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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하는 삶 (창 01: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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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손가락이 자기 자랑을 하는 우화가 있습니다. 첫째 손가락이 내가 엄지니까 최고야 하니까, 둘째 손가락이 무언가를 가 리킬 때는 내가 제일 많이 사용된다고 자랑했습니다. 셋째 손가 락은 그렇지만 나란히 놓고 키를 재 봐. 내가 제일 크다고 으스댔고 넷째 손가락은 약혼이나 결혼 같은 귀중한 사랑을 서약 할 때 내 손가락이 사용되는 거 알지? 하며 잘난 체했습니다.

마지막에 남은 다섯째 손가락은 할 말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서서 말하기를 야, 나 없으면 병신이다라고 소 리 쳤습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이 우화의 초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 마다 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말은 쓸모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나는 무엇을 위한 존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일평생 걸 려서 싸우는 가장 끈질긴 싸움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D.L. 무디는 종종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내 인생에서 내게 가장 큰 고통을 주는 자가 있다. 그것은 바 로 나 자신이다.

인간은 보통 열등감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정당한 자기 인식, 건전한 자아상이 있을 때 비로소 건강한 삶을 기대할 수 있습니 다. 예를 들어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 은 인생을 열심히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싫어 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 접근할 기회가 주어 지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올바로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본래 누구이냐?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창세기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인간이 가지는 독 특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실존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영성(靈性)과 도덕성과 사회성,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영성을 가진 존재이다 ^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육체 이상의 존재입니다. 2장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 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인간은 흙이라는 물질과 하나님의 생기라는 비물질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사람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 다. 하나님의 생기가 인간의 영혼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인간됨을 구성하는 영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영성을 추구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영(靈)이신 하나님(요 4:24 참조)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존재 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철학자 베이컨이 나는 배부른 돼지보다 차라리 배고픈 소크라테스 가 되겠다고 말한 것은 결코 인간이 육체의 만족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고, 행복할 수도 없다는 유명한 선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마 4 :4)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떡의 필요성을 부인(否認)하신 것 이 아닙니다. 떡은 분명히 필요하고 떡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 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떡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들어 봅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육체의 안락과 물질의 부요가 영 혼의 만족과 함께 진정한 삶의 만족을 채워 준다고 착각하고 있습 니다. 누가복음 12장 16-20절의 어리석은 부자가 그 본보기 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곳간마다 곡식을 가득 쌓아 놓고 자기 영혼에게 속삭였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 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절).

부자는 영혼도 육체의 양식과 물질의 부요함만으로 행복할 수 있으 리라고 착각했습니다. 이는 대다수 현대인들이 답습하는 착각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육체를 위해 투자합니다. 땀 흘려 일하고, 건강을 관리하고,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소중한 영혼을 위해서는 그다지 투자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영혼이 기쁨과 찬양을 잃어버리고 가슴에는 불안과 초조만 이 가득한 삶을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심는 대로 거둡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자기의 영혼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둡니다.

D.L. 무디는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읽지 않은 날은 아침도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그는 자기 육체를 돌보는 일 못지 않게 영혼을 위해 투자하는 본을 보였습니다. 당신은 얼마 만큼 영혼을 위해 투자하고 있습니까? 말씀 묵상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까? 영성 계발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실 육체를 단련하는 일 이상으로 영혼을 계발하는 일이 어렵습 니다.

주일 아침에 한 번 예배드리는 것으로 신앙 생활을 다했다고 생각 하는 이들의 영혼은 참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습니다. 전도 폭발이 나 제자 훈련에 참여하기를 강권하는 이유는 영성 계발에 육체를 단련하는 훈련 못지않은 땀과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혼의 만족 없이는 결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영성 계발을 통해 진 정한 자아를 발견해야 합니다.

인간은 도덕성을 가진 존재이다

창세기의 말씀은 인간이 영성을 소유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도덕성 을 가진 존재라고 합니다. 즉, 인간은 동물 이상의 존재, 본능 이상의 그 무언가를 소유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단순히 살아 숨쉰다는 사실만으로는 인간이 위대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습 니다.

창세기 2장 7절 말씀 가운데 생령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l iving creature, living being인데 살아 있는 존재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흙이라는 물질 속에 하 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서 인간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인간을 독톡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동물들을 생물(生物)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20절).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30절).

생명이 있다는 사실은 모든 동물이나 식물이나 인간이 동일합니다.

인간이 그 생물들과 다른 점은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창 2:7)는 히브리어 로 『네솨마』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과 인간에게만 사용하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이 『네솨마』는 하나님께서 오직 인간에게만 주신 독특한 선물입니다. 그 점에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됩니다. 이 말 이 인간과 동물이 다른 차원의 존재임을 알려 줍니다.

