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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혼과 가정 (창 02:18-24, 히 02:9-13, 막 10:2-16)

첨부 1


본문은 창세기 2:4의 중간 부분,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서부터 시작되는 J기자(Yahwist)의 창 조기사의 일부이다(한글 개역은 히브리어 원전 및 영역과 차이가 있다. 즉 후자들에 의하면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가 먼저 나와야 한다. 이것은 바로 이어 언급할 제사문서 P문서 곧 창세기 1:1-2:4 상반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역주). 이보 다 수세기 후에 기록된 제사(祭司)문서(P문서)의 창조 기사는 창 세기 1:1-2:4 상반절에서 발견된다.

 J기자의 기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자기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으셨다(창 2:7). 한편 P문서에 서는 "형상과 모양"(창 1:26-27)에 그 강조점이 있다. 오늘 본문 과 관련해서 보다 중요한 사실은 제사문서의 기사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창조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반해 J문서의 기사 에서는 여자가 나중에 창조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사 실상 P문서의 기사에서는 한 쌍의 인간을 창조하는 일이 창조의 절정을 이루고 있지만, J기자의 기사에서는 인간이 먼저 창조되 고 나서 그 다음에 인간이 세상에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 해서 각종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J기자의 내용은 남자에 대한 여자의 예속을 가르치지도 암시하 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다른 피조물들은 비록 아담과 꼭 같이 흙으로 지음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적합한" 짝이 될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또한 이 기사는 여자가 단순히 남자 를 돕는 자에 불과하다고 가르치거나 암시하지도 않고 있다. 동 물들이 아담을 돕도록 창조되었으며 아담이 "돕는 배필"을 찾는 데 실패했다는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오히려 이러한 점을 명확하 게 부정하고 있다. 돕는 자를 찾는데 대한 하나의 대안(代案)으 로서 여자가 창조된 것이다. 그녀를 보았을 때 아담은 "이제야 드디어 도울 자를 찾았군"하는 식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녀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한 다. 다시 말해 그 여자는 동등한 자로서 그 남자의 존엄성을 함 께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 여자는 일하는 동물도 아니었으며 다 른 어떤 "열등 동물"도 아니었다.

비록 본문(창 2:18-24)이 창세기 1장의 설화보다 훨씬 오래 된 것이긴 하지만(주전 6천 년경) 각기 다른 차원의 전승을 결합시 키고 있다. 그 차원들이란 (a) 여자의 창조(창 2:18-22) (b) 남 자의 반응(23), (c) 결혼에 관한 언급(24절), (d) 다음에 나오는 전반적인 이야기를 예상케 하는(참조:창 3:1-21) 그들의 벌거벗 음에 대한 언급을 말한다. 이중 대귀(對句)를 이루는 23절의 후 반부의 번역은 히브리어 단어들간의 내적 연관성을 보여준다. 즉 남자(ish,이쉬)와 여자(ishshah,잇솨)는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히브리어에서는 남성 명사에-ah 아 를 붙여 여성 명사를 만드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임-역주).

 결혼에 관한 어급은 세 가지 요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a) 결혼에 의한 결속력은 직계비속(直系卑屬)의 결속력보다 강 하다는 점(물은 피보다 강한 것인가-역주), (b) 부부는 단 하나 의 살아 있는 실체("한 몸")를 형성한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 로 (c) 결혼은 "타락"으로 말미암은 경륜적(經倫的)인 필연성이 아니라(마치 창세기 3:19에 나오는 고역 苦役 처럼) 창조된 질 서의 일부분이라는 점이다. 24절은 결혼이 하나의 규범이며, 모 든 사람이 결혼을 해야 하느냐, 하지 않아도 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임의로 생각할 게 못 된다는 고대인들의 전제를 나타내고 있다.

