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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2 (막 06: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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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를 지어 ([프라시아이] ). "떼를 지어"라는 번역도 가능하나 짐승의 움직임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한다는 어감이 있어 "무리를 지어"라 는 표현을 쓴다.

오십 명, 백 명씩 무리를 지어 앉는 다는 것은 책임 분할을 뜻할 수도 있 는데 출 18:25에 나타난대로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책임을 나눠지 는 것을 뜻한다. 공동체를 위해 모두가 책임을 분담하여 참여하는 것이다.

P45에는 백 명, 오십 명씩이란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무리를 지어 앉았다는 점이다. 몇 천명의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이곳 저곳 에 앉은 것이 아니라 적절한 인원이 같이 앉아 같이 양식을 나누는 것이다.

 < 41절 > 예수님은 그것을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고 (하늘을 보고 축복한 뒤 ([유로 게센] ) 빵을 나눠주신다. 어떻게 해석하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선행된다.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가 이웃을 위한 양식을 만들게 된다.

식사 전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것이 유대인 들의 엄격한 규율이었다.

나눔은 감사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어진 양식에 감사하는 것은 피조성을 인식하고 양식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또한 그가 창조하신 이웃과 자신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자연스럽게 이웃의 배고픔에 관심을 갖게 돼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감사란 피조물인 인간이 피조성의 한계를 깨달으며 선물로 주어진 것에 대해 품는 감정과 태도를 말하며 이웃사랑은 피조물인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대한 하 나님의 애틋한 사랑을 생각하며 그를 아끼는 마음을 품으면서 갖게 되는 관심과 그에 따른 행동을 말한다.

 < 42절 > 유대인들은 대체로 저녁 식사에 생선을 먹었으며 "생선 없는 식사는 식사 가 아니다"라는 말이 탈무드 (Babylonian Talmud, Beracoth 44a)에 있을 정도로 빵을 먹고 굽거나 절인 생선을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이한 점 은 보리떡은 과거 우리 나라에서 그랬듯이 가난한 사람들의 식사였다. 요 한복음에 있는 내용 즉 가난한 소년이 예수님의 요청에 따라 배고픈 사람 을 위해 보리떡을 내어놓았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에코르타스테산] 은 [코르타죠] ( 자기 분량을 먹다, 충분히 먹다:eat one's fill, be satisfied, fill)의 제 1 단순과거 수동 태 직설법 삼인칭 복수형으로 "충분히 먹었다"로 표기한 것은 "배불리 먹 다"는 표현이 과식의 의미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만족하게 포식 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도 있으나 단순히 "배를 채운다"는 뜻도 있다.

즉 모든 사람이 자기 먹을 만큼만 충분히 먹었음을 의미한다.

부스러기를 줍는 행위:먹고 남은 것이 있음은 이웃을 위해 양식을 배려하 는 공동체에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풍성함을 뜻한다. 랍비들은 부스러기 (클라스마타:)를 주으라고 가르쳤고 유대식사에서는 늘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양식에 대한 존중심을 나타내며 따라서 낭비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드러낼 수도 있고 성찬 sacramental meal 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요한복음 6장 12절에 기록된 것처럼 제자들이 남은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온갖 낭비는 인간의 피조성을 부인하고 스스로가 양식을 획득한 주체라고 잘못 생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본문과 비슷한 급식 기사가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를 위해 양식을 마련해 주는 기사 (왕상 17:7-16), 엘리사가 예언자 수련생의 가족을 위해 양식을 배려한 기사 (왕하 4:1-7), 엘리사가 스무 개의 보리 빵과 자루에 가득 담 은 햇곡식으로 백여 명의 사람들을 먹인 기사 (왕하 4:42-44)가 있다. 세 번째 기사의 경우 먹이고 남았다 have some left 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 나 마가 6장에서는 그것을 모았다고 기록하는 점이 특이하다.

