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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나의 기도 (욘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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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가뭄이 계속되고 있어서 모두가 안타까와하고 있습니다.성경에도 여름에 관한 내용을 담은 말씀들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시 34:2에 보면 시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아모스서에서는 이스라엘의 무르익은 죄악의 현실을 무르익은 여름과일로 비유하며 이런 말씀을 합니다.“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었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이다.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라” 그러나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실감나게하는 말씀은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요나서는 여름을 배경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그러나 오늘의 말씀 속에는 여름보다 더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의 기록되고 있습니다.

요나서는 B.C750년경에 기록된 책입니다.어느날 하나님은 요나라는 선지자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이웃나라인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훼라는 성에가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메세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그러나 요나는 어디로 갔습니까.다시스라는 곳으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하게 됩니다.그러나 그 배는 곧 풍랑을 만나게 되고 요나는 결국 제비뽑기에 걸려서 풍랑이 이는 바다로 던져졌습니다.

죽을 줄 알았던 요나는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고 3일간의 식음을 전폐한 깊은 회개 후에 요나는 다시 니느훼근처의 바닷가에 토해집니다.

그는 다시 곧 니느훼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전합니다. 그 말을 듣고 니느훼백성들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올라가서 회개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니느훼백성을 못마땅히 여긴 그는 하나님께 불평스런 기도를 하며 못마땅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주일학교에 다닐때 여름성경학교에서 이 요나의 이야기를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배를 타고 노를 젓는 율동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었습니다.하지만 그 때는 단지 흥미있는 이야기로만 들렸지만 나중에 요나서를 다시 볼 때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진 깊은 감동을 주는 말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4:1을 보십시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라는 말씀으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요나의 마음을 말해주는 두 가지의 단어가 쓰였습니다.『싫어하다』,『분노하다』여기에 이 단어를 수식하는 『심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그냥 보통의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극도로 싫고 극도로 화가난 마음의 상태를 가르키는 것입니다.사 여러분 요나는 왜 이렇게 극도로 화가 났을까요.그가 외쳤던대로 니느훼백성들은 회개하였는데 기뻐해야 옳지 않습니까.오히려 환영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요나는 이토록 분노를 하고 있단 말입니까.

우선 첮째 이유는 정지적인 것에 있습니다.앗수르라는 나라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대관게에 있는 강대국입니다.722년에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도 앗수르라는 나라입니다.많은 이웃나라들이 조공을 바쳤습니다.니느훼라는 도시는 어느 도시보다 화려하고 웅장했습니다.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스핑크스가 지키는 거대한 왕궁과 왕립도서관이 있었으며 수로를 뚫고 물을 끌어들이고 26000개의 서판들을 통하여 볼 때 각종문화와 역사 법률 사회과학을 발전시켜다고 합니다.요나는 자기 나라와 적대관게에 있는 이런 앗수르가 멸망하기를 바랬습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한 이유중에 하나도 여기에 있었습니다.포악한 그들에게 나아가기가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에는 그들의 멸망을 은근히 바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성과 같이 앗수르를 심판하신다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너희들 한번 당해봐라”이것이 요나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종교적인 이유에 있습니다.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은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하나님은 자기들만을 사랑하시며 자기민족을 선택했다고 믿었습니다.자기들만이 거룩한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방인들에 대하여 높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더우기 니느훼의 백성들은 포악한 죄악의 도시였습니다.그들은 전쟁과 사랑의 신 「이쉬타르」사냥의 신「니르누타」지혜의 신「나부」자연과 폭풍의신「아다드」등 각종 신전과 점성술이 성행하는 우상숭배의 나라입니다.나훔서에서는 니느훼의 죄악된 현실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1:14에는 우상숭배의 타락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2:11-12에서는 사자굴에 약한 짐승을 잡아다 먹이로 삼는 사자와 같이 약소국가를 삼킨 포악한 죄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3:1에는 극도로 타락한 사회적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현대어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사람을 죽인 피로 얼룩진 니느훼 도성 은 멸망하고야 만다! 도성 전체가 온갖 거짓으로 가득찼고 폭력과 불법이 온통 들어차 있다.사람을 끌어다 죽이는 일이 하루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것이 앗수르 니느훼백성의 단적인 보습입니다.이스라엘 백성이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이방인들,그들 중에서도 살인과 불법으로 얼룩진 니느훼성, 그들을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일로 이스라엘사람들은 받아들여졌고 요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는 니느훼성에서 뭐라고 외쳤습니까. 3:4을 보십시다.“사십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진다고 큰 소리로 외치며 다녔습니다.사람들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있게 외치고 다녔습니다.그런데 그만 자신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습니다.하나님의 심판이 철회되었기 때문입니다.결국 그의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이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만 셈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요나가 그토록 화를 낸 이유를 이해하시겠습니까.자기민족을 괴롭히던 나라,우상과 범죄의 온상인 이방인 나라,멸망받아 없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니느훼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니 요나는 화가 난 것입니다.자존심과 체면이 상한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런 백성을 불로 심판치 않고 그냥 두시느냐고 무언의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을 잘못알고 있었습니다.자기민족만을 사랑하는 편협한 사랑을 가진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선민이라는 종교적 우월감에 빠져있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비슷한 간증들을 듣습니다.“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셔서 직장에서 나보다 먼저 입사한 사람도 있고 동료들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진급을 시켜주셨습니다.” “불이 나서 이웃집 창고는 다 타버렸지만 우리집 창고는 볼에 그을리지도 않았습니다”.“금번 홍수로 다른집 논과 밭은 다 흙속에 묻혔지만 우리 논은 한 군데도 땅에 묻히지 않았습니다”.“이번 사고로 다른 사람은 다 다치고 죽었지만 나는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저희 교회에서만도 20명이 대학입시를 치뤘는데 오직 우리 아들만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물론 좋은 간증은 하나님의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었든 나만을 ,우리 가정만을,우리교회만을 사랑하는 편협된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그것은 내가 어떤 특별한 존재이기에 나를 사랑하셨다는 교만을 불러 올수도 있습니다.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은혜를 베푸셨을 때 그들이 어떤 특별한 존재였습니까.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잊고 종살이를 하던 노예에 불과 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에게 혹 어떤 좋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나님은 그 은혜는 누구에게나 나와 똑같이 베푸실수 있습니다.내가 어떤 의를 행했기 때문에 나에게 어떤 축복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초신자들이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무엇때문인줄 아십니까.한 조사에 의하면 먼저 믿은 사람들의 두터운 벽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기신앙 경력이든지,체험이든지 ,특별한 축복 등의 신앙적 우월감에서 해방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편견과 교만의 덧에 자신 스스로 매임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았던 바리새인 같이 되고 말것입니다.

