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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을 통한 은혜 (벧전 0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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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정신병자나 철부 지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고, 모두가 그 문제를 안고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활을 끈질기게 따라 붙고 아무리 피할래야 피할 길이 없는 고난과 고통과 싸우는 것이 인간이며, 그것을 극 복해 보려고 노력하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생의 모든 차원에서 발견되는 것이 고난입니다. 무슨 말로 설명을 하더 라도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계속 많은 고난과 함 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람이든지 차별이 없습니다. 부자 나 가난한 자나, 지식인이나 무식한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 할 것 없이 인간이면 누구든지 이 고난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당한 문제는 먼저 이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 이며, 둘째 어떻게 감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것이라 면 다행한 일이지만 고칠 수 없는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이는 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부족하여 계속 반항, 원망, 저주하면서 일생을 헛되이 보내어 버리 는 비참한 사람도 있읍니다. 우리는 좀더 냉정한 태도로 겸손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할것입니다. 세번째는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것이 문제입니다. 극복할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여 환경이라면 환경도 바꾸고 궤 도라면 궤도도 수정하여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하여서라도 이 고난을 이기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도피할 수 없으며 또 도피적 자세라는 것은 비겁한 것으로서 참된 해결의 방법이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에 임하는 자세가 어떠냐 하는 것을 좀더 깊이 생각하여 정 리해보면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있겠읍니다.

 첫째, 마음과 생각의 문제로서 내가 이 고난을 어떤 마음과 자세로 임 하느냐 하는 것이며, 둘째, 어떠한 방법을 택하여 그 과정에 대처하느냐 하 는 것이며, 세째, 어떤 결과를 맺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많은 눈물을 흘리며 괴로와하더라도 그 어느 순간에 결정적인 결론만 맺을수 있다면 지난 날의 고통은 꿈에 본듯이 앝어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되었던 이야기가 있읍니다. 이 사람 은 소경으로서 태어나서 40살이 넘도록 살았으니 거의 일생을 답답한 가운 데서 비참하고 불행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눈 을 뜨게 되었고, 그러므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성경에 기록 되어 장차오는 세대의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귀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 니다. 그는 훗날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만일 장님이 아니었 더라면 예수님과 개별적인 만남이 없었을 것이며 또한 이렇게 큰 은혜를 받 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40년 간의 고통이 하루 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지고 새로운 마음으로 옛날을 이야기하며 현재를 자랑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지막 결과가 어떻게 맺어지느냐 따라서 고통의 의 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의 해산의 고통이 이런 것입니다. 자녀를 낳기위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지마는 자녀가 탄생되어 그 사랑스런 얼굴을 대할 때 지

난날의 고통은 순식간에 잊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마지막 결 과가 어떻게 맺어지느냐 하는 것이 바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환으로서 상전에게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느 냐 하는 말씀이 있읍니다. 하나의 좋은 상징적 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수하에 있기도 하고 혹은 다스리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런데 남의 수하에 있을때 정당한 순종을 해야 할때도 있지만 때로는 아주 부당한 순종을 해야 하는 괴로운 때도 있읍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당 하는 고난은 당연하지마는, 애매한 고난을 겪을 때가 있어서 순종이 아니라 굴종을 해야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의 고통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하나의 실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피하려 하거나 모면하려 하거나 벗어나려 해도 그럴 수 없습니다. 다만 왜 고난을 당하는지 고난의 의미와 고난에 임하는 자세와 고난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점 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고난에 대해서 오늘 본문 말씀은 세 가지 성격으로 구분하여 분석적 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가 있어서 매를 맞는 고난,즉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요, 둘째는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이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요, 세째는 스스로 자원하는 선을 행함으로 당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의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억울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고난에 임하는 자세 로서 이 고난의 의미가 저주적인 것이 아니라 징계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아 야 합니다. 징계와 저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받는 고난은 저 주가 아니라 분명 징계인 것입니다. 이 것은 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부모된 도리로서 자녀가 잘못하면 매를 때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매가 의미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히브리서 12:8에 보면 징계는 다 받은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 아요 참아들이 아니라고 하였읍니다. 잘못했을 때 매가 없는 것은 버려진 자식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될것은 매는 구체적인 말씀을 의미합니다. 말씀 으로 들려주었고, 계속 깨닫지 못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지 않을 때는 마지 막으로 매를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련하여져서 짐승에 가까 와지면 매로써 다스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징계를 받을 때 매를 들고 있는 자의 얼굴을 쳐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매와 함께 들려오는 음성을 바로 들을 수 있 는 귀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우연한 징계는 없읍니다. 이것이 사랑이며 말 씀인 것을 깨닫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1:5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 느냐. 발바닥에서부터 머리까지 성한곳이 없이 상한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 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싸매지도 못했는데 어찌하여 매를 막졀 하 느냐고 채찍을 든 하나님께서 오히려 마음 아프게 호소하는 말씀이 있읍니 다.

 그러나 회개는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줍니다. 어떠한 징계를 받았든 지 그 징계를 통하여 바로 깨닫게 되어 회개하면 된다는 그 징계는 다시없 는 축복인 것입니다. 사실은 많은 일 가운데서 내가 잘못한 일이 더 많이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느 이 죄를 남에게 돌려 버릴 때가 더 많이 있읍니

다. 그리하여 삼중죄를 짓게 되는 데 첫째는 죄를 짓는 죄요 둘째는 죄를 변명하는 죄요 세째는 죄를 계속 짓는 죄입니다.

