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자의 사랑 (요 15:17-19)

첨부 1


기독교 신자가 되고난 이후에 가지는 여러가지 특권들 중에서 중요한 특권으로서 `평안과 기쁨과 만족'등을 들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 신앙 생활을 통하 여 느껴 볼때에 `그 신앙생 활이 과연 기쁘고 평안하냐 능력이 있느냐'고 반문해 본다면 때때로 당혹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도 종종 아니 거의 오래토록 평안과 기쁨과 만족들을 잃어버리고 살 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시험과 핍박과 환난의 바람이 불어오면 쉽게 무 너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15장의 포도나무에 관한 이야기의 결론 부분에서 우리가 이 같이 우리가 세상에서 당황하게될 수 밖에 없는 핍박에 관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 니다.

 다시 18-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 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 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 미움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17절의 말씀과 같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라는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므 로 신자의 신앙 생활이란잘못된 생각과 습관과 행실들을 고치고 바르게 하는 의미 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드는 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며, 일체가 되며, 연 합 되는 일 등등에 아주 큰 비중을 갖고 있는 비유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 며 주님안에 거하는 것은 사랑으로 나누는 인격적이고도 영적인 교제입니다. 또한 동시에 그것은 윤리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인데, 곧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과 함께 교제할 만한 수준으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신앙이란 바뀌어야 할 성품이 바뀌고 고쳐져야 할 습성과 행동이 고쳐 지는 것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요15:9-12절을 보십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 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 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 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포도나무 비유인 본문을 읽어 나가면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서로 사랑하라는 명 령 이 중간중간에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라, 내 안에 거하 라, 사랑하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세상에서 너 희가 핍박 을 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때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사 랑하라 사랑하라, 이것이 너희 기쁨이 충만케 되는 것이니라... 이런 식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에 힘을 잃는 가장 큰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우리 자 신 에게 즐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우리에게 힘이 되지 않고 재미없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독교 자체가 힘이 없어서'라거나, `기독교가 진리 가 아니라서'라고는 말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기독교는 거짓이 고 나는 진짜라서 내가 지금 속고 있는 것이다'라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 는 기독교가 사실인데 그 사실을 왜 그 사실대로 적용하여 살지 못하느냐는 것입 입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같은 질문을 신자들끼리나 스스로가 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같은 질문을 하지 않습니까 그 대답은 간단합니 다. 그렇게 따지고 물어보았자 결코 그렇게 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면 즐겁고 재미있다'라는 진리를 알아도 그렇게 안 할 것이기에 아예 물어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좋은 것을 안 하려고 하는 것 일까요 그것은 그렇게 살려면 우 선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 뒤집어 엎고 말씀 앞에서 항복해야 되기 때문인 것 입니다. 다시말해 그 신앙을 위하여 모험을 걸어야 한다는 데 대하여 아직 우리의 신앙이 미흡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같은 항복과 모험을 각오해 야 하는 부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 로 이렇게 항복과 모험을 각오해야 합니다. 즉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며 박수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며 형통하며 모든 것을 손아귀네 쥔 자가 되는 것이 결단코 아님 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뺏을 수 없고 누릴 수 없는 기쁨과 만족과 환희에 들어가 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축복을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다는 데 기독교의 약속이 풍성하신 약속이며,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가 신앙 생활을 하다가 당황하고 힘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인 으로서 나는 분명히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이것이 세상 앞에서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선 신앙의 힘을 잃고 맙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괴롭 히는 것도 아니요, 해를 끼치자는 것도 아닙니 다.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진리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이 진리 야말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죽은 다음에 반드시 직면해야 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같이 중요한 내용과 의도가 왜 사 람들에게는 그렇게 정당하게 전달되지 않고 평가되지 않고 도리어 반대와 핍박과 멸시에 부딪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 앞 에 우선 당황해 지는 법입니다. 게다가 신앙 생활을 해 오면서 더욱 신자다워 지는 것인 사랑을 더 많이 하고,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용서하고, 더 자비해 지고, 웃 음을 더 많이 품고 겸손해지며 온유해진다고 해도 그것이 사람들 앞에서 그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다시말해 기독교의 진리됨과 그 절대적인 생명이 객관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장벽에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더 많이 양보하며, 더 신자다워지며, 더 깊은 사랑을 소유하였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거기에 대하여 항복하지 않고 또한 우리가 가진 깊은 신앙 들이 우리 자신들이 볼때에 힘있는 결과나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를 무척 당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이같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기독교 가 가짜이거나 최소한 가짜가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과 같이 이렇게 사는 것은 손해 일 뿐 이다 하는 생각으로 쉽게 몰아 가버리는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말씀은 놀랍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이유는 우리의 소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15:19절을 보십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 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 하느니라" 분명히 소속에 관한 문제입니다. 미워하는 것은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 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것은 소속이 같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미움과 사랑은 소속에 관한 문제입니다. 요15:7절을 보십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렇게 시작 된 말이 9절에서 이렇게 연결됩니다. 9절을 보십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 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 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결국 사랑도 소속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 라는 것에 대하여 좀더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들이 곧잘 오해하는 사랑 이란 윤리적인 차원의 최고의 경지로 오해되곤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너무나 내용이 깊고 풍성해서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만 지금 요한복음에서 등 장하는 사랑이라는 말은 우리가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라, 아주 뜻밖의 차원의 개념과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켜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사랑은 13:34절에서 사랑의 계명으로 최초로 등장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네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런데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면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후에 가룟 유다가 자기를 팔 것을 아시며 수난 당할 것을 알리십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갔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편 만 남았습니다. 