 제 2 주제:히브리서 2:9-13 성공회의 보다 긴 성서 일과(日課)는 그보다 짧은 것들과도 관 련이 있으며, 실상 이 장(章) 전체가 긴밀한 관계로 지니고 있는 만큼 히브리서 2:1-8도 고려해야만 본문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 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익명의 이 서신은 "오순절 후 스무째 주일"에서 "스물 일곱째 주일"까지의 제 2주제의 본문을 제공하 게 된다. 따라서 설교자와 회중들은 다같이 이 서신과 계속 접할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이 서신으로 말하면 그 논증이 미묘하고 그 문체가 우아한데도 불구하고 소홀히 여겨지는 경우가 자주 있 다. 통합적인 신학 논증을 상술함에 있어 신약 가운데 오직 로마 서 하나만이 히브리서에 필적할만하다. 그러므로 석의자들은 주 어진 본문이 전체적인 논증의 전개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지 항상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히브리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신학적인 주제들이 독자의 실제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독자들이 유대교로 돌아갈 위험 성을 지니고 있다든지 또는 그들이 쿵란 종파에 속한자들(또는 다른 유대인들)로서 저자가 그들을 복음화하려고 애쓰고 있다든 지 하는 따위의 생각을 할 분명한 이유는 없다. 독자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이며 또한 처음의 열심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저자 는 그들이 믿음에서 "떠내려 갈" 위험에 빠져 있으며(히 2:1, 3:12-19, 6:4-8), 신앙의 이해에 있어 제자리 걸음만 할 위험성 을 지니고 있으며(히 5:11-6:3), 또한 예배 참석을 게을리 할 위 험성을 안고 있는 자들로(히 10:23-25) 보고 있다.

이전에 훌륭한 공과(功課)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히 10:32-34). 그들의 열심은 식어가고 있다(히 12:12). 왜 그들의 믿음이 내리막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주님께서 그들이 예상했던 것만큼 속히 오시지 않는데 대한 역반응(逆反應)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기독교 예배에 대한 예전의 정열이 계속 지속될 수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이제 까지의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다 주장되어 왔다. 어쨌든 이 공 동체를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 저자는 신학적인 논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신학의 핵심 주제는 그리스도의 정의(定義)이다. 그의 의 의는 천사(당연시되는 전승에 의하면, 천사는 율법을 전해준 중 개자들이다. 히 2:2)보다는 우월하고 구약의 모든 의식보다도 우 월하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독자들은 신적 중보자로서의 천사들 의 역할에 깊은 인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우월하시다는 사실을 거듭 내세우고 있 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광채(apaugasma,아파우가 스마, 1:

3. "광채"는 과정과 본체를 모두 의미할 수 있다)요, 창 조의 대리자(agent)요(1:2),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 자이시다(1:3-13). 뿐만 아니라, 천사들이 전해 준 하나님의 계 시는(아들에 의해 시작된) 복음으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었고, 이 복음은 사도들에 의하여 확증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표적들 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또한 성령의 은사에 의해 증거되었다(히 2:1-4).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사건의 종국성(終局性,finality)의 주 제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키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세 단계" 의 기독론에 의존하고 있다. 즉 선재(先在,pre-existence)와 현 존재(existence)와 부활 후 존재(後在,post-exixtence)가 곧 그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주로 둘째 단계와 세째 단계,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승귀(昇貴)에 역점을 두고 있다. 주제에 있 어서의 두 번째 요소는 구약의 여러 본문의 인용으로서 저자는 이것들을 세 단계에 각각 상호관련시키고 있다. 세 번째 요소는 성육신을 통해 인간들과 결속되심으로써 인간이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레내우스(Irenaeus, 주후 180년 경) 에 의해 발전된 주제 곧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 분과 같아지 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와 같이 되셨다는 주제를 미리 내다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영광 중에 계시고 우리는 아직도 지상 에 살고 있는 역사적인 실존이다. 이러한 차이가 복음의 효력을 손상시키지 않을까 저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역설하고 있다.

히브리서 2장은 이러한 확신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의도 로 기록된 것이다. 첫째로 그는 만물이 다 아들에게 속한 것임을 역설하기 위해 시편 8편을 인용하고 있다. 저자는 "인자"라는 말 을 원래 히브리어 원전에서 의미하는 바 "인간"과 동일시하지 않 고 천적(天的)인 인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70인역(LXX)에서 읽은 대로 세 단계의 기독론을 염두에 두고 있 기 때문에 brachu(브라퀴)라는 단어를 "조금 못한"(a little less) 대신 "잠깐 동안"(for a little time)의 뜻으로 취했다 (brachu는 두 가지 뜻이 다 있음). 그래서 그는 시편 8편이 잠깐 동안의 성육신 후에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 신 인자를 가리키고 있다고 본 것이다.