1장 28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 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인간은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할 자로 지음받았습니다. 또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다스리라 는 단어를 인간이 뛰어나기 때문에 모든 동물들을 통치하고 지배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물론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고 모든 생물들을 다스려야 하는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다스리다라는 단어는 본래 책임을 강조하는 의 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그에게는 더욱 큰 책임이 따릅니다. 책임감이 없으면 누군가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간을 다른 생물들을 다스려야 하 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말은, 인간을 그만큼 책임을 져야 할 존재 로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본래 하나님의 고유한 사역입니다. 그런데 우 리 인간도 다스리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은 모든 만물을 다 스리고 만물을 책임져야 할 청지기로 지음받았습니다. 다스리는 책 임이 인간이 가진 도덕성의 본질입니다. 책임이 인간을 도덕성을 가진 존재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얼마나 책임 있게 주어진 과제를 처리하느냐, 얼마나 의롭고 공평하고 진실하게 일을 하느냐로 그 사람의 도덕성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책임감이 없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왜 책임 감이 없을까요? 다스림이라는 말은 영어로 dominion 인데 모든 만물에 대하여 지배하고 통치한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것은 도미니(domini)에서 나온 말인데 본래는 주인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스림이라는 단어는 주인 의식 을 강조합니다.

교회 기물들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주인 의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기 물건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것이라는 주인 의식이 있으면 매사에 태도가 달라집니다.

다스림의 가장 핵심 되는 정신은 바로 주인 의식입니다. 당 신은 얼마나 주인 의식을 가지고 만물을 다스립니까? 이 다스림은 우리 주변의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만물을 다스리도록 지음받은 인간에게 해야 할 일이 주어지기 시작 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인간에게 최초의 할 일이 주어집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 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에덴 동산만 다스리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내를 짝지어 주사 가정을 다스리게 하시고 사회를 다스리게 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얼마나 책 임 있는 인간이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예로부터 인간을 가장 나쁘게 말할 때, 책임 없는 인간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형이 죽으면 동 생이 형수를 돌보아야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동생이 형수를 돌볼 의향이 없다면 재판을 받습니다. 재판관이 그 사람 의 신을 벗기고 야단을 쳐서 보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집에는 신을 벗기운 자의 집이라는 패가 붙습니다(신 25:5-10 참조). 이것은 책임을 회피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최고의 저주입니다.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자기 본능대로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준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 도덕성 있는 책임감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본능에 따라 욕구를 충족시키는 삶이 행복이 아니라고 말합 니다. 당장은 그러한 삶이 편하고 즐겁겠지만 진정한 행복은 하나 님이 기대하시는 바를 추구하며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책임감 있게 성실하게 살 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능만 있는 동물과 다르게 도덕성을 가진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회성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고 살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중 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가 창세기 1장 26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이 말씀에서 우리가 뜻하는 바에 대해 신학자들 사이에 주장이 분분합니다. 어떤 학자는 우리라는 복수 인칭 대명사가 하나 님이 천사들과 함께 천지를 창조했음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러 나 이 학설은 천사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느냐 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천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 닌 존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관해서 전통적인 기독교의 견해를 지지합니다. 즉 ,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창조 사역에 동 참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 님은 창세 전부터 존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지 않으시 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시면서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말씀은 태초에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라로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하 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 1:1)라는 구절은 말씀이신 그리스도 가 하나님과 함께하셨다는 뜻입니다. 헬라어에서 함께는 그냥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움직이며 교제하는 모습을 나타냅 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은 사회성을 지니셨습니다. 그 래서 그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도 하나님을 닮아 교제하 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으며 이웃과 더불어 교제하는 즐거움 속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도록 지음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교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은 창조될 때 부터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이성(異性)과 교제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 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그리워하도록 만드셨습니 다. 인간은 성(性)을 가진 존재이므로 그 욕구 충족을 위해 아 담과 하와가 짝지어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할 뿐더러 남편 과 아내의 부부 관계를 맺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명령에 따라 자녀를 낳아 그들과 교제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유태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요한복음 1장 1절을 이렇게 표현하였 습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만 인간의 진정한 의미를 확인하도록 지음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漢字)가 얼마나 놀라운 표현인지 모릅니다. 사이 간(間)자는 인간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내가 누구일까? 하고 자신 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너를 통해서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버는 이 렇게 말했습니다.

그대 없이는 나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당 신이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은 나만을 위해서 살겠다는 욕망에 집착 할수록 줄어듭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남을 위해 봉사할 때 나의 의미가 살아 납니다.

나 자신에게 지나치게 몰두하면 그 인생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진 정한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계명을 주셨습니 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7,3 9).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삶의 좌우명과 목적은 다 다릅니다. 어 떤 사람은 나라를 위하여, 어떤 사람은 이념을 위하여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삶의 목적은 바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도록 내게 허락하신 이 웃들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세워 놓으신 창조 계획이 완성되고,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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