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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택된 백성인 증거 (요 15: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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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의 결론 부분으로서 진리의 성령께서 증거하 게 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놀라운 하나님 말씀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요15:16-17절을 보십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 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 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 려 함이로라" 또한 요15:19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 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과 우리가 주의 자녀가 되어 소속이 달라진 것을 이야 기 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요15:21절에 가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 26절에서는 성령님이 오셔서 나를 증거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포도나무 비유는 곧 소속에 관한 비유입니다. 또한 동시에 이 비유는 요한복음의 결론 부분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새롭게 소속된 신자가 되고나서 왜 세상 에서 오해되어지고 핍박을 받으며 환난을 당할 수 밖에 없는지를 추적해 보고자합니 다.

 <본론>

이 요한복음 15장에 나타난 포도나무 비유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예 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그의 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가지가 열매를 맺히는 것은 가지 스스로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나무에 잘 붙어 있는 결과로 열매가 달려지는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결코 자신의 결단이나 노력의 댓가가 아닙니다. 나의 수고와 땀으로는 그런 열매를 맺히게 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깊은 교제를 통한 은혜로서만이 즉, 포도나무되신 그리스도께 끝까지 잘 붙어 있을 때에 그런한 놀라운 열매가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가장 잘 혼동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기만 하면 이제 모든 것이 다 된 것인양 결론을 손에 쥔듯한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어렵게 고민하고 망설이고 하다가 마침내 결단하여 감격의 자리에 앉게 되었으니 이제는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러나,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갈등은 끝이 났지만, 그 결단이 신앙 생활이 다 되 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야말로 신앙의 출발점에 정식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결심은 신앙의 시작일 뿐입니다. 앞으로 변화되고 항복 되어져야 할 부분들이 얼마나 많이 산적해 있는지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처음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출발을 하였다가 나중에 서서히 분명하게 알아가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 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사건이 바로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사건입 니다.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서 나눈 대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 나라와 신앙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일 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거듭난다'는 말을 했을 때 니고데모는 이런 반문을 합니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나서 어떻게 다시 모태에 들어가서 출생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예 수님의 대답이 거듭난다는 것이 어머니 모태로 다시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말하자면 고후5:17처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는 뜻 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물조물이요,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태껏 우리가 알고 온 세상의 일들과 경험하고 걸어왔던 세상 방법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 라 전혀 새로운 차원의 것입니다. 가치관이 바뀌는 것이며, 목적이 바뀌는 것이며, 원리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시작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 날들을 헤멜 수 있으며, 여러 달 아니 여러 해를 망설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고민 을 했을 수도 있으며, 많은 말에 귀를 귀울여 보았을 수도 있으며, 마침내 거듭나는 신자로 도달하는데 많은 간증거리들을 갖고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 에 어느날 드디어 여러분 자신이 놀라운 감격 속에서 `이제 믿기로 작정하였다!'는 결단을 하는 그것을 가리켜 모든 것이 이제사 끝이 났구나! 하는 생각에 빠질 위험 성이 다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 결단은 이제 시작에 불관한 것입 니다. 신앙의 출발점에 섰을 뿐이라느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 신앙의 새로운 영역에서 하나님의 자녀로로서 영원의 삶으로 출생했을 뿐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교회 안에 신자들에게 생기는 가장 큰 시험거리는 바로 `내가 믿기로 결심했다!'는 그것이 결론이 되어 믿기 전에 자신이 갖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그 결론에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 습성을 버 리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위와 명성이 교회 안으로 고스란히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교회란 영적인 영역이므로 이전 영역과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롭게 배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예수 를 믿기만 하는 것으로도 거의 다 하였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 때문에 새롭게 가르침 받아야 할 산적해 있는 일들을 모르고 단지 자신이 알고 있고 익숙한 방법인 자기의 실력을 신앙에 도입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같이 교회가 교회같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거기에 소속된 모든 신자들은 이런 점에 있어 분명한 문제 의식과 말씀에 따른 올바른 각성이 있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교회들과 신자들이 이런 의미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게 되기까지 의 갈등과 과정을 치장하고 미화하고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 는 것에서 이제 벗어나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내어 선전하고 간증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을 P.R하는 것보다 속에서부터 조용하고도 은은하게 풍겨나오는 그리스도의 향 기가 있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어떤 의미에 있어서 쇼(show)를 합니다. 쇼처럼 즐거운 인생도 없 다고들 말합니다. 바로 교회가 그런 것을 즐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를 해도, 선 교사를 보내도, 부흥회를 해도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 흥행이 되고 종교적 쇼 가 되며 전시효과에 목적을 거는 것에 불과할 위험성이 다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과 연 여러분 자신들이 신령한 일에서 그리고 영적인 일에서 무슨 도움을 얻었습니까 선교사를 보내며, 개척 교회를 도우며, 구제를 하며, 봉사를 한 일들이 여러분에게 어떤 그리스도의 향기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했습니까 여러분이 행하는 그 봉사와 섬김이 그리스도의 향기와 열매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의 형식과 쇼 에 불과 할 뿐입니다.