 둘째로, 그는 우리가 지금은 만물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8절은 우리가 지금은 다만 몇 가지만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한 것을 볼 수 있을 분이나 앞으 로는 더 많이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 되어서는 안 된 다. 요는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므로 우리는 만물이 그에게 복종 한 것을 전혀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세째로,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부분으로서-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잠깐 동안 인간들 가운데서 인간으로 계셨던 분 곧 예수님 이시다. 저자에게 있어서는 이 세 단계는 불가분리적인 단일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고난당하신 인간으로 계시던 단계 곧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제 2단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첫 째 및 세째 단계의 실재(實在)에 대한 보증이 된다. 저자가 이런 식으로 추리할 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 있어 믿음이란 "보지 못하 는 것들의 증거 확신 "이기 때문이다(히 11:1). 믿음이 떨어지 고 있는 자들은 비록 그리스도의 주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 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믿음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재확신할 수 있 는 것이다.

 네째로, 저자는 자기의 논증을 확고히 하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성육신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11 절에 그 신학적인 원칙이 논급되어 있다. 즉 구원자와 구원을 받 는 자들 사이에 결속성(solidarity)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17절도 참조). 이 결속은 다름 아닌 바로 성육신 사건에 의해 이루어졌다(따라서 천사들이 인간을 위해 했을지라도 모르는 모 든 일들이 이제는 대체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그리 스도의 사건의 세 단계에 각각 하나씩 구약 인용을 상호관련시킴 으로써 구약에 호소하고 있다. (A) 시편 22:22은 선재하신 분이 하나님께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에서 하늘의 사자(使者)가 되겠다는 아들의 맹세로 해석되고 있다(오 직 히브리서만이 예수님을 "사도"라 칭하고 있다, 3:1). (B) 이 사야 8:17-18은 성육하신 아들이 역사(歷史) 속에 계실 동안 하 나님을 의뢰하고 (그럼으로써 믿음의 주 선구자 가 되실 것이 라, 12:2)는 의미로 해석되어 있다. (C) 이사야 41:8-9("오직 아 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히 2:16 는 내용을 말 함-역주)은 구원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부활하신 (post-existent) 아들의 말씀으로 해석되어 있다.

창세기 2장의 본문과 히브리서 2장의 본문을 나란히 병렬(竝 列)시켜 놓고 보면 이 본문들은 창조와 구속이라는 주제들을 제 시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음서 주제:마가복음 10:2-16 세 번째 본문도 역시 "구약" 본문의 주제 곧 결혼과 가족이라 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마가복음 10:6-8에서 창세기 2:24을 인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마가복음 10장은 "오순절 후 스무째 주일"에서 "스물 세째 주 일"까지의 본문을 이루고 있는 만큼, 처음 시작하는 차제에 10장 전체를 개관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의 후 반부를 세 차례에 걸친 수난 예고(막 8:31-33, 9:30-32, 10:32-34)를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세 번째 예고는 비록 10장에 나타나지만 이제 몇 주간에 걸쳐 다루고자 하는 본문들 가운데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긴 하나 마가가 기록한 내용을 충분히 이 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러한 자료들을 배치한 전체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수난 예고 하나하나가 모두 제자의 직분과 그에 따르는 희생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단 락(8:31-10:45)에서 마가는 시종 제자들의 오해를 폭로하고 있 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 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가는 이 전승들을 종합하여 정리하였다. 그러므로 현재 본문 에 나타난 대로의 말씀은 마가복음 저자(그리고 그의 전승)에게 서 나온 것으로서 예수님이 이러한 말씀들을 하셨던 콘텍스트와 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본문은 두 개의 관련된 주제를 병치(竝置)시키고 있다.

즉 (a) 이혼과 결혼(막 10:2-12) 그리고 (b) 예수님의 어린 아이 들의 영접(막 10:13-16)이라는 주제이다. 첫 번 주제는 누가복음 에 그 병행구가 없으나(눅 16:18을 제외하고) 두 번째 주제는 누 가복음 18:15-17과 병행을 이루고 있다.

