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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인 사역에 대한 은혜 (고후 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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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나 사람의 모임이 있는 곳에는 다른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분 리주의적인 성향을 띄며, 수군수군하고 뒤에서 남을 비방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분쟁하며(1:11), 바울의 권 위에 도전하며,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의 마지막 단락에 이르러 거짓 교사를 포함한 교회 내의 반항적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고 자신의 사도적 사역을 강조합니 다. 바울은 그 자신을 개인적으로 변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 과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역자들과 더불 어 "인기 겨루기"를 하는 일에 말려 들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은 바울을 비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는 자신들이 하는 일은 옳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반대와 불평을 하는 자들의 문제점이 무었이지에 대 하여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1.올바른 영적 사역에있어서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방법에 대한 오해 지적 1)비난(1-2)-인간적인 권위와 능력을 감춘 것을 오해하여 비난.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에 대한 반대자들을 바울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에는 편지로 강한 어조로 단호히 대처할 것을 편지하다가도 다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찾아와 이들을 만나면 바울은 자신의 권위와 능력을 신중히 낮추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 임을 인정하기에 바울도 이들을 책망으로 보다는 온유와 사랑으로 대하고 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언데 이것이 어떻게 오해되었느냐 하면 "바울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 을 때에는 이렇게 편지로 아주 단호한 것 같지만 사실 우리를 만나서는 입 도 제대로 들썩 못하는 겁쟁이야!"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교회를 불평과 원망으로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하여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바르게 고쳐야 한다는 사실을 편지 로는 누차에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 그 목적이 그 자신을 높이는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을 위하여 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로서는 참으로 신령한 권능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 1절 말씀처럼 "온유와 관용"에 있음을 알고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신중하고도 겸손한 행동이 오히려 바울을 겁쟁이 와 바보취급을 받도록 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에대해 사도 바울은 이같은 인간적인 오해를 우려하면서 온유와 관용이 약한 자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될 경우 바울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도 온유하시고 겸손하셨지만 (마11:29), 필요한 경우에는 엄격하셨고 심지어는 화까지도 내실 수 있었 던 것처럼(마15:1-2,23:13-33,막11:15-17요2:13-13-16), 자신도 이러한 태 도로 대하지 않게 되기를 사랑으로써 그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 을 쉽게 풀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그래서 하는 부탁이지만, 부디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에 엄하게 큰 소리 를 내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더라도 나는 내 행동이나 말이 단 순히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단호하게 대할 작정입니다."

2)바울의 방법-참으로 영적으로 싸워야 할 것이 어떠한 것인지(3-6).