신자들이 봉사 활동 하는 것이 때때로는 그 황당함에 당황케 되는 적이 많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전도회 회장까지 하던 사람이 이사를 와서 이사간 동네의 교회에 등 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일년이 다되도록 일할 거리를 주지 않는다고 투 덜거렸던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보면 일할 사람이 없는 교회에 그런 마음을 갖고 있 다는 것이 좋은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만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데 놀라는 것입니다.

대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한 여자치고 예의바른 여자를 찾아 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학교 육성회 회장들이 설치는 것 같이 점점 남자같이 되어가고 말을 막 하기 쉬워지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교회에서 봉사를 하면서 온유해지고, 겸손해지고 아름다와지는 것이 아니라, 거칠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봉사를 하고 나면 거 칠었던 사람이 얌전해지고, 세상적인 사람이 거룩해지며, 급한 성미의 사람이 온유 해지며, 양보란 할줄 모르던 사람이 양보하며, 인내하지 못하던 사람이 기다릴줄 아 는 사람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 일을 하면 할수록 그렇게 거칠 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그 교회에 나아오는 사람들은 이전에 자기 가 가졌던 목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으로 바뀌어져 가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대로 바뀌어지며 변화되는 것에서 감격 이 있고 감사가 있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대다수의 교인들이 교회에 나아 올 때에 귀를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입만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안타까움입니다.

우리는 내 지식과 경험으로 하나님을 스스로 터득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와서 가르쳐 주어야만 습득하고 깨달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이전에 세상에서 갖고 있었던 지식이나 경험으로 하나님을 치장하고, 또한 그것으로 하나님 께 봉사하려고 모인 집단이 아닙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새롭게 공급해 주시는 것으 로만이 할 수 있을 줄로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신자들이 이제 내가 예수를 믿었으니 `뭔가를 주님께 내 놓아야지'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그것이 주님이 공급하시는 것이 아닌 자기 것으로 신앙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 로 여기서 신앙이 이상한 모습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확신과 신념으로 주의 일을 하고 신앙의 길을 가는 많은 불법이 성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심판 때에 `이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 게서 떠나가라!'는 책망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으로 참기 어려운 분위기 중의 하나가 정말 그 사람의 영혼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호주머니의 돈이 필요한 교회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나 명성이나 물질로써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유혹은 목사에게 있어서 도 떨쳐 버리기 힘든 큰 시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것들을 위해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유혹들을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신령하고도 풍성한 것을 위해서 불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이지 않고, 그 뜻을 믿지 않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양보가 없고, 온유함이 없고, 기다려 주는 것이 없어지는 것 입니다. 결국 이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세상적인 것들과 내가 하려고 하는 고집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밀쳐내고 있음으로 모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그 런 의미에서 사람들을 헛되게 소모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를 나오는 신자들도 더 이상 신령한 기대도 없으며, 항복이 없으며, 마음을 비우지 않고 나오 며, 목사도 죽을 결심이나 하나님의 지시한 것을 전달하려고 만나지 않기 때문에 그 렇게 헛되게 시간과 정력 만을 소모할 뿐인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 하나의 책임이라 고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가 새롭게 각성하고 반성하여 일어서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믿고 처음으로 당황하게 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모를 때에는 모두가 다 좋게만 여겨졌었는데 알고보니 교회가 어쩌면 이런 식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신 자들이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는 면들을 알고서 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 에게서 제일 큰 유혹 중의 하나가 신자들이 예수 믿고 3년 동안만 있다가 모두 천국 으로 가 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개 예수 믿고 3년 동안이 가장 충성을 잘 하며 가장 열성적으로 봉사를 하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믿 고 3년이 지나가면 거의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목사쪽에서 보자면 자기의 과거를 알 고 있고 처음부터 함께 있었던 고참 신자들이 제일 귀챦습니다. 말도 안 듣고 다 아 는 것같은 눈초리로 늘 이상한 웃음을 흘립니다. 그러나 새로 믿고 나온 신자들은 3년 동안은 목사가 화장실도 안 가는 줄 알고 밤마다 예수님과 만나서 신령한 이야 기를 다 듣고 오는 줄로 압니다. 목사가 입만 벙긋하면 아멘으로 받고 그렇게 즐겨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게 목사의 유혹입니다.