예수님의 이혼관 및 결혼관은 확언하기가 쉽지 않다. 그 까닭 은 이 문제에 관해 가장 오래된 본문이라 할 수 있는 고린도 전 서 7:10-11(마가복음보다 15-20년 전에 기록됨)에서는 아내든 남 편이든 자기 배우자와 이혼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나 이 규제를 부부가 모두 그리스도인인 경우에 한해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부부 평등 사상은 그레코-로만 세계에서의 여성들의 법적 권리와 일치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사정이 좀 다르다. 우선 마태복음에서 는 예수께서 이 주제를 마태복음 5:31-32에서 한 번, 그리고 마 태복음 19:2-9에서 또 한 번, 이렇게 두 번 다루고 있다. (이중 후자는 오늘 본문의 내용의 수정이다). 이 외에도 그는 유대법에 따라 남편이 먼저 요구할 때에만 이혼할 수 있다고 그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으며 또한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고 있다. 아내 가 불성실한 경우에 남편은 아내와 이혼해도 좋다는 것이다. 이 혼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들을 모두 분석하고 상고해 보면 세 가 지 사실이 드러난다. (a) 모든 가르침이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하 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 주고 있다. (b) 상이(相異)한 상황에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소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c) 예수님 자신으로서는 단순히 이혼을 금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엇이 합법적인가 하는 문제에서 무 엇이 옳은가 하는 문제로 방향을 돌리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율 법("모세"란 말로 상징되어 있다)으로 허용되어 있는 이혼의 합 법성을 주장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혼법(신 24:1-4)은 인간의 현 실적인 상황때문에 필요하게 된 하나의 양해 사항으로 간주해야 할 것을 지적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상황은 곧 인간의 "마음의 완악함"이었다. 그러나, 원래의 하나님의 의 도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결합하는 것, 즉 이혼이 아닌 결혼이 었다.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두 가지"(P문서와 J 문서-역주) 창조 기사(창 1:27과 2:24)를 모두 인용하여, 친히 하나님께서 결혼을 통하여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결합시키셨다고 결론짓고 계신다. 그러므로, 비록 합법적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행위가 무효화 되어서는 안 된다. 산 상설교(마 5:21-48)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지금은 인간의 관계가 인간의 죄로 인해 필요하게 된 율법 안에서의 가능성에 의해서라기 보다 는, 오히려 창조주의 의도에 비추어 옳은 것에 의해 주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10:10-12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요구를 인간의 상황 가운데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실제적인 사건들과 조화시켜 보려 는 교회의 시도를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공공연한 가르침과 아울러 은밀한 풀이는 마가가 흔히 상용하고 있는 기법(技法)이 다(예:막 4:10, 7:17). 마가는 이러한 방법으로 그 때의 예수님 의 말씀이 지금 의미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보여 줄 수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또하나의 예수님의 말 씀 전승(눅 16:18과 비슷함)을 사용하고 있다. 이 전승은 아내도 법적인 조처를 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계산에 넣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간음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

 마태복음 5:23과 19:9에 보면, 아내의 음행(porneia,포르네이 아)은 남편이 그 범죄한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합당한 이유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 10:11-12에서는 간음(moichatai,모 이카타이)이 원인이 아니라 재혼했을 경우에 있어서의 결과다.

11절에서 간음을 행하는 대상이 구구인지-이혼당한 아내인지 새 로 맞이한 아내인지-불분명하다(한글 개역에는 "본처"라고 주석 적인 번역이 되어 있으나 영어 번역, 이를테면 RSV에는 "commits adultery against her"라고만 되어 있어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역주). 본문은 누구든지 자기 배우자와 이혼하면 재혼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간음을 범하는 격이 되는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본문의 말씀이 맥락에서 볼 때, 이혼은 동시 에 두 명의 배우자를 갖게 됨으로서 결국 "한 몸"을 이룰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뜻에 상치되기 때문이다.

 마가가 10:13-16을 추가한 이유는 그것이 어린 아이들을 다루 고 있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일찌기 이 말씀이 현재의 마가복음 의 콘텍스트와는 별도로 유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마태가 전혀 다른 배경에서 이 말씀의 변형된 형태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참조:마 18:3). 이 말씀은 "아멘"("진실로"로 번역됨) 말씀들 가운데 하나다. 예수님의 말씀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아멘"이란 말로 말씀을 시작하시는 것이다. 이 표 현은 의식(儀式)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렇기 되기를 바라나이다" 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말머리에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구어적인 표현과 다소 흡 사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지나치게 해석하여 원의(原義)를 그르치거나 어린애다운 순진성을 낭만화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선물을 받아들이고 또 그 선물을 주는 자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응답하는 수용성(受容性)과 개방성과 자발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설교를 위한 해석

제 1주제:창세기 2:18-24 우리는 이미 본문이 둘째 창조 기사로써 순서와 어휘와 신명 (神名)과 신학적인 관점에 있어 첫째 것과는 상이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상 이 둘째 창조 기사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기본적 인 질문들과 또 그것이 결국 어떻게 귀결지어졌는지에 대한 문제 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인간의 역사의 시작이다(이 경우에 "역 사"란 독일어로 Historie가 아니라 Geschichte이다-역주). 창세 기 2:18-24는 독자들로 하여금 "타락"설화에 대해 예비시키고 있 다.

