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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이 가난한 자의 축복 (마 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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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상 성서보다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쳐온 것은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입니다. 동시에 성서속에서는 이 산상수훈보다도 더 깊이 인간의 영혼과 정신적 삶에 영향을 끼친 부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선교사가 Underwood 와 Appenzeller 인데 이 두선교사가 1884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는 이미 그들의 손에 한국말로 번역된 성경이 들려져 있었읍니다.

이 성서는 이수정이란 사람에 의해 번역이 되었는데 이 사람이 성서를 번역한 배경에 바로 이 산상수훈이 작용하게 됩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전 1881년 한국청년 몇사람이 일본에 과학기술을 배우러 갔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쯔다쎈(津田仙)이란 일본 농학자의 집을 방문했다가 한문으로 이 산상수훈을 족자로 만들어 걸어놓은 것을 읽고는 마음에 엄청난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그 뒤에 다시 일본에 영농기술을 배우러 가기로 되어있는 이 수정이란 자기 친구에게 이 족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이수정은 일본에 가자말자 영농기술을 배우는 것은 제쳐두고 맨먼저 그 일본관리의 집에 가서 자기 눈으로 이 산상수훈이 적힌 족자를 확인하고선 여기에 바로 우리나라의 여명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영농기술배우기를 포기하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성서의 한국말 번역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는 말하기를 " 나의 최대의 소망은 우리 민족에게 성서를 주는 것이다."하면서 성서를 번역하여 선교사들의 손에 들려 자기 조국에 전달하고 후일 그는 귀국하여 순교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인도의 혁명지도자 Ghandi 역시 이 산상수훈에 깊이 감동을 받아 기독교회에 소속하지 않는 기독교인이 된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복음적인 삶 전체를 밑바침하는 예수님의 정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시시때때로 이 산상수훈을 연찬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풍요를 위해 상당히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그 중의 한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이 성서연구의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설교가 성서연구의 가장 깊이있고 자세한 기회이므로 이 설교를 통해 성서묵상이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설교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것임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 설교를 세밀히 묵상하기전에 한가지 먼저 알 일이 있는데 그것은 福의 개념입니다.

이 산상수훈을 보통 영어로는 Beatitudes, 우리 말로는 八福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암시하는데로 이것을 보통 福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福으로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福이라 하면 번영 특별히 물질적 번영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여기의 福은 조금 다릅니다. 여기 복이란 말은 성서원어로는 Makarios 란 말로 쓰여져 있습니다. Kakarios 란 말은 극치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인데 희랍사람들은 Cyprus 섬을 he Makaria 즉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섬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요즈음 Cyprus 는 많이 여러면에서 오염이 되었으나 옛날 희랍사람들에게는 이 보다 더 아름답고 신선하고 깨끗하고 신비한 곳이 없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Cyprus 는 그 이상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다른 곳에서는 찾지 못하는 섬이란 뜻에서 he Makaria 라고 불렀습니다.

이 산상수훈에서 福이라고 쓰여진 말은 바로 이 더 이상의 기쁨과 아름다움이 없는 극치의 행복을 이야기 합니다. 아마 영어에선 Supreme Happiness 라고 이야기하는 표현이 그것을 서술한다고 하겠습니다.

그 다음 동시에 알아야 할 사실은 성서원어문장구조가 주는 의미입니다.
우리 말 번역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고 동사가 붙어 완전한 1형식문장이 되어 있는데 성서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동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원문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가 아니라 " 아! 마음이 가난한 자의 그 행복!" 이란 감탄문 비슷한 것이 됩니다. 문장을 완성시키면 " 아, 마음이 가난한 자의 행복,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진 것이다." 이런 식의 문장이 됩니다.

자 그러면 이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이 산상수훈은 8가지 행복중 4가지를 제외하면 똑같은 것이 누가복음 6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약간 다른 것은 누가복음의 산상수훈은 아주 혁명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럴 때는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저희가 굶주일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눅 6:20-26)

지금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 누명을 쓰는 사람들이 모두 다 고생하지만 세상이 바뀌는 그날에는 그들이 행복할 것이다. 반대로 지금 부자인 사람,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 지금 칭찬을 받는 사람은 세상이 바뀌는 그날에는 불행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상당히 혁명적이며 가난이라든가 굶주림이라든가 구체적인 경제적 가난, 사회적 멸시와 차별로 인한 고통들을 거론합니다. 그런데 이 누가복음의 산상수훈과 마태복음의 그것이 다소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이것은 공히 예수님의 산위에서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근본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다소 누가복음보다 마태복음은 그 말씀에서 더 깊이 신학적으로 몰입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가난하다"는 것의 의미는 첫째는 정말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Edward Schweitzer 라는 신약학자는 이 산상수훈을 주석하면서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편향적 사랑"( God's partiality on the poor) 이란 제목을 붙혔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가난한 사람이 훨씬 더 마음에 쓰인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늘 이런 고통받고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하게 성전이 서있고 모든 힘과 능력이 집중되어 있는 예루살렘에는 단 한번 그것고 십자가에 처형을 받기 위해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33년의 짧은 일생 대부분은 갈릴리, 즉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고통속에 사는 갈릴리변방의 사람들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픈 마음을 누구에게로 향하고 계시느냐를 여기에서 연상할 수 있습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정통 유대인 사상가인 Emmanuel Levinas 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험은 위에서부터 내려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밑으로 부터도 주어지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를 영접하는 데서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Levinas는 가난한 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시험할 수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소자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네바에서 개혁을 했던 Calvin 도 "가난한 자는 부자를 구원시키기 위하여 존재한다."라고 할 정도로 말하면서 중세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값비싸게 그린 모든 성화는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용도이외에는 아무런 용도가 없다고 했습니다.