요13:31-34절을 보십시다.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 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 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 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새 계명은 그리스도에게 소 속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은 자들 만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즉 능력과 자 격에 관한 이야기는 곧 어디에 소속되었느냐 하는 소속 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 다. `내가 너희를 내 편으로 삼았기에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같은 편이니까 사랑하 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기독교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내게 무엇을 위해서 왜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는 언 제나 이 문제에 와서 다시 걸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능력과 사랑과 진리와 생명 됨을 세상에서 써 먹으려니까 재미도 없고 기쁨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세상을 위하여 써 먹을 것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 영원한 나 라를 위하여 준비할 때에 힘이 있게되며 필요하며 재미있게 되며 감격과 자랑과 환 희를 늘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키셨던 말씀을 사람들이 못 알아 듣고 오히려 죽이려고 덤벼 들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뭐라 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버지여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지혜있는 자들에게는 감추고 어린 아이들의 입을 의탁하사 진리를 말씀 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 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세상 일과 사 건만으로 그 운명이 결정지워지거나 좌우되 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 고 있습니다. 신자는 적어도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 리 자신들은 이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세상으로 나와서 세상 일에 자신을 견주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재미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끼리 만나는 것이 재미 있을 리가 없습니다. 사회적인 신분과 사회적인 실력과 사회적인 지명도에서 만나는 것이니까 교인들의 만남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끼리 만나서 안부는 물을 수 는 있습니다. `사업이 잘 되십니까 장사는 잘됩니까 건강하십니까' 이 정도는 그 냥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저는 기도할 때에 이런 부분이 잘 안되는 데 왜 그렇죠 집사님 전번에 기도하시는것 보니까 참 잘 하시던데 처음부터 그렇게 잘 하셨습니까 아니면 어떤 기도 책으로 배웠습니까' 뭐 이런 얘기가 있어야지 않 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얘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게 무슨 신자입니까 도대체 여 러분들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약4:4절을 찾아 보십시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다시 오늘 본문으로 가서 요15:18-23절을 보십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 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 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 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 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우리를 미 워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도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세상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이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린 이중 인격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옛날 말로해서 간신인 것입니다. 세상하고도 친하고 하나님 하고 도 친합니다. 도대체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가능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 용하게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 독일에서 [얀네의 일기]라는 영화가 상영 되었을 때에 재미있는 현상이 있었 다고 합니다. 그 영화 상영이 끝나고 나서 극장측에서 실내등을 켜지 않았었다고 합 니다. 왜냐면 그 영화를 본 독일인들이 자기 민족의 잔인성과 비인간성에 창피하여 낯을 들고 있을 수 없으리라 여겨서 극장측에서 불을 켜지 않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은 얼마나 뻔뻔한지 모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를 이런 식으로 믿는 것이 당연하다는듯 살고 있는데 대해서 할 말을 잃고 맙니다. 기가막힌 모습에 이제 익숙해졌을 정도까지 된 것입니다. 이 것이 오늘날 교회의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대하여 분명하고도 타협없는 처신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2:15 절을 보시겠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세상의 미움 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세상이 미워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 아니라, 죄가 미워본 적이 있으십니까 미워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정당하게 살기 때문에 죄로 뒤집어 쓴 이 세상이 빛으로 나가는 여러분들을 할키고 싫어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디를 가도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어느 곳을 가서 아무 말도 안 해도 거짓을 말하는 자들이 찔리고, 사기를 치는 자들이 캥기고, 무정하게 사는 자들이 속이 불편한 존재로 존재하셔야 되는 겁 니다. 바로 그게 신자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야 신자인 것이 증명되고 찬송을 불러야만 신자인 것이 증명됩니 까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인품과 모습과 표정이 신자의 향기가 나와야 합니다. 한마디의 말을 해도, 한 발자욱을 옮겨 놓아 결정하고 표현 하는 것이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요,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오직 여러분만이 영혼의 향기를 발하며, 생명과 생수를 증거할 수 있 는 자들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그렇게 사십니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내가 처해있는 환경이나 조건이나 명예나 지위나 부의 차이나 그 어떤 것으 로도 내가 지금 이런 정도로 밖에는 신앙 생활을 못하는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다 시말해 나의 신앙 생활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덜 사랑하셨거나 한국 교회에 능력을 덜 베푸셨거나 하시지 않았습니다. 나의 신앙의 나약함이란 절대로 다른 것에 핑계를 댈 수 있는 나쁜 조건을 가져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문제에 있어서 어린애이며 미련하 고 악한 종이기 때문입니다. 애쓰고 힘쓰고 노력하지 않고서 그저 세월만 흘러 보내 며 왔다 갔다 하기만 하면 어느날 이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버려야 합 니다. 신앙과 사랑은 년수만 채우는 것으로 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 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으며, 동시에 세상에서 욕먹고 불편하게 되는 것을 싫어하는 자인가 하는 사실을 뼈아프게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자학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금욕주의자가 되라는 이야기도 물론 아닙니다. 우리의 일 주일 생각 동안 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관심과 열심이 우리를 사로잡은 적이 몇번이나 있었습니까 많이 애를 쓰야 합니다. 배고프면 밥을 생각하고, 목마르면 물 마실 생각이 나지만 영혼의 굶주림에 관한 한 우리의 본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 죽어서 출 생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필사적인 노력이 경주되어야 합니다. 애를 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매달리셔야 합니다.

