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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은혜와 평강 (엡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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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절에서 "예수 안"이라는 말씀의 뜻을 생각해 보았다. 그 말 은 곧 우리가 이전에 예수님 밖에 있었다는 말을 의미하며, 또한 그 말은 멸망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이전 신분을 나타내 주는 말 이었다. 그런데 멸망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절망적 존재인 우리들이 어떻게 이제는 예수님 안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사도 바울 은 "은혜와 평강"이란 본문 2절의 말씀을 가지고 그 의문점에 대해 설 명해 나간다. 안타깝게도 오늘 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습 관적으로 그것도 값었이 이 은혜와 평강이란 말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 아니라 사용하고 있다.

 1.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은혜와 평강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일관되게 가장 강조되고 있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은혜라는 단어라 할 수 있는데 그 뜻은 전혀 받을 자 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다. 이 뜻을 성경의 예를 들 어 생각해 보자. 천지창조 후,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 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 는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그 결과 불순종의 당연한 댓가인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마땅히 죽어야 할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 님께서는 구원의 길(창3:15)을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 아가 그 호의에 대한 약속의 증거(창3:21)까지 보여 주셨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은혜란 결코 제 스스로 만들 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다음 평강이란 말의 뜻을 생각해 보자. 우리들은 흔히 어떤 불협화음이나 싸움이 없는 상태를 표현하고자 할 때 곧잘 이 평강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성경에 서 사용되는 "평강"이란 단어의 의미는 단순히 싸움을 그침으로 오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원어성경에서 이 평강이란 단어는 항 상 "분리가 있는 뒤에 오는 연합"을 의미하고 있다. 즉, 어떤 두 사 람이 무기를 들고 싸우다가 멈춤으로 오는 조용함을 의미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툼과 분열이 있던 그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며 악수하고화해함으로서 완전히 하나로 연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 게 생각해 볼 때, 은혜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리스도인되게 하는 믿음의 시작을 말해주고, 평강은 그리스도인의 마지막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은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불신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첫 걸음이라 할 수 있고, 평강은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의 자녀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게 되는 삶의 내용이 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은혜를 떠난 평강이 있을 수 없고, 평강으 로 인도하지 못할 은혜 또한 있을 수 없는것이다.

 2.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을 평강으로 인 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우리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 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지금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가장 먼저 기독교 의 근본진리를 말함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자 하고 있다. 즉, 바 울은 죄의 결과로 주어진 인간의 슬픈 조건을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이 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의 상태는 슬프고도 비극적 모습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본래 인간은 두 가지 슬픈 비극 을 지니고 살아간다.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려져 있으 면서도 자신이 잃어 버려져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설령 하나님으로부터 잃어 버려져 있는 존재 임을 깨닫는다해도, 그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인간으로 회복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동물과 인간의 창조 차이 를 영으로 설명하고, 스스로는 죄로 말미암아 잃어 버려진 그 영의 부 분을 회복 받을 수 없음을 죄로 박탈된 자격의 유무로 보충설명 하 라.<지면 관계상 생략>).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비극적인 모습 위에 한 줄기 소망의 빛이 비춰지고 있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는데, 그것 은 비록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지만, 그리고 곤고한 상태로 스 스로 자신을 빠뜨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절망적인 인간에 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 경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 (마12:20)고 선언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모든 그리 스도인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해서 에베소서 제일 첫 머리인 2절을 은혜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 은혜라는 말의 깊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 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하나님께 저지른 죄의 깊이가 얼마나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것인가를 자각해야 한다. 즉, 장차 자신의 죄가 가 져올 무서운 결과를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란 말의 깊 은 의미를 놓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국 신앙생활 이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는 생활이라 하겠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이 은혜란 말이 값싼, 그리고 구하기만 하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그것 도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은혜로 생각되어지고 말해진다. 은혜는 값없 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은혜가 있기 위해서 는 가장 값비싼 댓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선행되어졌음을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 한다.