요전에 우리가 함께 갔던 Taize 공동체가 낸 안내문을 보니까 이런 글귀가 있었읍니다. 신앙인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소명을 살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 가치를 고통받는 인간상황과 결부시키는 것이 요청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가난한 자와 연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 이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가난이 주는 의미를 더 영적인 차원에서, 더 신앙적으로 근본적인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마태복음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하면서 마음이란 말을 넣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이 경제적인 가난과 상관없는 영적인 가난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 경제적인 가난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음의 가난함까지를 연결하는 모든 가난함을 의미합니다.

여기 "가난한다"고 쓰인 이 말의 원어는 (헬라어는 Ptochos, 히브리어로는 'ani) 4가지 단계의 의미의 발전을 포함한 광범위한 언어입니다.

1. 첫번째 의미는 단순한 가난입니다. 가난하다.

2. 둘째 의미는 가난하기 때문에 힘도 도움도 기득권도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3. 셋째 의미는 그래서 세상으로 부터 없인여김을 당한다.

4. 그래서 최후에는 그들이 세상에서는 전혀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지한다.

이 마태복음이 "마음이 가난한 자의 福"이란 의미로 쓴 것이 이 발전단계에서 4번째로 소위 진화한 개념을 쓰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복은 엄청나게 크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하나님의 나라, 즉 다스림이 그들의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경제적인 가난 그리고 사회적인 차별같은 가난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 안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의 주권도 잃고 제국주의적인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가난한 민족"이라 했습니다. 무서운 강대국에 의해 다 빼앗기고 주권도 빼앗기고 엄청난 억압속에 살게 된 그 상태를 가난하다고 했고 바로 이 경험에서 이스라엘민족의 경건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그 극한적인 상황에서 의지할 것은 하나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의 가난은 결코 물질적으로는 풍부하고 오로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물질적인 것, 사회적인 것과 상관없는 정신적인 가난이 아닙니다.

삶의 혹독한 고난에서 출발하여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신뢰하게 되는 전 삶의 가난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를 배경에 두고 New English Bible 은 아주 문학적이고 설교적으로 이 문장을 번역하였습니다.

How blest are those who know their need of God;
the kingdom of Heaven is theirs.

(하나님을 필요로 함을 알고 있는 사람, 하나님이 계셔야 하겠다고 느끼는 사람을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성은 바로 이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악세사리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면 큰일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도록 강요하거나 설득을 당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붙들지 않고는 안되는 상태, 하나님에게 메달리지 않고는 안되는 상태, 그것을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의 주권만이 통합니다.

천국이라고 번역된 이 말은 "하나님의 다스리심", Calvin 이 제네바에서 가장 강조했던 말인 소위 하나님의 주권(Sovreignty of God)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전적으로 주장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최고절정의 행복이란 말입니다.

세상에 엄청난 박해와 억압과 불의와 차별이 있을 때 그 속에서 가난함을 느끼고 하나님의 자유케 하심과 하나님의 해방과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평등을 갈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축복된 삶이란 것입니다. 어느 사건을 두고 마음대로 난무하는 세상의 온갖 소리에 풍요할 때 우리는 오히려 방황하게 되고 불행하게 됩니다. 이런 세상의 풍요한 소리에 대해 가난하고 그 최후의 판단을 하나님께로부터 들으려고 하는 그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의 입각한 대답과 판단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에게 목말라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의 상관의 총애에 목말라 있고 세상이 주는 명예와 부에 목말라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마음에 수십가지 나름대로의 방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판단을 얻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비우는 그 마음의 가난이 행복합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것이 되는 구체적인 예 하나를 들고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여기 한 조각의 빵이 있습니다. 이 빵 한 조각위에는 세 가지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욕망에 기인하는 법칙입니다. 이것이 이 빵위에 작용할 때에는 그 누구가 가져가기 전에 내가 먼저 빼앗아 옵니다.

둘째는 세상의 법칙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 빵은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이 가져갈 수 있습니다. 하나의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정당성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주권이 작용하는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작용하는 법칙은 그 빵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참고 또 내가 돈을 더 많이 주고 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그것이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사람에게 건네 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는 이 말씀은 물질은 풍요롭고 생활은 넉넉하더라도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축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더 나아가서 가난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행사되고 그것을 통해 그 가난한 자가 복음의 혜택을 받도록 나의 욕심을 가난하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법칙과 상치되는 이 세상의 법칙을 가난하게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행동하는 그 사람을 일컫는 말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므로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이런 가난을 배우십시다. 억지로 여러분의 재산을 가난하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스스로의 가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법칙을 가난하게 만드는 그런 가난을 이룸으로써 하나님앞에 복된 사람이란 칭송을 받기를 기도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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