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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을 보내어 (시 107: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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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7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떠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징계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10-11절을 보면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했습니다.이것은 나라가 망하고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면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라고 했습니다.이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은 죄를 범하고 그 결과로 병에 걸리게 되며 음식도 먹지 못하고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그 거민의 악을 인하여 옥토로 염밭이 되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에 자연이 훼손되고 땅이 박토로 변해 소금밭이 된다는 것입니다.
39절을 보면 “압박과 곤란과 우환을 인하여 저희로 감소하여 비굴하게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이것은 다른 사람을 박해하고 압박한 사람들이 결국은 그 보응으로 압박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범하는 죄 때문에 전쟁에 패하여 포호가 되고 병에 걸려 죽고 땅이 박토가 되고 그리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홍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는 19-20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간절한 기도이고
둘째는,기도의 응답과 치료입니다.

1.간절한 기도를 살펴봅시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는 19절 말씀은 간절한 기도를 의미합니다.
6절과 13절에서도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는 똑같은 구절이 발견됩니다.
우리는 이 구절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1)범죄하고 멸망하게 된 존재라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라도 하나님께 접근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단,회개라는 옷을 입었을 때 그것은 가능합니다.
2)하나님께서는 죄 지은 인간들일망정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게시다는 사실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접근이 불가능합니다.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접근이 가능하고 기도가 가능하고 만남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고쳐 주실 것을 기도하는사람들의 마음가짐과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반드시 전제되고 확립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이 믿음이 없으면 기도는 하나마나입니다.
특히 위 구절들은 “부르짖으매”라고 했습니다.그 뜻은 적극적이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누구든지 응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심과 그 능력을 믿고 부르짖는 사람만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응답을 생각해 봅시다.
6절에서는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셨다”라고 했고,13절과 19절에서는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셨다”라고 했으며,20절에서는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셨다”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하나님의 응답은 구체적이며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를 드리긴 했는데 그 응답이 막연하다든지 구체성이 없다면 그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정확하고 구체적입니다.
본문은 고통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방법을 “말씀을 보내어” 그렇게 하신다고 했습니다.“말씀을 보내어”라는 것은 “말씀으로”,“말씀하심으로”,“말씀으로 오셔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어 다음과 같은 사역을 하셨습니다.1)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3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3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고 했습니다.여기서 말하는 “가라사대”라는 것은 “말씀하시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시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그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있으라”하시니 빛도 하늘도 땅도 창조되었습니다.
2)육체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14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이것을 신학에서는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왜 말씀이 육신이 되셨느냐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4-5을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여기에 육체로 오신 이유가 드러나 있습니다.즉,우리를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곁에 가까이 육체로 오셨고 사셨고 죽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14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즉,우리와 함께 순간순간 시간을 나누시고 우리와 함께 고통과 슬픔을 나누시고 죄를 대속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유럽 공동체(E.C.) 가입 국가들은 90년대부터 시작될 공동생활을 위해 여러 가지 준비들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E.C.가입 국가들간에는 자동차 면허증,의료 보험증,여권,신용 카드 등 개인이 모든 증(證)들을 하나로 통일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행 거래,상품 구매,대금 결재 등도 하나로 통일시킨다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공동체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상을 당사국들은 기울어져 가는 구라파의 경제와 정치적 역량을 재건하려는 자구책으로 보는 반면 다른 나라들은 하나의 위협과 도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똘똘 뭉친 E.C.보다 더 막강한 힘이 있습니다.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과 뭉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그래야 구원받고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고쳐 주셨습니다.
시편 107:20절은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8:5-13을 보면 유대 나라에 파견 나와 있던 로마 장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백부장이었습니다.그는 예수님을 찾아와 죽어 가는 자기의 하인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간청을 받으신 주님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시면서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그러나 그는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유는 군인 사회에서 명령만 내리면 모든 것이 진행되듯이 자신의 하인도 주님의 말씀 한 마디면 나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셨고 그 즉시 그의 하인은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보내어 고치신다는 시인의 고백과 말씀만 하셔도 자신의 하인이 낫게 될 줄고 믿는다는 백부장의 고백 속에서 말씀의 치료하시는 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하여 주님이 행하신 많은 치료의 사역들을 발견하게 됩니다.그리고 치료하신 방법들도 발견하게 됩니다.
손을 대어 고치신 경우도 있습니다.만져 주심으로 고치신 경우도 있습니다.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말씀하심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말씀 자체이시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며,그 말씀은 고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반드시 안수를 해야 병이 낫고 안찰을 해야 병이 고쳐진다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가르침입니다.더욱이 그 누구한테 안수를 받고 안찰을 받아야만 병이 낫는다는 것은 독선이며 그릇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어 고치시고 위경에서 저희를 건지신다고 했습니다.따라서 오늘날도 말씀을 듣고 만나는 사람이면 언제 어디서라도 고침받고 위경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고치십니다.
4)만족함을 주셨습니다.
시편 107:9을 보면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했고,35절에서는 “마른 땅으로 샘물이 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은 후에 얻는 것은 평안입니다.평안이란 참만족이며,영적 풍요를 의미합니다.
지금 세계는 풍요와 빈곤이 뒤엉킨 채 굴러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과소비”라는 염병을 앓고 있습니다만,세계 도처에서는 1분에 28명이 굶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그중 21명이 어린 아이들입니다).따라서 1시간에는 1,680명이,하루에는 4만 명이 1년에는 1,500만 명이 굶어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주린 영혼들,그 수조차도 셀 수 없는 영혼들이 죄의 덫에 걸려 죽어 가고 있고 먹어선 안 될 독약을 먹고 죽어 가고 있습니다.그 중에는 우리네 자식들과 청소년들이 부지 기수(不知其數)로 끼어 있습니다.
우리에겐 나누어 먹고 나누어 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돈도,쌀도,연탄도,나무도,의복도,사랑도,평안도 함께 나누어 써야 합니다.
주님은 나누어 주기 위해 이 세상에 말씀으로 오셨습니다.그리고 평안이 뭔지도 모르고 살던 우리에게 이토록 넘치는 평안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도 언젠가 본 사진 한 장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그것은 어느 외신 기자가 방글라데시에서 찍었다는 7살 난 소년의 벌거벗은 사진입니다.퉁퉁 부어 오른 얼굴과 툭 불거진 배,젖가락처럼 가는 두 팔과 다리,쑥 들어간 두 눈,그리고 그 두 눈에 가득 고여 있던 슬픔과 눈물…….두 손을 벌린 채 빵을 달라고 보채고 있던 그 모습은 지금도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평안과 소유를 나누어 쓰라고 명령하십니다.
말씀으로 오신 주여,우리 시대와 우리 영혼 속에 구원과 평안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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