 왜, 세상에는 폭력과 악의가 존재하는가 어찌하여 일차적인 관계에 있어서 조차도 적대감과 소외감이 존재하는 것일까 저자 는 이런 말로 시작하고 있다. 즉 "여러분들이 이제 곧 읽으시게 될 이야기(3장의 타락 설화)의 내용을 보시면, 그 원인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시게 될겁니다." 하나님께 서 동물들 가운데서 아담의 짝을 찾으시는 내용 중에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은 동물들과는 다르다. 폭력과 악 인의 원인은 인간의 기원에 있지 않다. 인간은 만물의 창조주되 시는 한 분이신 하나님에 의해 지음받았다. 인간과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과의 사이에는 본래적인 악의나 폭력은 없다. 또한 악 이 존재하는 것을 여자의 본성이 남자와 다르다는 어떤 신화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본문은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는 말과 "한 몸"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 라, 독자들은 인간이 원래는 양성(兩性)이었으나 모종의 우주적 인 타락으로 말미암아 두 쪽으로 나뉘어져 각각 불완전한 남성과 여성이 되었다는 이방적인 견해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 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각기 그 나름의 가치 와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연합 또한 창 조의 선물이다. 이 연합은 두 명의 부적격자를 합법적으로 묶어 완전하게 하는 것도 아니요, 두려워하고 죄많고 상호 의존적인 자들을 하나로 뭉뚱그러 놓은 것도 아니다. 더우기 두 사람의 성 적(性的) 결합은 어떤 죄악에로의 타락의 결과가 아니다. 성적인 성향(性向)은 타락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이제 곧 불순종과 소외와 적대 감과 죄절에 대해 읽게 되겠지만(3장) 그러나 그 뿌리는 남자와 여자의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남자와 여자는 사회 적 존재다. 독처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와 여 자는 끊임없이 서로를 부르고 또 찾는다. 이것이 바로 창조 행위 에 의한 인간의 본성이다. 이 본성이야말로 은혜의 행위 곧 하나 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선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제 2주제:히브리서 2:9-11 창세기 2장의 본문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 말은 곧바로 이 본문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본성적으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여자의 창조 기사에서 아름답 게 묘사되어 있듯이 다른이에게서 완성과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 진대, 배우자의 죽음으로 홀몸이 되는 것이 구약에서 "삭막"하다 느니 "절망적"이라느니 하는 심중(深重)한 단어로 표현되어 있을 진대, 죄의 직접적인 결과가 분리였을진대, 히브리서의 본문을 통해 면면히 흐르고 있는 화해와 조화의 음성이야말로 더없이 반 가운 소리가 아니겠는가! 나즈막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하심이라."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을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 그들 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것은 동일시(同一視)에 의한 구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조 의 행위자이시며 만물이 그를 위해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 고 있다는 저자의 생각에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 "잠깐 동안" 그리스도께서 근본적으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도 하등의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창조에 동참하셨 던 그 분은 지금은 인간의 비참한 상태에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 하심으로써 인간의 구속에 동참하고 계신다. 그 비참한 상태는 "고난"과 "죽음"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화해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동일시의 방법으로 완성되었다.