 4:2절을 보십시다.

이렇게 화가난 요나는 하나님게 뭐라고 기도했습니까.2절에 있는 요나의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전에 이스라엘에 있을 때에 제가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은혜와 자비가 많으시기에 혹 심판을 하지 않으실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다시스로 도망한 것도 사실은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을 염려해서 였습니다.” 라는 기도입니다.

요나의 기도는 불평과 원망이 섞인 기도였습니다.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진실한 기도가 나올수 있겠습니까.심판을 철회하신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섞인 기도였습니다.요나의 기도 내용 중에 우리가 특히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한 내용이 있습니다. “주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라는 말씀입니다.비록 요나가 불평스럽게 기도했든,원망스런 마음으로 기도했든 니느훼의 사건은 문명 하나님은 자비와 인애가 크신 하나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나서를 읽으면서 이런 의문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앗수르 백성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포악하고 극도로 공격성이 강한 백성들입니다.이웃나라들을 많이 침략했습니다.오죽하면 그 성을 [피의 성]이라고 말했겠습니까.그들의 양심과 마음은 이미 딱딱하게 굳었었습니다.거기다가 그들은 온갖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입니다.마술과 점쟁이가 활보하는 성읍입니다.이스라엘과는 800㎞ 이상 떨어진 나라입니다.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대 부분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어디있는 나라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더우기 이스라엘은 자기나라보다도 아주 적은 약소국가입니다.생각해 보십시다.그런 성에 요나가 갔습니다.자기나라 사람도 아닌 이방나라의 사람이 가서 외치고 다닙니다. 많이 외치고 다닌 것도 아닙니다. 3:4절을 보면 겨우 하루 외치고 다녔습니다.

뭐라고 외쳤습니까. 단지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 질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어떤 낯선 사람이 와서 지나가면서 자기나라가 믿는 신이 하나님이 이성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말에 어떤 결과가 일어 났습니까. 3:5-8을 보십시다.엄청난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여러분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을 비유해서 생각해 보십시다.일본 근처에 우리나라 제주도만한 조그만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의 어떤 사람이 서울에와서 단 하루동안 앞으로 40일이 지나면 자기들이 믿는 신이 이 도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말을 외치고 다녔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요나서의 결과대로라면 대통령으로 부터 국무총리 이하 전 서울 시민이 식음을 전폐하고 물도마시지 않고 베옷을 입고 재위에 올라가서 울며 회개하는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지금까지 믿었던 모든 종교를 다 버리고 그 낯선 사람이 믿는 신과 종교를 따라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누가 만약 서울은 고사하고 광명시장에서 그렇게 외치고 다닌다면 아마 더위때문에 어떻게 되지 않았나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시대에는 어떻게 그런 어마어마한 변화가 가능했단 말입니까.그 사람들의 양심이 그렇게 여리고 순진했단 말입니까.그렇게 순진해서 이웃약소국가를 침략해서 사자와 같이 살인을하고 약탈을 한단 말입니까.

