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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식을 하나님께 욕되게 키우지 말라 (삼상 0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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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에서 지키는 어린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특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도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자식을 하나님께 욕되게 키우지 말라’ 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매년 어린이 날을 맞이해서 자녀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먹일 수 있으며, 아름다운 의복을 마련하여 입힐 수도 있으며, 좋은 책을 기념으로 사주어서 읽힐 수도 있으며, 어린이와 더불어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서 관광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모로서 자식에게 맞당이 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의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또한 좋은 선물과 유원지에 데리고 가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전해 주지 못하고 가르쳐 주지 못하면 비록 다른 일을 잘 해주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그 자식 앞에 죄를 짓는 것이며, 실패자의 부모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옛말에 농사 중에 자식 농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명예와 부귀와 권세를 얻었다 할지라도 자식을 자식답게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 이는 가정의 불행 부모의 불행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자식들은 우리의 보기에 귀하고 믿음직하고 순진하고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도 과연 우리의 자식들을 바라볼 때, 우리의 자식들이 하나님께 귀하고 믿음직하고 순진하고 사랑스럽습니까

아마 대부분 우리의 자식들은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의 자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면서 자라 간다면, 그들의 앞날은 뻔한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알아 뵙지 못할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마련하신 구속의 은총도 받지 못할 것이며, 소망도 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듣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면서 자란 모든 어린이들을 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리"고 말씀하셨고(잠22: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6:6-7,업6:4).

 우리의 자식들이 어릴 때에 성경 말씀을 잘 배우면 늙어도 그 말씀에서 떠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잠22:6). 그러므로 어린이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고 들려주어야 합니다. 잘 풀어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찬송가 가사에 있는 말씀과 같이 다니엘의 이야기도, 다윗왕의 역사도, 엘리야의 이야기도 들려주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생하신 일, 십자가위에서 죽으신 일 등을 눈물로 흘리면서 들려주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자식을 욕되게 키운 제사장 엘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여러분들은 절대로 자식을 제사장 엘리처럼 키우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던 제사장 엘리에게는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은 매우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서 아버지 대제사장 엘리를 돕는 제사장으로 일하고 있었으나, 여호와를 두렵게 여기지 않았고 온갖 악을 일삼았습니다. 그들은 성막 입구에서 일을 돕고 있는 여자들을 유혹하여 잠자리를 같이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날 한 예언자가 엘리에게 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어째서 너는 나보다 네 아들들을 더 소중히 여기느냐 내가 전에 너의 집안이 언제나 제사장으로 나를 섬기게 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이제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나는 누구든지 나를 소중히 여기는 자를 소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멸시할 것이다. 이제 내가 너의 집안은 젊은 사람들을 쳐서 제 명대로 살지 못하게 하고 네 집안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겠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에게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너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는 것을 보면 너는 내가 말한 것이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여호와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계속 악을 자행했으며 엘리는 그들의 악을 끝까지 제지하지 않아 결국 경고 그대로 집안이 망하고 말았다.

 하나님보다 두 아들을 더 사랑하던 엘리의 두 아들들은 전쟁터에서 한 날 한시에 죽었고 또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꺽꾸러 넘어저 목이 부러저 죽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즉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를 알려고 하지 아니하는 불량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불효하고 불량한 자가 된 것은 가정 환경이 나빠서도 아니요 가난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잘못을 범해도 제사장 엘리는 아들들에게 징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식이 잘못할 때 바로잡아 줄 책임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출생한지 몇 일, 몇 주안에 자립합니다. 송아지는 태어난지 10-12개월이면 독립합니다. 그러니 사람은 거의 20년 동안 부모 밑에서 양육 받아야 독립해 삽니다. 그것은 곧 사람은 부모 밑에서 오랫동안 양육, 받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결혼 전에는 부모가 자식이 잘못하면 꾸짖고 때려서라도 잘못은 고쳐 주고 나쁜 습관을 바로 잡아 줄 책임이 부모에게 있음을 의미합니다. 암소는 송아지가 난폭하게 젖을 빨면 뒷발로 걷어찹니다. 엄마 곰은 새끼들이 싸울 때 손바닥으로 후려칩니다. 말을 길들이는 조련사도 채찍이 없이는 훌륭한 말을 만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성선설이 아니라 성악설을 지지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인간으로 태여 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자로 태여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생태적으로 악하고 타락한 죄성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버려 두면, 살인자가 되거나 음란해지거나 하나님을 반항하거나 범죄자가 되게 마련입니다.