다른 사람과 동일시함으로써 얻어지는 치유 능력과 회복 능력 과 복구 능력과 화해 능력을 아는 데에 성서 본문들이 필요한 건 아니다. 인간이 독처하는 것은 좋지 않다. 경험에 의하여 우리는 이것이 시실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계속 다른 사람들과 거리 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노릇이다. 교회에서 출교 이상의 엄한 처벌은 없다. 세상에서 격리, 감극 이상의 엄한 형 벌은 없다. 그리고 고백하든, 하지않든 여태껏 어려울 때에 동행 해 온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험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 을 수 있을까 이제 다시 히브리서 2:9-11의 경험으로 돌아가 보 자. 이 경험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의 고난과 우리의 사망에 동참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지만 동정(同情)의 맛과 함께 나누는 비애(悲哀)의 맛이 아무리 달콤하다 해도 동일시하는 것만으로는 제한된 잠재력밖에 지닐 수가 없다. 만일 내가 구덩이에 빠져 있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내 옆에 뛰어내린다면 도움은 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 족하다. 동정은 고작해야 도움을 주지 못하는 연민(憐憫)의 수 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그는 우리와 한 가지로 되신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 과 함께 계셨으며, "잠깐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셨으며, 지금 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고 계심을 자주 반복해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들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will help). 그리고 그는 우리와 다른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can help).

히브리서 2:1-11이 시편 8:4-6에 대한 메시야적 해석에 근거하 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시편 8편은 하나님의 최상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에 역점을 둔 창조의 노래이다. 복음은 우리들을 어떤 낯선 다른 삶에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막연하나마 이미 에덴 동산에서부터 우리가 기억하고 있던 것을 다시금 상기 시키고 있다. 히브리서 2장은 창세기 2장에 나타난 삶의 연합과 조화와 완전함의 회복을 노래하고 있다.

 복음서 주제:마가복음 10:2-16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처음으로 소개된 보다 큰 단락인 마 가복음 8:27-10:52의 한 부분이다. 제자의 직분의 상징인 십자가 와 함께 저자는 여러 상황 하에서의 제자됨의 의미를 상론(詳論) 하고 있다. 즉 결혼에 있어서(10:1-12), 어린 아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10:13-17), 그리고 재물과의 관계에 있어서의(10:17-31) 제자 직분의 의미를 논하고 있다. 이 부분은 한때 교리문답의 일 부분이었던 것 같이 생각된다.

 독자들은 예수께서 오늘의 "구약" 본문의 한 부분인 창세기 2:24을 인용하고 계신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본 문과 창세기 2장 사이에는 사건들의 순서가 다르다는 점에 유의 해야 한다. 창세기 2장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간에 그리고 하나님 과의 관계에서 화목하게 지냈던 일을 묘사하고 있다. 그 다음에 이어서 창세기 3장에는 소외와 변명과 저주가 나타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순서가 역전(逆轉)되어 있다. 우리는 우선 창세기 3장의 타락의 결과인 변명과 험담과 비난에 접하게 된다.

창세기 이후로 분리와 적대감의 원인과 결과는 쉬임없이 제 몫 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중간에 개입한 모세의 율법조차도 비참 한 결과들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있어 율법은 행실을 변화시키기는 커녕 도리어 더욱 교활하고 기만적 으로 되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그에게 두 번씩이나 "율법이 우리들에게 허락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예수님은 그때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응답하셨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타락한" 행위의 계속을 축복하기 위해 율법을 이용하는 자들과는 달리("당신 하나님 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는 창세기 2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과 목적으로 되돌 아 갈 것을 촉구하신다. 다시 말해서, 한 몸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조화와 일치에로의 복귀는 또 하나의 새로운 율법 곧 "창세기 3장보다는 창세기 2장을 따르라"는 율법 으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확고한 결심이나 결사 적인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창조의 계획과 목적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창조의 근본과 의미, 즉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위로서의 생명의 선물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이들보다 더 좋은 본보기가 어디 있겠 는가 아이들은 아무것도 없이 빈 손으로 온다. 그들은 내세울만 한 건덕지도 없고 스트라이크를 일으킬만한 흥정거리도 없다. 어 린 아이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받들 수 있다. 마가 복음 가운데서 예수님은 분명히 핵심을 놓쳐버린 제자들을 얼마 나 준렬하게 힐책하시고 있는가! 제자들은 비록 선한 의도를 품 고 있었지만 불신에 눈이 어두워 그리고 믿음이 부족하여 계속해 서 소외와 분리에 공헌하고 있다. 만일 그런 것들이 아주 기초적 이고도 중요한 관계인 결혼과 가정에 영향을 끼친다면, 그 누가 하나님의 전(全) 가족인 교회로부터 그러한 것들의 악영향을 방 지할 수 있겠는가 만일 창조와 재창조가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 라면, 그 누군들 믿음없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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