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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심 받은자 (딤전 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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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메세지에서 우리는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온전

한 조망을 살펴볼 것이다.

I.불타는 가시떨기

모세가 하나님깨 부르심을 받았을때 그는 불타는 가시떨기의 큰 광

경을 보았다. 불타는 가시떨기는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들을 가리킨다

한때 우리는 창세기 3장의 저주 아래 있는 가시들이었다. 그러나 출

애굽기 3장에서 우리는 구속된 가시떨기이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 안

에서와 우리 위에서 불타고 있다. 이 불타는 가시떨기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며, 신약에서는 교회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여

전히 "가시들" 이 있다. 교회는 아직 보석이 아니다. 그러할지라도

우리가 변화의 과정 아래 있다는 것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한다.

가시떨기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

신명기 33장 16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가시떨기 가운데 거하는 분

으로 말했다. 이 말은 모세가 불타는 가시떨기의 이상을 보고 사십년

이 지난 후 백 이십 세 되었을 때 표명한 것이었다. 성막이 건축되어

하나님이 그 안에 거주하러 들어오신 후에도 모세는 그 이상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 신명기 33장 16절에서 왜 모세는 "장막 안에 거

하시던 분" 의 선한 뜻을 말하지 않는가 나는 모세가 장막 안에 거

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가시떨기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말하

는 것만큼 달콤하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새 예루살렘에 있을

때 조차도 우리가 한때는 가시떨기였다는 것을 회상하게 되리라고 믿

는다. 가시떨기가 오늘날 땅에 있는 하나님이 거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지!

하나님의 거처

출애굽기 3장부터 계시록 21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처에 관한 노선을 추적할 수가 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의 거처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

적이 그분의 거처를 건축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벧엘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 관한 계시를 갖는다. 그러나 실제적인 하

나님의 집의 건축은 갖지 못한다. 출애굽기 시작에서 하나님은 가시

떨기 안에 거하셨었으나, 그 책 끝에서 그분은 장막 안에 거하셨다.

그러므로 법궤가 있는 장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의 초점이 되었

다. 결국, 장막은 성전으로 확장되었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막이자(요1:14), 하나님의 성전(요2:

19)으로 오셨다. 오늘날 교회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3:16).

궁극적으로 이 성전은 새 예루살렘으로 총결될 것인데, 이는 영원 안

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이다.

가시떨기에서 새 예루살렘까지

시초에 하나님의 거처는 구속된 가시떨기였으나, 점차적으로 이 가

시떨기는 성화되고, 변화되며, 형상을 본받고, 심지어는 영광스럽게

되어가고 있다. 장막은 변화의 일례이다. 장막 안에는 금으로 입혀진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고 또한 금실로 수 놓아진 세마포가 있었다. 아

카시아 나무와 세마포는 모두 인성을 상징하며, 금은 신성을 상징한

다. 입혀지고 수놓아진 이러한 인성은 변화된 인성이다. 출애굽기 3

장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는 가시떨기였으나, 출애굽기 40장에 있는

그 분의 거처는 신성으로 입혀지고 짜여진 인성으로 만들어진 장막이

었다.

가시떨기와 장막은 다 상징이었다. 하나님의 실제적인 거처는 물질

적인 가시도 장막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실제적인 거처는 그분의 백

성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처리를 받은 후 그들은 금

으로 입혀진 아카시아 나무가 되었으며, 또한 금실로 수 놓아진 세마

포가 되었다. 오늘날 교회는 이 예표의 성취이다. 현재 교회는 구속

된 가시떨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날이 올 때에 우리는 금과 진주

와 보석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거처에 대한 놀라운 이상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한다! 이 이상은 초기 단계, 즉 가시떨기의 단계로부터

완성 단계, 즉 새 예루살렘의 단계까지의 하나님의 거처를 망라한다.

신성한 경륜

모세가 하나님깨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가시떨기 안에서 타는

거룩한 불을 보았다. 바울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도 최소한 원칙적

으로는 같은 이상을 보았다. 그는 그 분의 구속된 자들 안에서 타고

있는 삼일 하나님을 보았다. 이러한 신성한 불탐을 통해 삼일 하나님

자신이신 거룩한 불은 가시떨기와 하나였으며, 가시떨기는 불과 하나

였다. 오늘날 아들 안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영이신 아들은 우

리 안에 불로 임하셨다. 주 예수님은 언젠가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

다고 말씀했다(눅12:49). 오순절날 그 영은 불의 혀들 같은 형태로

오셨다. 오늘도 주님은 여전히 불을 땅에 던지고 계신다. 이 거룩한

불, 이 신성한 불탐은 우리를 사로잡았으며, 지금 우리는 삼일 하나

님으로 불타는 가시떨기의 일부이다. 삼일 하나님은 그 분이 선택하

고 구속한 교회 안에서와 위에서 타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속된

인성 안에서 타고 있는 삼일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신성한 경륜이다(

딤전1:4 헬라어).

