 기울이시는 지 모릅니다. 이제 저 정도면 포기하고 돌 아가시겠지 할 정도가 되어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침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시자 사마리 아 여인은 놀라서 '어찌하여 유대인인 당신이 내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묻습니 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누군줄 알았더면 네게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 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4:28-29절에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런데 이 여자가 이렇게 항복하기 까지 어떻게 하였습니까 "당신이 어찌하여 유 대인으로서 사마리아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하고 반문을 하기도 하였 으며, "우물은 깊고 바가지 하나도 안 들고 무슨 재주로 생수를 얻겠습니까" 하며 의아해 하였던 것입니다. 좀처럼 쉽게 굴복되어 질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 수님은 끈기있게 정성을 기울이므로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본문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붙잡고 끝까지 애를 쓰셔서 마침내 항복했다는 사실을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예수님에게는 밥을 먹는 일보다 좋으시다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같은 사역이 있으시길래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앉을 수 있 는 것입니다.

사람처럼 말을 잘 안 듣는 것도 없습니다. 말로만 하면 잘 듣지를 않습니다. 때려 도 보지만 그래도 말 안듣는 사람은 마찬가지 입니다. 심지어는 죽인다고 해도 잘 듣지 않습니다. 사람은 결코 논쟁 앞에 항복하지 않습니다. 노쟁을 하여 이기고 나 면 증오심만 남게되고, 지면 열등감이 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 무었이냐 하면 대화로 푼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화를 통하여 풀수 있고 해결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가 가볍 고 쉬운 문제들에 해당되는 이야기 입니다.

인생이란 무었이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었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죽음 이 후에는 어떻게 는 것인가 하는 적어도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대화를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대화를 통하여 오히려 체념하 고 그럭 저럭 적응하며 사는 것이라 하여 문제를 덮어놓는 것을 해결이라고 가리킵 니다. 그러므로 대화라는 것으로 만사가 다 해결될 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인간들 끼리의 대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대화롸 힘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예수님의 간섭으로 해결 된다는 사실을 선언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며 그 목숨을 잃기까지 여러분을 찾아오신 그 열심이 오늘도 여러분의 인생을 간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한 번이라도 여러분에게 이슬람 교도들같이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협박하며 강요하신 적이 있습니까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몸을 상하시고 찢기시고 그리고 도망가고 피하고 배반하는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열심으로 감동시키셨고 그래서 스스로 항복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결론>

우리는 종종 이러한 불평을 합니다. 나도 삭개오 같았으면, 나도 바울처럼 가던 길에서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 주셨더라면, 나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말씀하셨더라면 멀마나 좋을까 이런 식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들만의 특수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 리스도께 어떻게 간섭을 받으며, 어떻게 그의 손에 붙잡힙을 당한 자들인가를 설명 하기 위하여 있는 몇가지 사례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여러분들도 직접 예수님의 방문을 받은 자들이고, 예수님께서 손으로 여러분을 잡 아 흔드신 사람들입니다. 아니라고 거부하지 마시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스 스로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무지 이 자리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내가 잘 믿고 반응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주께서 어떠 한 결심을 하시고 찾아 오셨는가를 기억할 줄 모른다면 여러분은 예수를 믿게된 감 격과 그 축복들을 절반 이상은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나를 향하여 갖고 계씨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과 나에게 간섭하시고 내 생애 속에 뛰어들오 오셔서 오늘도 씨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손길을 인식하고 깨달을 줄 아시는 여러분이 되시 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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