 바울을 비난하는 일로 힘과 정력을 쏟아붓고 있는 자들을 향해 우리가 참으로 싸워야 할 신령한 싸움이 무었인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바울을 반대하고 싫어하는 무리들인 거짓 교사와 그 무리 들은 바울의 사역을 외견상으로만 판단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성령 "으로가 아니라, 본문 2절 말씀처럼 "육체대로"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겉 으로 볼때에 바울의 사역이 단호한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물러터지게 보 여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본을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바울응 반대하는 무리들은 "유명한 종교적 영웅처럼" 압도적 인 능력과 뛰어난 화술과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받은 천거서들로써 사람들 을 사로 잡고 있었습니다. 쉽게말해 목소리가 컷으며, 장황하게 자신을 선 전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혹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바울은 초라하게 보였고 바울의 반대자들은 당당하게 보였 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 사람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었인지 아 십니까 그것은 온갖 술수와 그럴 듯한 위장술에 너무 쉽게 속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하고 신실한 사람은 항상 무시해 버리는 오해와 스스로의 기만에 빠진다는 것이 이 땅 위의 비극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우리 인간에게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진실과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이 우리의 위로요, 소망 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참으로 우리 신자들이 힘쓰고 애써 싸워 쟁취해야 할 것이 무었인가를 가르켜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대로 싸우는 거짓 교사들의 싸움과는 다른 것입니다. 본문 4 절에서 말하는 이 싸움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무기로 싸우는 싸움도 아니 요, 인간적인 세력 다툼을 위한 신경전도 아닙니다. 이 싸움은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여 마귀의 요새를 부서뜨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 든 교만과 사상과 사람들 눈에서 하나님을 가리우는 온갖 장벽을 부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불순종하는 자들을 사로잡아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돌려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하게 하는 싸움 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6절에서 분명히 천명하기를 "나는 이 무기를 써서 먼저 고린도 교인들 중에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순종시킨 다 음에 순종하면 은혜로 화합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불순종하면 이러한 신령한 권위로 처벌하는데 사용할 것입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처음부터 신령한 무기를 사용하여 "겸손"의 무기를 사용하 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아갔던 것입니다. 비록 그 겸손이 오해를 받는 한 에 빠지더라도 우선 겸손으로 나갔던 것입니다. 왜냐면 교만하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사단의 계략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겸손하고 관용과 온유의 무기로 나가는 것이 인간적 육체의 눈으로 볼 때 아무것도 아닌것 같지만 여기에 무서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 해야 할 사실은 온유와 관용이 결국 복종하게 되는 자들에게는 축복이지만 끝까지 불순종 하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려지는 벌과 징계 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2.영적인 권위를 사용하는 법에 대한 오해(7-11절).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취약한 점이 권위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의 지위나 능력이 권위에 대한 아무런 보증이 되 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시기를 "다른 사람을 임의로 주관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권세 부리기를 좋아하는 이방인 들을 본받지 말라"(막10:35-45)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따라야 할 본은 종으로 요셔서 다른 사람을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입니다. 바 울은 그와 같은 점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고린도 교인들의 일부 사람들에게 바울이 형편없는 지도자로 생각하는 이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해를 하여도 철저히 오해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무기력하고 힘없이 보이는 처신 을 하고 있는 지를 깨달고 분별할 만큼 그들이 신령하지를 못했던 것입니 다. 바울의 온유함을 고린도 교회의 말썽꾼들은 "인간적인 능력"이란 외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바울은 전혀 권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0절의 말씀은 이런 말씀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무시해 버려. 큰 소리는 치지만 그건 으름장일 뿐이지. 그 가 여기 오면 알게 되겠지만 역시 별볼일 없고 형편없는 설교자일걸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해 바울은 편지로는 힘있게 썼으나 그 외모는 보잘 것 없으며 감동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판단할 때 외모로만 판단하므로 영적인 분별 력을 가지고 있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권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이 권위를 사용 하는 방법에 있어서 좋지 못한 인간적 방법으로 그 권위를 행사하기를 거 절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권위를 가진 목적은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세우기 위함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파괴하기 보다 세우는 데에 더 많은 기술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세우는데 있어어서는 사랑이 필요하였습니다(8:1절) 그래서 바울은 사랑과 온유함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것을 바울의 약 함으로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즉 바울은 교회를 세우는데 자신의 권위를 사용한 반면, 유대주의자들은 그들의 권위 를 세우는데 교회의 권위를 이용했던 것입니다.

수년간 목회를 해오면서 여러 교회를 순회 사역하였던 어느 목사님의 뼈 아픈 보고가 있습니다.그것이 무었이냐 하면 목사가 각 교회에 부임하였 을 때에 목사에 대하여 보이는 신자들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가 참으로 사랑과 진실과 겸손을 보이면, 교인들은 그 목회자 의 지도를 거절하고 그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맙니다. 그래서 그 목회자가 떠나고 다른 목회자가 옵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오는 목회자는 이전의 목사와 아주 다른 방법으로 즉 "교회를 다스리는" 일종의 강력한 권위와 힘으로 목회를 하므로 아주 대조적으로 목회를 합니다. 여러분,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놀랍게도 온유와 겸손으로 목회하던 목사를 배척했던 교인들이 오히려 강압적인 방법으로 다스리는 이 목회자를 좋아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자랑까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도 성장하고 목표하는 바를 거의 모두 성취해 냅니다. 도대체 무었이 옳고 무었이 틀리 는지 혼동을 할 정도입니다.

이것은 무었을 말합니까 인간이란 어떤 족속이냐 하는 사실을 역설적으 로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어떠한 대접을 받은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이같은 일들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육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신령한 일을 말하면서 신령한 것이 무 기력하여져서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신자들 대부분의 삶이 라는 사실에 놀라셔야 합니다.

 <결론>

참 신자는 모든 일을 신령하게 해석하고 감정과 육체의 일로 흔들리지 않 습니다. 참 신자는 온유와 관용이 무었인지를 이해합니다. 그리고 참 신자 는 그 벌의 엄중함도 압니다. 신령한 일에 어두운 육체로 외모로 신령한 일 판단하고 사람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되시기를 축원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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