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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몸으로 드리는 예배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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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다 지으신후 그것을 보시면서 심히 좋았더라 고 하였고, 또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할때 마다 노하셨다고도 하였고, 주님이 십자가 를 지시고 운명하실때는 슬퍼하여 해도 빛을 잃었다고 하였고, 그뿐만아니라 당신 의 뜻을 순종하는 자들을 기뻐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희노애락> 의 인격의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하나님도 좋아 할때도 있고, 노할때도 있고 슬퍼 할때도 있고, 기뻐할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 하는 예배가 되려면 어떻게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하겠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은 어떤 예배든지 다 받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예배를 드렸는데 그 예배들이 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로 흠양되었 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경우의 예배들도 있을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그 좋은 예로 나타난 것이 가인과 아벧의 제사입니다. 하나님 은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아니하고, 왜 아벧의 예배만 받으셨는가 무엇이 그런 차이 를 만들어 놓았는가 우리는 진지하게 그것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기 뻐하는 예배가 되도록 다 같이 힘써야 하겠습니다.

 먼저 가인이 드린 예배를 보면, 세월이 지난후....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 을 삼아 드렸고, 아벧은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단순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 앞에 드렸다는데는 다를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은 가인의 것은 물리치셨습니다. 그것을 가만히 아벧의 것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차 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땅의 소산이란 우리에게 매우 상징하는 교훈이 큽니다.

땅의 소산이란 무엇을 상징합니까 단순히 하나님이 농산물로 제사를 드린것을 거절했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땅의 소산이란 어쩌면 오늘의 산업사회의 물질적인 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마치 준비없이 나와 지갑에서 돈 몇푼 드리는것으로 만족해 하는것 같은 그러 한 예배행위라고 봅니다. 자기의 땅의 소산으로 정성없이 드리는 사람들! 오늘날에 도 많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이 원하는 것은 그런것이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우리들의 예배가 그렇게 <땅의 소산 으로 전락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벧의 것은 달랐습니다.

그는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양은 생명체입니다. 피가있는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우리중에 있는것 중 아무런 것이 아닌, <첫새끼>라고 하였습니다.

다 첫새끼는 귀한것입니다. 그리고 기름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기름이란 죽음을 뜻 합니다. 온전히 죽여서 드린것을 말합니다.

그 기름을 태워 향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정성과 준비된 마음, 그리고 가장 귀한것을 희생적으로 드렸다는 뜻일것입니다.

예배의 행위속에 이렇게 아벧과 같은 정성과 귀한것을 드리는 희생이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가인은 생명이 없는 자기의 소득물 중에서 얼 마를 드렸다면, 아벧은 피와 생명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매 우 중요한 것을 가르친다고 봅니다. 즉,

2.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드리려면 어떻게 드려야 할까 하는것입니다.

 그 문제에 관하여 오늘 본문말씀에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 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몸이라는 말과, 거룩이라는 말과, 산제사 라는 말을 유념해야 할 말입니다.

예배를 몸으로 드리라는 말입니다.

몸으로 드리는 예배란 무엇이겠습니까 몸으로 드리는 예배란 그 몸으로 행하는 전체를 말합니다.

즉 생활예배를 말합니다. 죽은 의식예배가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생활예배를 말합니다.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바대로 행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는 대로 생활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반성점.........................

오늘 우리의 잘못된 예배행위가 무엇입니까 형식에 마춘 의식예배만 예배인줄 아는것, 이것이 큰 잘못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예배없이 살다가, 주일날 한 시간만 이 시간에 참석하면 예배다 드린것으로 잘못알고 있습니다.

 또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거룩이란말은 구별된 것을 뜻합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속한 구별을 말합니다.

물건도 하나님께 속한것일때 성(성)자를 붙여 성구(성구)라고 합니다.

너의 몸!, 우리의 삶이 구별된 삶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산제사, 즉 구별된 생활예배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땅의 사람들이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것 처럼 그렇게 드리지 말고, 첫새끼를 드리는것 처럼, 구별된 삶, 즉 피와 희생이 담긴 몸으로 드리는 생활 예배자들이 되라는 그런 뜻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구라파나 아시아를 막론하고, 더욱이 한국교회의 신자들 이 깊이 깨달아 고쳐야 할 것은, 물질물량화 된 예배 행위입니다. 피가 없는 예 배!.... 오직 누구를 위한 믿음인지....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지극히 이기주의 적인 믿음들만 있는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온것이 아 니고, 도리어 자기의 요구를 구하려 나오는것으로 모든 예배가 행하여 지는 것을 면 서......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을 봅니다.

그러기에 모였다 희어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모였어도 땅의 소산으로 드리듯이 생명없는 물질만 헌금으로 드리고 가면 다 되는줄, 그것도 한참 쓰다가 부수러기 몇푼을 들고 나와 드리고 가면 그것으로 다 되는줄 알고 있는것, 참으로 고쳐야 할 예배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수억원의 땅의 소산을 드렸 어도 생명이 없는 희생적 피와 태워지는 기름이 없는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3.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드릴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것입니다.

히브리서 11:6 에 보면,"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 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 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는 믿음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없는 일체의 행위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있는기도, 믿음으로 부르는 찬송, 믿음으로 봉사하는 손길, 믿음으로 결단하는 일들을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나를 위한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인본주의적 믿음이 아니고, 신본주의적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아브라함에게서 찾아보개 됩니다.

그래서 그의 믿음이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본이 되는 믿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간곳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독자까지도 받친 믿음이었습니다.

고민과 괴로움을 믿음으로 결단한 승리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로 여겨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도 실수도 있었고, 때로는 흔들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그것이 그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어느순간,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때가 있습니다.

믿음을 시험해 보려는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더 큰 역사를 우리들을 통하여 이루려고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중에 혹시 지금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는 중에 계신 분들도 있을 줄 압니 다아브라함의 신앙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수 없이 반복되는 헌신의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서도 과연 우리의 몸을 드리는 헌신의 행위들이 얼마나 생활속에서 신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가인처럼 생명없는 땅의소산으로 드리면서 그것으로 족한줄 알고 자위하고 있 는 우리들은 아닌지....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예배자들이 다 도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국민윤리가 없다고들 말 합니다.

신라시대는 화랑도가 전 국민윤리였고, 이조시대는 삼강오륜이 전 국민의 윤리였다면, 오늘 우리사회의 국민윤리가 무 엇이라고 보십니까 우리 한국교회의 신앙을 모두 칭찬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부족한것은 생활예배가 부족합니다.

몸으로 드리는 산 예배가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화랑도는 불교에서 나왔고, 과거의 삼강오륜은 유교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오늘의 국민윤리는 반듯이 기독 교에서 나와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별된 생활예배자들이 다 되어 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우리 교회에서 부터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의 장로님이 대통령이되고 장관들중에 기독교인들이 그 어느때 보다 많이 들어간 것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 큰 뜻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 교회들이 부정척결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부터, 잘못된 관행들을 고쳐 나가야 할 때라고 봅니다.

그래서 생활이 깨끗해 지고, 생활속에서 하나님을 만날수 있을 때, 우리 나라는 동방의 빛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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