 결혼한지 7년된 어느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부인이 목사님을 채아와서는 울면서 가정이야기를 하고 이혼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주례를 했기 때문에 인사라도 하고 헤어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사정은 참 딱한 것 같았읍니다. 목사님이 부인에게 묻기를 연애 결혼한 것 같은데 그때도 그 남자가 그렇게 나쁜 사람 이었느 냐고 했더니, 그때는 좋은 사람이어서 집안에서 반대하는 것을 뿌리치고 결 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자신의 운명을 맡길만큼 믿음직스 러웠던 그 사람이 당신과 같이 사는 7년동안에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변했 다면 당신에게는 그 책임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조금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 을 조금이라고 하지말고 함께 살았으니까 절반은 책임져야 할 것이 아니냐 고 했더니 그것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절반은 믿음으로 채워 서 살아보라고 했더니 고개를 떨구고 돌아갔는데 지금까지 그런대로 살아가 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원망과 불평은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기 는 것입니다.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도 더욱 무거워 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을 당할때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더이상 변명하지말고 고난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알아서 이 징계를 통하여 주시 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애매하다'는 말의 헬라어 원문의 의 미를 보면 의롭지 않은, 불합리한, 부당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모순되고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 당황할 때 가 있습니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이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뜻을 모르고 당하는 고난입니다. 불합리하고 아무 유익이 없는 고난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사람의 부주의로 불이 난 경우 나의 잘못은 전혀 없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우리 집까지 불타 버리게 됩니다. 또 나는 조심스럽 게 차를 잘 운전하였지만 앞에 오던 차가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오면 방어 운전할 겨를도 없이 당하고 맙니다. 그 외에도 이 세상에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당하는 애매한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요나 한 사람의 죄 로 말미암아 그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고난을 당해야 했던 것관 같은 고 난이 우리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사람에게는 부당하고 애매한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는 애매한 것이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고난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즉 내가 생각하기에는 불합리한 고난 이라고 생각되더라도 하나님 편에 고난의 이유가 있다고 믿는 신앙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로서는 납득 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뜻이 있는 것으로 믿고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기도문은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을 무참 히 학살할 때 만들어진 기도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왜 600만명이 죽어야 만 하는지, 왜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을 것 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찬양합니다'라고 기도하였으 니 이 기도가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생각을 사람이나 사건으로 돌 리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려서 하나님에 대한 양심 때문에 고난을 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만일 이 고난을 부당하게 생각하여 상대방을 미워하게 되면 결국은 하 나님을 원망하는 죄까지 짓게 되고, 신앙에서 떠나 버리는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 올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이 고난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섭리하신 바요 하나님의 축복임을 믿고 감사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셋째로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즉 자원하여 받는 고난 입니다. 모르고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알면서 의식적으로 당하는 것이며 불가피하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스스로 취하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이야말로 값진 것이며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상은 선을 싫어합니다. 선을 시기합니다. 죄인은 죄인을 부르고 의 인을 싫어합니다. 의로운 사람이 악인의 무리 속에 들어가면 미움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악인의 곁에 있으면 자신의 죄가 드러나기 때문이며 주 위의 모든 사람이 다 악인이고 죄인이라면 자신의 죄가 정당화되는 것 같은 심리적인 작용 때문입니다.

 [요] 3:20에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 다. 악인들은 밝은 것이나 선한 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 기 때문입니다. [요] 15:18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 림받고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결심을 하고도 안일하고 거룩하며 깨끗한 영광만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이미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될 것을 각오해야만 하는 비상한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 자들은 살아서 영광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그 분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비참하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2000년 후의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습니까 왜 안일한 믿음만 을 추구합니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십시다. 세 번째의 자원하여 당하는 고난이란 불가피하기 때문에 도저히 피할 수 없어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낸 스스로 채아가서 당하는 것이며 이것이 참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역시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마 지막 빌라도의 법정에서라도 약간이 변론만 하셨더라도 십자가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십자가를 지십니 다. 무기력해서도, 무능해서도, 무지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을 한 없 이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십자가 의 고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고난에 대하여 이기는 방법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배워야 할 고난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본 문:21에 예수의 본을 받아 뒤따라오게 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본이란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가 자신이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요, 둘째는 고난에 대해서 궤사인 변명이 없었다는 것이요, 셋째는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 다. 모든 것을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는 모든 인간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살도록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 세상을 구원하신 것입니 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 는 자들이 그 본을 따라가기 위해서 당하는 모든 고난은 참된 고난이며 축 복의 약속이 있는 고난입니다.

 혹시 이러한 고난을 당할 때 남을 욕하고 저주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손 상시키지는 않았는가 반성해 보십시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서 하나 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본을 생각하며 앞으로 전진할 때에 오히려 그는 고 난을 통하여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을 인해서 당하는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의 발자취를 따라서 이 고난을 이겨야 할 것입니다. 원망이나 불평이나 욕 을 하는 것은 신앙의 자세가 아니며, 또한 이때까지의 모든 수고가 한 마디 의 불평으로 인해서 헛되이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고난을 받으셨으나 불평없이 끝까지 참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빌라도가 지운 것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 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에 오묘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참으면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이 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적 고난으로 고난의 의미를 바꾸어 나가야 하겠습니 다. 모르고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알고 당하며, 할 수 없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자원하여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임며 우리는 승 리를 얻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떤 종류의 고난을 당하든지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 에서 수용하고 받아 들임으로써 모두 승리하는 삶이 있으시기를 간절히 바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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