이 경륜이 바울에게 계시되었다(엡3:3-5,9). 사실 그것은 신성한

계시의 초점이다. 모세는 상징으로 이것을 보았으나, 바울은 실제로

이것을 보았다. 그분의 경륜이 우리에게도 계시된 것츠로 인해 얼마

나 감사를 드려야할지! 우리는 우리가 불타는 가시떨기에 관한 이상

을 보았다는 것을 담대히 선포한다. 할렐루야, 교회 안에서 불타는

삼일 하나님의 이상!

삼일 하나님의 분배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각 방면은 바울의 글들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바울의 서신서들에서 우리는 불타는 가시떨기의 이상을

본다. 에베소서 1장과 3장에서 우리는 신성한 경륜, 즉 하나님의 구

속된 백성들을 그분의 표현이 되게 하는 그분의 구속된 백성들 안으

로의 삼일 하나님의 분배를 본다. 이 분배는 오늘날의 불타는 가시떨

기인 교회를 존재케 한다. 내가 이 불타는 가시떨기의 일부라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우리가 이 이상을 보았기 대문에 우리는 결코

종교로 되돌아갈 수 없다. 오히려 그 이상은 우리를 앞으로 전진케

한다. 심지어 많은 청년들조차도 그들이 가시떨기의 이상, 즉 오늘날

의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의 이상을 보았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II.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어떠하심

나는-이다(I AM THAT I AM)

두번째 방면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문제이다. 하

나님은 유일한 자존자이시다. 모든 것들은 왔다가 가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계신다. 우리 아닌 하나님이며, 홀로 하나님만이 항상 계신

다. 우리가 보았듯이 출애굽기 3장에서 계시된 바대로 하나님의 이름

은 단지 동사 있다(to be)이시다. 이것은 기타 어떠한 것이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 많은 것들이 존재하다가

사라진 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실 것이다. 하나님은 계셨고, 하나

님은 계시며, 하나님은 계실 것이다.

자존자로서 하나님은 모든 적극적인 것들의 실제이시다. 요한복음

은 그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임을 계시한다. 그분은 빛이요 생

명이요 음식이요 음료요 초장이요 길이다.

하나님을 계신 분으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

라도 하나님은 여전하시다. 약함으로 인해 실망하는가 어느날 당신

의 약함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계실 것이

다. 하나님 아닌 다른 어떤 것도 믿지 말라. 이는 당신의 약함과 강

함 모두가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질

때 하나님은 계신 분으로 계속하여 있을 것이다. 나의 체험에 따라

나는 부요함도 가난함도 지나가나 하나님은 여전하시다는 것을 간증

할 수 있다. 우리가 부요하든 가난하든 하나님은 계신다. 우리는 주

님이 우리에게 주신 아내나 남편조차도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심지

어는 우리가 아내나 남편과 사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실

것이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그분을 영존자로 믿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재하는 분으로 안다면 우리는 특별히 어려운 때에 큰 위

로를 받을 것이다.

더 깊은 앎

바울의 체험을 생각해 보라. 그의 사역 초기에 바울은 많은 사람들

을 치료했다. 심지어 그와 접촉하였던 손수건조차도 다른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행19:11-12). 그러나 그의 사역 후기에 치료하는

능력을 그처럼 많이 체험하지 못했다. 디모데가 병들었을 때 그의 위

병과 자주 나는 허약함을 위해 포도주를 쓰라고 바울은 그에게 권했

다(딤전5:23). 더우기 바울이 투옥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깨 벽을

허물어 달라거나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에게 했던 것처럼 기적적

으로 문을 열어 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전능한 분처럼 행동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순교할 때가 임박했을 때 바울은 하나님을 전

능한 분이 아닌, 존재하는 분으로 알았다. 이것이 바울에게 위로와

활력의 근원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을, 자신을 옥으로부터 구출하실

수 있는 분으로가 아닌, 영존하시는 분, 즉 이제도 계시며 항상 계실

분으로 알고 믿었다. 심지어 하나님이 겉으로 보기에 우리를 위해 아

무것도 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존재하는 분으로 믿

어야 한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능한 하나님을 알고 있으

나, 우리는 그분을 더 깊은 방법으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알아야 한다

부활의 하나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부활의 하나님으로 믿는다. 다시 말해서 우