니느훼백성들이 회개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보고 가정을해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런 결과가 나올수 없습니다.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특별히 역사하셔서 그들 마음에 회개의 영을 주셔서 그들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그들은 회개할 능력을 잃은 사람들입니다.이미 마음이 딱딱해져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명 전적인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요나의 기도대로 은혜와 자비와 인애가 크신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이방 나라인 앗수르에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는 이방모든 족속들을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사건입니다.그리고 그 사랑의 의지는 2700여년이 지난 오늘 이 시대의 우리를 사랑하셔서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4:3절을 보십시다.

요나의 짧은 기도는 이렇게 마칩니다.“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것이 낫습니다”니느훼성이 내가 전한 말대로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겠다는 기도입니다.이 요나의 기도를 보면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 민족을 싫어하고 미워했는지 알수가 있습니다.얼마나 미웠으면 저 성읍이 멸망하지 않을바에야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기도했겠습니까.

결국은 미움이 요나를 하나님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하게 만든 것입니다.미움이 요나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게 했습니다.미움이 하나님 앞에서 원망과 불평을 낳게 만들었습니다.



미움이 그의 영적인 감각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미움이야말로 우리 마음 가운데 싸워야할 무서운 적입니다.사울왕은 이 미움을 극복하지 못해서 결국 자신이 망하게 되었습니다.여러분 오늘 여러분 중에도 마음에 혹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은 마5:43-44에서 미움에서 승리하고 해방받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물론 마음속에 미움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느냐고 물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할수 없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주님의 말씀은 권고가 아닙니다.명령입니다.내 말을 믿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지 그러면 좋지 않겠느냐가 아닙니다.그러면 우리속에 사랑의 마음을 창조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여러분 한번 이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해보십시요.여러분을 괴롭히면 미움의 덩어리가 사랑의 이유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4:4을 보십시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요나야 과연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은 것이냐” 라는 물음입니다.하나님께 원망하는 듯한 요나를 하나님은 이해해 주셨습니다..“왜 악인에게 은혜를 베푸십니까.왜 저렇게 못되게 구는 백성들에게 인애를 베푸십니까.”우리는 이렇게 질문하는 요나를 이해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용히 그에게 권고하셨습니다.어떤 차이 때문입니까.요나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겨우 자기민족의 이익이라는 이기적인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창조하신 온세계와 우주를 사랑으로 다스리시며 돌보시는 섭리의 차이입니다.하나님은 분명히 이 사건을 통해서 죄많은 이방인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우리는 때때로 나의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지 않는다고 요나와 같이 서운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다.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었습니까. 혹 나의 어떤 이기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서움함은 아니었습니까.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진다면 오히려 더 영광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엊 그제 한 선교센타에서 보내온 화보를 보았습니다.거기에 사진이 하나가 실렸는데 복음의 불모 땅인 인도네사아에 아담한 교회를 세운 선교사가족이 교회의 모습과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오늘의 시각에서 볼 때 요나는 최초의 공식적인 해외 선교사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낙심한 요나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중 혹 요나처럼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서운한 기도를 하셨던 분은 없습니까.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으로 내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때와 시간에 따른 섭리입니다.니느훼성은 그 후로 100년이 채 못가서 바벨론 나라에 의하여 역사에 사라졌습니다.



한번은 주님에게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너희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이를 말이 없도다” 왜 주님은 요나를 말씀하셨습니까.그는 3일동안 죽음과 같은 고기 뱃속에 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그리고 그 요나의 말을 믿고 회개한 백성들은 다 구원을 얻었습니다.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은 다 구원받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니느훼백성을 도저히 회개할 능력이 있어서 회개했습니까.돌이킬 수 없는 백성들이었지만 요나의 말을 믿을수 있도록 믿음을 주시고 회개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은혜로 그들은 그 성에서구원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마치 니느훼백성과 같은 사람들입니다.회개할 능력 조차도 잃었었던 사람들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에게 주님을 믿는 믿음과 를 회개의 은혜를 주심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한다면 요나와 같이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종교적 우월감도, 교만의 마음도,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도 가져야할 이유가 없습니다.단지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께서 주신 영원한 새 생명을 찬양하며 살 뿐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전 부터 우리를 사랑해 오셨던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를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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