 시편 51편 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범죄하고 타락하는 것은 인력의 법칙처럼 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발전된 양심의 통제 아래 있게 하고 도덕적 성품을 갈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어떤 분은 아이들이 좋은 기회만 주어지면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적당한 인격 훈련과 절제와 징계 아래서만 고상한 성품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만일 아이의 잘못을 방치해 두고 죄에 대한 형벌과 절제가 없이 그냥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악해지고 반 사회적인 범죄자가 되고 맙니다. 모든 부모는 품에 안은 귀여운 아이가 가인보다 낫지 못한 타락한 성품을 지닌 아이인 것을 인식하고, 자식이 잘못을 범했을 때에는 강한 권위로 훈계하고, 때로는 매로 때리고, 눈물과 기도로 키워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모든 부모 특히 가정에 아버지는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아이들 앞에서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날 책임감이 없는 부모들이 자식이 무슨 짓을 해도 내버려두기 때문에, 불량 청소년들과 담배 피우고 술마시이고 음란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청소년들로 거리를 메우고, 십대 창녀들과 살인자들로 교도소를 꽉 메우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책임감이 없는 부모들 때문에 이 세상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것입니다. 즉 청소년들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통제나 굳건한 도덕성이 없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무서운 범죄와 타락의 해결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방법대로 양육시키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한 말씀에서 "교양"(Nurture)이란 말은 헬라어로 파이데이아(Paideia)인데, 이것은 "징계" 혹은 "채찍으로 때린다"(Chastening)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린다"(눅 23:16,22절)는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꾸짖고 때려서라도 자식을 바로 잡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식에게 벌을 주는 행위를 가져야 한다고 성경은 강력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1장 18-21절에 보면 부모 권위와 가르침에 불복종할 때는 차라리 자식을 죽이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 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 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성읍이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불효자의 징계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잘못하는 자식을 방치해 두었다가 부모를 무참하게 죽인 박한상 군과 같이되어 사회를 어지럽히고 법의 심판을 받고 사형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러한 징계가 낫지 않겠습니까 자식의 죄를 채찍질하고 부모의 복종을 강요하는 일은, 도덕적으로 바르고 또한 자식을 의롭게 양육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엘리는 위대한 사람이요 좋은 사람이었으나, 자녀들이 성전에서 음란한 짓을 하고 재물에 탐욕을 부리고 악을 행하는데도 이를 억제하거나 꾸짖거나 바로잡고 징계하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두 아들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가 그 가문에 임했습니다. 본문 2:29절에 보면"“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하시며 하나님을 진노게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2:30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이 여기리라"고 저주가 임했습니다. 엘리는 자녀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억제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대제사장으로서 악을 행한 두 아들에게 징계하고 복종케 해서 바른 길을 걷게 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만일 엘리가 두 아들을 공중 앞에서 때리거나 돌로 쳐죽였더라면 태어나지 않은 후손에게까지 저주가 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4-5절에 보면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장로의 자격이 있지 , 아무리 신령하고 열심 있고 깨끗한 생활을 해도 자녀를 훈련시킬 줄 모르면 교회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집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딤전3: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식이 악을 행할 대 매를 가지고 체벌하는 것은 성경적인 자식에 대한 교육 방법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육철학에서는 체벌을 금하고 자유방임주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교육 방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잠언 20:30에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상하게 때린다는 것은 멍들게 때린다는 말씀입니다. 자녀들이 죄에 습관이 들지 않고 멍들도록 때리고 눈물로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가 매로 자식을 징계하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이 세상에서 자녀의 습관된 악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잠언 29장 15절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내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했고, 잠언 29:17절에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했습니다. 잘못할 때 회초리를 때려야 죄의 습성이 뽑히고 좋은 성품이 형성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장차 자식은 부모의 징계와 훈련 부족으로 자식은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징계와 꾸지람이 없이 자란 아이는 죄와 함께 자란 사람입니다. 그리고 죄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식은 바른 양심을 가진 인간이 될 수 없고 부모에게 욕이 됩니다.

 그리고 자식의 징계는 조기에 실시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꾸지람과 징계는 일찍이 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머리가 굳어지고 고집이 세진 다음에는 매가 먹혀들지가 않습니다. 호박순도 어려서 방향을 잡아 줘야 잡아 준대로 자랍니다. 그래서 국민학교 때는 어머니가 매로 다스리고 중학교 때쯤 되면 엄마의 꾸지람이 효과가 없으므로 아버지가 맡아서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잠언 19장 18절에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 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했는데 이는 자식에게 체벌을 해도 소망이 있을 때 징계하란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죄의 뿌리가 깊이 박힌 다음에는 좀처럼 징계해서는 죄의 습성이 뽑히지 않습니다. 어느 훌륭한 여집사가 자신의 어머니를 존경하고 자랑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결혼식 몇일 앞두고 어머니가 웨딩 드레스를 입혀 주는데 딸이 엄마에게 불평하고 잔소리하니까 드레스를 벗겨 버리며 매를 때리면서 "너는 결혼할 만큼 나이가 들었을지 몰라도 엄마에게 건방진 말을 할만큼 자란 것은 아니다" 라고 꾸짖은 것을 평생 잊지 않고 지금까지 그녀는 그러한 어머니를 자랑하고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번은 정신과 의사인 집사님의 말을 글을 통해서 보았는데 외래 환자로 치료한 일곱살 난 여자아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치료 중에 소녀가, "우리 엄마는 날 사랑하시지 않아요. 내가 잘못을 해도 날 때리신 적이 한번도 없었거든요."하고 고백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했습니다.