여하간 스스로 선택한 죄의 길에서 얻은 죄의 결과로 영원한 사망 가 운데 놓여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은혜 안에서 우리를 바 라보시고, 긍휼히 여기시므로 이제는 멸망당할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구원받을 죄인으로서 보신다. 롬5:8절에는 이렇게 그 하나님의 은혜 가 설명되어지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계속되는 9-10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 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 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 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죄인인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시기에 우리는 그분께서 허락하시는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활동하는 힘이기에 인간이 처해있는 모든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우리를 다시 타락 이전의 완전한 인간 본래 모습으로 회복시키실 수가 있다. 어머니의 사랑이 가장 귀 하다고 말해지는 것은 그 사랑이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조금도 아 끼지 않는 희생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추상적 인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희생으로 드러난 실제적인 사랑이다.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절망적이었던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하나님의 은혜는 두가지 측면에서의 화평을 인간에게 가져다 주었다. 하나는 하나님과 원수되어졌던 인간 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일차적인 이웃)에 대한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은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이 두가지 화평이 주어지기 전까지 인간은 모든 것을 행하고 모든 것을 누린다고해도 결코 자신을 송사하는 어떤 양심의 꺼리낌으 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채워지지 않는 삶의 그러한 모든 근본적 고통을 극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최소 한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주어질 삶의 승리를 바라보며 오늘의 고통을 극복하게 된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되기 전의 그 어떤 삶 의 형태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이제는 자신이 미워 하는 사람, 아니 핍박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화평 속에서 그를 위해 기도 할 수 있게 된다. 즉, "너희의 원수를 사 랑하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순 종해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러한 화평을 완전하게 누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서도 우리는 힘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빌4:7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 예 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 님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우리들로 하여금 은혜로 화평을 누리게 하실 뿐 아니라 그 평강을 계속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항상 우리를 지 키시고 유지시켜 주신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 절). 이 모두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사인 것이다!

3. 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게 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본문 2절의 시작되는 말씀, "하나님,우 리 아버지"라는 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어떤 사 상이나 철학 속에서 하나님을 어떤 미지수나 알 수 없는 절대자 정도 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미지수가 아니라 본문의 표현 그대로 가장 가까운, 어떤 의미에서는 나와 하나라 할 수 있는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단순히 하나님을 일반적인 의미의 부성애로 묘사하고 있지 않 다. 이러한 점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말씀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 다. 이 드러나는 점이 세상의 모든 다른 종교와 우리 기독교가 다른 점이다. 즉, 이 말씀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 는 그 뒤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와 평강은 주 예수 그리스 도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만 함께 나오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으로 부터,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기독교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은 단 한가지도 없다. 부모의 곁을 떠난 자녀에게 있어 근본적 축복이란 잃어버려진 자녀가 부모에게 돌아가는 길 뿐이다.

더구나 자녀 스스로 부모 곁으로 갈 수 없을 때, 부모가 먼저 자녀에 게 가는 것처럼 귀한 축복은 없다. 눅15장에 나타난 탕자 아버지의 비유는 그와같은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곳에 기록되어진 내 용과 같이 선행된 아버지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 탕자아들은 결코 아 버지에게로 돌아갈 생각도, 돌아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죤 칼빈이 이러한 말을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아들이 되신 것은, 사람들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 다" 이 말에서 드러나는 진리는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신앙고백과 같 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이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우리들 자신 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 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통로라 한다면, 평강은 그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이 누 리게 되는 가장 본질적이고도 근본적인 삶의 특징이다. 바울이 오늘 본문 엡1:2, 편지 맨 앞에서 은혜와 평강을 말하고 있는 것은 이같은 귀한 진리를 알고 있어야만 그 후에 계속 주어지는 모든 하나님의 말 씀들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신, 아니 모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이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바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 다. 이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 없이 받게 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평강 가운데 그 분께 찬양 과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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