리가 그분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울을 옥으로부터 끌어내지 않았다 할지라도 바울은 그가

순교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키러 오실 것을 알았다. 순교하기

전에 바울은 그분을 존재하는 분으로 누렸다. 그러나 그 후로 그는

그분을 부활의 하나님으로 누렸을 것이다. 순교는 단지 그에게 하나

님을 부활의 하나님으로 체험할 기회를 주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단지 그분의 기적적인 행위에 따라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 사실 우리는 기적들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복음 2장

에서 주 예수님은 자신을 기적들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의탁하지 않으

셨다. 우리는 하니님을 존재하는 분으로, 부활의 하나님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분을 자존자와 영존자와 부활하시는 분으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 받은 자들인 우리가 그분의 회복 안에서 그분

의 위임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적을 기대한는 자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존재하는 분과 부활의 하나님으로 알아야 한다. 그분

은 나는-이다 이시며, 그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

곱의 하나님이시다. 불타는 가시떨기의 이상을 보는 것에 더하여 우

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볼 필요가 있다. 단지 그분이 하시는

어떠하심에 따라 그분을 알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안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환경은 급격히 변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

하시다. 모든 것은 파도처럼 흔들릴지라도 하나님은 계시며, 그분은

영원하다. 그분깨는 변화란 것이 없다. 더 나아가 모든 사망의 상황

은 우리의 체험 안에서 그분이 부활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체험이 입증함

초기 대만에서의 나의 체험은 이를 입증한다. 1949년에 사역을 인

해 대만에 보내심을 받았을 때 대만은 아주 후진국이었으며, 아주 가

난했었다. 그곳에 보내심을 받았지만 어떠한 재정적인 지원도 받지

못했다. 주님의 일에 완전히 사로잡혔기 때문에 나는 직장을 잡지 않

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히 제한된 재정 자원으로 나는 대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 상황으로 인해 낙심을 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고작 작은 주거지를 주위에서 찾는 것이었으

며, 여기에서 무얼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수백

개의 교회가 있는 대륙에서 미개한 섬으로 옮기면서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체험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외적인 것들이 변했을지라도 하

나님은 여전하셨다. 지난 날에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어떠하셨는가

를 체험했으며, 그분의 넘치는 영적인 축복과 심지어는 그분의 물질

적인 양식을 보았다.

III.세 가지 표적들

지팡이가 뱀이 됨-사탄의 정체

불타는 가시떨기의 이상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어떠하

심을 깨달아 안 후에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세 가지 표적들이 필요하

다. 첫번째 표적은 지팡이가 뱀이 되는 표적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

담과 하와에게 독을 주입한 간교한 뱀은 출애굽기 4장에서 드러났다.

이 표적은 우리로 마귀를 알도록 돕는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우리

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뱀이 숨을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가리킨

다. 수년에 걸쳐서 나는 내가 무언가를 의지할 때마다 뱀이 거기에

숨어있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모세가 여러 해 동안 사용했던 지팡

이가 강탈하는 뱀의 은신처였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모세는 주

님이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말씀 하실 때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했

다. 그때에야 감취었던 뱀이 드러났다.

손에 문둥병이 발함-죄의 육신

두번째 표적은 손에 무눙병이 발한 표적이었다. 이 표적은 죄의 육

신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문둥병에 걸렸을 뿐 아니라, 문

둥병 자체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죄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깨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우

리의 죄들을 짊어지셨을 뿐 아니라(벧전2:24),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다(고후5:21). 우리가 죄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으는 우리를 위

해 죄가 되셨다. 부르심 받은 자마다 그의 육신이 죄의 육신이며, 그

안에 선한 것이 아무것도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우리의 육신은 죄와 부패함과 썩음의 구성체이다.