 경건한 훈련을 받은 아이는 늙어도 선한 길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부모가 먼저 자식에게 바르고 경건한 본을 보여주면서 잘못할 때는 회초리로 때려서 바로 잡아 줘야 부모가 늙어도 자식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습니다.

5월 2일자 조선일보 39면에 보면 병든 아내를 더이상 수발할 수 없어 70대 노인이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은 TV안테나 선으로 2미터 높이의 창틀에 목을 매 자살을 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유서에는 늙고 병든 내 몸이 아내의 병간호를 하기에는 너무나 힘이 들고 자식들에게 덜 고생시키는 것이 현명한 것 같아 이 길을 택했다. 라고 써 있어 습니다.

 만일 자식들이 병든 어머니를 지극히 간호하고 늙으신 아버지를 정성껏 공경 했었으면 노인이 병든 아내의 수발에 지쳐 평생을 함께 살아온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도 목을 매여 죽었을까요 맞당히 자식이 늙으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병든 노모를 수발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우리가 자식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고 무시하는 처사는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키워기 때문입니다. 잠언 29장 15절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내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부모가 자식들에게 무시를 받으며 무관심 속에 살아가야 합니까 자식이 잘못을 범해도 귀여워할 줄만 알았지 자식에 대한 꾸지람과 채찍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모는 자식을 어려서부터 아이들의 못된 고집을 꺾어야 합니다. 어려서 부모에게 자기의 뜻을 굽힐 줄 모르면, 그 자식은 자라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식의 못된 습성과 고집을 꺽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때 아이들도 고통스럽고, 부모도 그만큼 고통이 따르지만, 그렇다고 자식이 잘못을 해도 부모가 매를 대지 않고 부드럽게만 꾸짖으면 청년이 되어서는 반항적이고 순종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4월 30일자 조선일보 21면에 대전시 중구 태평동에 사는 59세된 이정원씨가 35세된 아들을 살해한 뒤 아들의 시체를 토막내 야산에 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정원씨는 아들의 주벽과 행패에 견디지 못해 결국 술에 취한 아들을 흉기로 때려 숨지게 한뒤 시체를 과도와 톱으로 토막을 내어 몸뚱이는 야산에 버리고 얼굴과 양손과 다리는 돌에 매달아 공주시에 있는 금강에다 버렸습니다.

여러분 !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반항적이고 자기 고집을 절대로 꺽지 않은 자식은 커서도 제멋대로 입니다. 아들을 토막 살해한 이정원씨도 어려서부터 부모가 아들의 잘못을 방관하고 매를 들지 않았기 때문에 35세가 되어도 부모를 어려워하지 않고 부모에게 술주정과 행패를 부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청소년들이 음주와 흡연을 하고 마약하며 청소년들이 타락하는 이 유와 대학생이 교수의 머리를 깎고, 뺨을 때리는 일들도 다 부모가 자식을 어려서 매를 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식에게 차마 매를 들지 못하는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는 부모이며 자식을 버려 놓는 부모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잠 23:14절에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자식의 잘못을 보고도 부모가 매를 들지 않는 것은 자식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관심의 부족이고 감상적인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들을 짐승처럼 매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매는 자식이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할 대 때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어느 달 밝은 밤이었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바람을 쐬려고 나왔다가 무밭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얘야,내가 밭에 들어가 무를 뽑아 올 터이니 누가 오지 않나 망 좀 보아라"라고 하였다. 아이는 "네"하고 대답하고는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큼직한 무를 막 뽑으려 할 때 이것을 본 아이는 "아버지, 아버지, 누가보고 있어요"하고 소리질렀다. 아버지는 무를 그대로 놔두고 허둥지둥 뛰어 나와 한숨을 쉬면서 "어디서 누가봐"하고 물었다. 아이는 "저기 솔밭 속에서 달이 보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예끼, 못난 자식"하고 꾸짖었다. 이 때 아이는 "어째서 밭주인은 무서워하면서 달은 무서워하지 않으세요"하고 물으니 "달이 무엇이 무서우냐" 라고 하였다.

아이가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데 하나님도 무섭지 않으세요"라고 하자 아버지는 무안해서 아들을 안고 "내가 너만 못하구나"하며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훌륭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가 노름을 하면서 자식에게 놀음을 해서는 않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도독 질을 하면서 자식에게 도독 질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으로 두려워하지 않으면 자식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주일성수 하지 않으면 자식들도 안합니다. 부모가 감사 생활을 하지 않으면 자식들도 안합니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지 못하면 자식들도 하나님께 진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엘리처럼 성도의 신분으로서 하나님보다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자기 아들을 더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되면 엘리의 가정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자식을 하나님 말씀에 기준을 삼아 훈계하여 이 시대에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않는 부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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