교회는 서로 입맛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낳은 자식이 여러분의 마음에 딱 맞아본 적이 일년에 몇번이나 있었습니까 그저 속썩이 는 나날들이요, 걱정의 연속인 것입니다. 공부를 못해 걱정이요, 담임 선생님이 부 르면 괜히 걱정이 됩니다. 어디 놀러를 가고 싶어도 집에 아이들만 남겨놓을 수 없 어 마음대로 갈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은 마음대로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 니다. 단지 맡기워진 책임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혹시 목사를 선택할 수는 있어도 교역자가 신자들을 선택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신자를 만났으면 좋 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유혹인 것입니다. 만일 계속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다 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모독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대하며 이 교회에 모였습니까 하나님의 의도와 뜻이 무엇인지 는 아예 관심도 없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민수기 11장에 가면 이 문제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으면서 광야 길을 걷고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민11:4-6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 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 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 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여기서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물벽으로 갈라선 가운데를 걸어갑 니다. 말미잘과 해삼을 밟으면서 길을 건넙니다. 그 감격이 출애굽기 15장에 민족적 인 찬송시로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야를 걸으면서 목이 마를 때 반석에서 부터 나오는 생수를 먹고, 배가 고플 때 하늘로서부터 이슬같이 내리는 만나를 먹었 습니다. 만나란 지금식으로 말하자면 고급 과자 같은 것입니다. 꿀과 기름이 섞인 맛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남들이 간증할 때마다 그들이 경험한 기적들이 늘 부럽지 않습니까 나는 왜 꿈에라도 예수님이 한 번 나타나 주시지 않는 것일까 나는 왜 기도해서 암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런 간증을 하고 3년 을 제대로 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기도해서 병낫고, 기도해서 아이가 학교 에 들어가고, 기도해서 잘 된 것이 그의 평생에 신앙 생활을 잘 하도록 힘을 주었다 고 하는 사람을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분명히 애굽에서 꺼 내서 광야에다 집어 넣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에 보내는 싸움이었습 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예수 믿고 애굽 같은 이 세상의 죄악에서 구출 받은 것은 우 리로 하여금 이 광야인 현실의 삶에서 영원히 잘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저 가나 안 즉 천국에서 영생하도록 잘 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 리는 자꾸만 이 광야에서 왜 이리도 힘들고 어렵느냐고 투덜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나안으로 진군해 들어가야 합니다. 완전히 새로와진 자세와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관한 기록이 여호수아 1장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땅을 가나안이라고 합니다. 애굽 땅도 아니고 광야도 아니고 가나안 입니다.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를 능히 당할 자가 없다고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 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모세와 함께 하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바로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약속입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 께서는 엘리야와 함께 하셨고 다윗과도 함께 하셨던으며 오늘날 바로 여러분과도 함 께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라 하시며, 여러분의 입술로 그분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으니 옛날에 모세나 여 호수아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편을 들었던 것보다 더 여러분들의 편 을 드시면 드셨지 결코 덜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모세와 여호수아만 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는 기대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쉽게말해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인 것입니다.그렇게 제대로 믿지 않을 바에야 왜 믿기로 하였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오늘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인 포도나 무 비유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나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 희는 가지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즉 내 계명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많이 맺으리라 그리고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는 이야기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내가 주님의 가지구나!'하는 것을 깨닫고서 가지가 되기로 결심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지가 되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주 님인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었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 가지가 되도록 만들자는 전도에 게으르지 말고 힘써야 하는 것이 분명한 일생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그 사명 만을 위하여 우리를 가지 삼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가지 삼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허락된 주님의 풍성한 열매들을 맺 히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의 기쁨이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신령하고도 영원한 세계의 거룩과 의아 진리와 절대 속을 향해 걷는 경력이 여러분에게 쌓여져 나가기를 원하 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모두가 영적인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누가 누구보다 낮지를 않습니다. 이제 영적인 수준과 영적인 이해력과 분별력과 지식에서 성장하고 변화되기로 결심하셔야 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교회에서 서로가 평가하며 확인할 내용들입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지위나 능력이나 가진 것으로는 그 무엇도 비교 할 일도 없고 으시댈 것도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확인해 주지 않는데 대하여 당황 해 하기도 합니다. 특히 사회에서 대접을 받으시던 분들이 특히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영적인 차원에서만 대접을 받으며 인정을 받으며 비교 되어야 합니다. 모 방하고 싶은 사람이나 충고하고 위로하고 싶은 일들이 모두가 다 영적인 차원에서의 일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세상 일로 동업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것 때에 돈을 꾸어주는 일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런 일들 때문에 모 인 자들이 아닙니다. 기도하며 말씀을 소개하며 그가 겪었던 영적인 갈등들에 대하 여 자기의 경험이 도움이 되도록 소개하는 것들로 서로 친해져셔야 합니다. 그러한 일들로 자주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안타깝고 어려운 것이 여러분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도무지 기대를 하지 않을 뿐아니라 상상조차도 할 건덕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 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자주 교회에 나오셔야 됩니다. 자주 모여야만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앞선 분들을 자주 만나셔야 됩니다. 이야기를 청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세미나 나 수련회나 수양회 부흥회 등 훈련 프로그램에 빠지시면 안됩니다. 빠지는 만큼 손 해요, 아는 것만큼 이익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꾸만 모이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모여서 자꾸만 말씀을 강론 받으며, 한 번 더 기도하며, 예수 믿는 다 른 사람과 한 번 더 대화를 나눔으로서 우리는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조금씩 조금씩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알지 못하면 기도도 못합니다. 알지 못하면 간절 함이 생길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안탑깝게도 오늘날의 신자들의 관심사와 활동이 대부분 영적인 문제를 위해 서가 아니라, 소모품적인 일들을 위해서 이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이 땅에서 한 번 잘 쓰고 사용하고 없어져 버리고 마는 세상의 물질이나 건강이나 명예나 출세 에 관한 일들에 거의 목을 메달다시피 되어 있어 진작 중요한 영적인 일들은 아예 포기한 상태로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처해 있는 최대의 약점 이요, 병입니다. 이렇게 전락되어 버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시거나 성경이 약속한 신령한 축복들이 가난해서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전적으로 우리 자신들이 고집을 피우며 실수한 결과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믿 음의 선조들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시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그 사실이 갖는 엄청 난 축복과 약속들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 딪디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나안의 전쟁은 참으로 기이합니다. 법궤를 앞세워 요다강을 단숨에 건너고 여리 고 성을 다만 일곱 바퀴를 돌아서 무너뜨려 버립니다. 알고보면 얼마나 간단하고 쉬 운 일인지 모릅니다. 바로 여러분의 생애에도 그와같은 기적적인 영적인 싸움의 인 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에게 심각한 병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영적인 삶을 살지 않기로 아예 마음에 결론을 내려 놓고 앉아 있다는 사실 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단지 이 세상을 좀 더 쉽고도 편하게 살기위한 수단과 조 건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론>