문득문득 깨달을 때에 깨끗이 청소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왜 나는 이꼴입니까 불 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간섭하여 주시옵소서! 내버려 두지 말아 주옵소서!' 이같은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절규가 되어야 합니다. 피맺힌 호소가 여러분의 잠자 리를 수놓아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은 너무 이것이 없습니다. 너무 쉽습니다. 근본적으로 신자들과 신자들 간의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전무한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영혼을 준비하 는 자들로 같은 지역, 같은 사회, 같은 시대 속에서 같은 전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누군지 모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생명과 진리가 저들에게는 자꾸만 정죄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를 만 나기만 하면 못 물어 뜯어 어르릉 거리고 넘어뜨리려고 하며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공범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바로 그같은 와중에서 버텨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리됨과 생명됨을 버티며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 는 최고의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상급이요, 책임이요, 빛이요, 소금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 해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편입니다. 이 진리를 위하여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처음 부터 꼭 이기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 해 주십시오. 내가 하나님 편에 서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십시오.

 <결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자를 향해서도 `당신도 한 번 믿 어 보시오!'라고 말하고 웃으며 죽어갈 수 있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아직 거기가지 미치지 못했다면 그렇게 도달하지 못한 수준으로 인해 기독교의 기쁨과 평 안과 사랑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그 정도의 신앙 수준을 가지고서 기독교를 쉽게 생각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마음을 고쳐 잡으시 고 결심하여 믿은 도리들을 굳게 잡고 체험하게 해 달라고 기대하고 기도하시기 바 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생애 가우데서 엘리야와 모세와 바울이 경험하였 던 모든 기적들을 다시 일으키시는 것을 여러분이 목도할 것이요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모세를 부르셨듯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홍해를 가르신 그 능력으로 우리를 지키시며 보호하시며 간섭하십니다. 우리의 불신앙이 하 나님의 능력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짧아졌거나 우리를 향한 사랑이 식어본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된 여러분들의 특권을 다시 불러 일으키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