물이 피가 됨-사망의 세상

더 나아가 부르심 받은 자는 세상이 사망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

달아야 한다. 이것은 물이 피가 되는 표적인 세번재 표적에서 계시된

다. 세상의 공급과 오락으로부터 나오는 세상 사람들의 누림은 애굽

땅을 적시는 나일로 상징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 받은 자의

눈에는 세상이 생술 가득한 것이 아니라 사망의 피로 가득하다는 것

이다. 세상이 제공하려 하는 것은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물이 아

니다. 우리에게 독을 주입하고 우리를 죽이는 사망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받은 자들은 우리는 마귀와 육과 세상을 알아야

한다. 바울에게는 이러한 삼중적인 지식이 있었다. 사탄에 관해 바울

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의 간계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고후

2:11). 육에 대해서 그는 "이는 내가 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라고 했다(롬7:18).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

는 "세상이 내게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

여 그러하니라" 고 했다(갈6:14). 다시 한 번 우리는 모세는 예표

안에서, 바울은 실제 안에서 체험 했다는 것을 본다.

IV.형제와의 조화와 아내의 베어냄

형제와의 조화-우리의 보호

이후에도 여전히 모세에게는 남성의 도움과 여성의 도움이 필요했

다. 남성의 도움은 조화의 도움이다. 이런 종류의 도움은 우리를 균

형 잡아 주고 제한하고 겸비하게 한다.

그의 형과의 조화를 통해 모세는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을 다른 사

람으로 하여금 하게 하는 것을 배웠다. 아론이 모세보다 더 능변이었

다고 생각하지 말라. 아론이 한 모든 것은 모세 역시 할 수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제한을 받았다. 교회 생활 안에서 주님은

종종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하도록 우리를 강요하는

환경을 일으키실 것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기능을 발휘하

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 어떤 형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이

그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로 하여금 하게 하라. 이것은

당신을 겸비하게 할 것이다.

나는 아론이 모세보다 더 능력이 있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모세가 할 수 있는 것을 아론이 하

게 하는 상황을 안배하셨다.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혼자 모든 것

을 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한다. 대신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로 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게을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것은 조화를 이루는 관

계에서 우리가 제한되고 균형잡히고 겸비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

다.

이러한 제한은 안전과 보호이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형

제들의 조화보다 더 큰 보호는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더 조화

될수록 우리는 더 보호될 것이다.

아내의 베어냄-우리를 유용하게 함

4장 24절부터 26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십보라를 사용하여 모세를

' 피 남편' 이 되게 하는 것을 본다. 조화는 객관적인 반면 베어냄은

매우 주관적이다. 성경에서 남성은 객관적인 진리를 대표하는 반면

여성은 주관적인 체험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아론의 조화는 외적이며

객관적이었으나, 십보라의 베어냄은 내적이며 주관적이었다.

우리가 그분의 회복 안에서 그분깨 유용하게 되려 한다면 우리는

달려진 표시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체험한 잘려짐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우리가 잠잠히 이 표시를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

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잘려졌다는 것을 말하게 하라. 출

애굽기 4장에서 '피 남편' 이라고 말한 자는 모세가 아니라 십보라

였다.

교회 생활과 결혼 생활에서 우리는 이러한 '피 남편' 이 될 필요

가 있다. 만일에 어떤 형제가 참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그는 주관적인 방식으로 잘려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잘려짐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 때때로 나의 아내는 나의 먹는 것을 제한함으로

나를 자른다. 그녀의 자르는 도움 때문에 나는 먹는 것을 육적으로

탐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베어냄은 우리를 천연적인

생명에 따른 생활로부터 지켜 준다.

잘려지기를 자원하는 자들만이 하나님깨 유용할 수가 있다. 유용한

자마다 '피 남편' 이다. 날마다 심지어 매시간 우리는 천연적인 생

명의 할례를 체험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죄가 많다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은 또한 우리의 가

족들이나 교회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 의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

나는 잘려지기를 원한다. 나는 나를 자르는 자들에게 자신을 즐겁게

바친다. 니러한 자름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마지막 방면이다. 오직 우

리가 잘려진 후에야 우리는 하나님의 위임을 수행할 수 있다. 모세가

잘려진 후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손에 유용했다.

V.결 론

출애굽기 3장과 4장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방면들과 신약의 기

록을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모세가 체험한 것마다 바울 역시 체험했다

는 것을 본다.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을 오늘날 우리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불타는 가시떨기의 이상, 즉 그분의 구속된 자들 안에

서와 위에서 불타는 삼일 하나님의 이상을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성경에 있는 신성한 계시의 초점이다.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마귀와

육과 세상을 알아야 한다. 이에 이어서 우리에게는 조화와 베어냄이

필요하다. 만일에 우리가 기꺼이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의 할례를 주

관적으로 체험한다면 그때 우리는 부활 생명에 의해 살게 될 것이며,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주님의 손 안에서 유용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위임을 수행하도록 예비될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

심의 각 방면이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의 체험이 되기를 바

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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