교회에 나가 예수를 믿으면 주님을 닮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극복하게 만 들며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딴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기대도 영적인 반응도 다 죽어버린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이 뿌린 가리지일 뿐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 분을 말씀으로 간섭하셔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참으로 예수를 믿는 자의 특권과 능력 으로 초대 되도록 마음에 진리와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으로 격발시키고 깊은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 뛰쳐나가 감사와 희열에 찬 찬송을 부르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들은 그 미지근한 자리에서 깨어나 기대하셔야 합니다. 그리 입술을 열어 구하셔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적당히 만족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신앙은 너무도 가난한 것이었습니다. 일시적이고 잠시만에 소모 되어 없어져 버리고 말 세상의 일들을 위하여 그토록 끝없이 몸짓을 하고 있건만 그 것은 무의미한 몸짓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라지고 소모되고 없어질 것들에 매달 려 있을 동안에 여러분에게 정당하게 돌아갈 수 있는 이익과 축복과 놀라운 영광들 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제발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신자의 신자된 바른 위치를 이탈하지 않기로 작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세상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에 속해있 고 저들은 육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영에 속한 것으로 인해 주는 기쁨 과 감격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만일 그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 을 정도로 부족하고 가난하시다면 아직 여러분의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에 비 해 훨씬 못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자인하시고 돌이키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K=25성령객관적사역심판은혜 성령의 객관적인 사역 요16:5-11 강해 장년 joh16-

5.4 1017 015 19920826자기부인변화성령사역삶 자기를 부인하는 삶 요16:12-15 강해 장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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