 < 43절 > 열 두 광주리 ([도데카 코피논] ). "가득 찰 정도"라는 뜻을 가지는 [플레로마타] 는 "채우다"는 뜻을 가진 중성 명사로 온 이스라엘에게 나눠줄 양식이 풍성함을 상징한다. 공동체를 위해 양식 을 내어놓는 사랑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해 온 이스라엘을 위한 양식으로 변한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왜 열 두 광주리나 되는 부스러기가 남게 했을까 이왕 기적을 베풀 것이면 모인 사람들이 딱 먹을 만큼만 만들어 남은 것을 가져가야 하는 수고를 덜게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따라서 열 둘이라는 단어가 갖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1) 열 둘은 이스라엘 12지파를 나타내며, 본문에 나타난 놀라운 이적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양식 문제로 고통받는 같은 동족인 "온 이 스라엘"도 같이 먹을 수 있는 축복을 누려야 함을 뜻한다. 성서에서 12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역시 이스라엘 12지파다. 신약에서도 이런 의미가 12명의 제자 선택(마 10:1막 3:14눅 6:13), 제자 파송 (마 10:5막 6:7눅 8:1), 제 자들이 이스라엘을 심판함 (마 19:28눅 22:30), 12영의 천사들 (마 26:53)과 같은 기사에 나타난다. 즉 열 두 광주리에 모은 양식은 예수와 같이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 남은 것이기에 이제 배고픈 동족 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 상황이 바로 이 상황이다.

2) 12는 또한 "완전수"를 나타내며 (계:21:12; 14; 22:2) 천지합수 또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이렇게 본다면 한 공동체에 풍부한 양식이 있으면 당연히 배고픈 지구촌의 사람들에게로 보내야 한다.

 < 44절 > 성인 남자만 오천 명. 어떤 학자는 오천 명이었는지 어찌 아느냐고 하면서 오늘날 항공 측정을 해도 어려운데 어떻게 정확하게 셀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을 한다. 그러나 첫째로 그 근거를 39절에 찾을 수 있다. 적절한 인원들로 구성된 무리의 수만 세면 얼마였는지를 금방 계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로 제자들이 어림잡은 200 데나리온도 하나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고 대체로 4-8명이 하루 먹을 양식을 살 수 있는 돈이라고 볼 때 하루 세 번 식사한다고 보면 적게는 2400명 많게는 4800명이 한끼 식사할 수 있는 돈이다. 즉 그 정도 숫자의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있는 것으로, 눈짐작으로 헤아렸다는 것이다.

더욱이 정식 식사가 아닌 잠시 허기만 채울 수 있게 배려하고자 했다면 훨 씬 덜 든다고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오천 명이 먹었다는 (막 6:44) 복음서 기록은 상당히 근거가 있다.

 본문의 신학적 의미 하나님의 나라는 배고픔이 없는 상태다 (막 5:6). 본문에 나타나는 대로 예수님이 있는 곳에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식탁 공동체, 나눔의 모습이다. 이렇게 예수는 목자 없는 종말적 공동 체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적인 신적 동정심(divine sympathy)을 나타낸다.

 진정성 문제 마가, 마태, 누가, 요한의 사 복음서에 다 나타나기에 진정성 판단 기준중 다중출현의 기준 The Criteria of Multiple Attestation 을 적용시킬 수 있다. 즉 사복음서 (마 14:13-21, 눅 9:10b-17, 요 6:1-15)에 공히 나타나 기에 일단 예수 자신이 하신 말씀들, 즉 진정성이 있는 예수 고유 말씀들 ipsissima verba 과 예수 고유 의도 (ipsissima intentio)가 들어 있는 기 사라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사실이 진정성의 가능성을 높혀주고 있다.

1) 유대인으로 로마에서 주전 1세기를 전후한 유대 역사를 기록한 요세푸 스 Josephus 도 예수가 놀라운 일들을 했다고 기록한다. (Jewish Antiquities, 18:63f:"약 A.D. 30년쯤 빌라도 집정관으로 통치하던 중반 기에, 만일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면, 예수라는 사람이 살 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적들을 행하는 사람이었고, 사람들이 기쁨으로 그 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도 않고 그에 대해 결코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던 그가 이적을 기록했다 는 것은 예수가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최근의 예수 연구에서도 이 점이 많이 주장되고 있다.

2) 이적을 체험한 군중의 반응이 나와 있지 않아 양식 비평에서 말하는 이적 설화의 요소를 온전히 갖추고 있다 3) 숫자를 들어 자세히 기술하는 측면은 목격자의 증언임을 말함.

따라서 사복음서가 조금씩 다르게 기록된 것은 전승 전달과 편집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예수의 공생애에 있었던 실제 일어났던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설교자를 위한 제언1) 본문에 대한 피상적 해석:본문이 오늘 우리 교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 의 말씀임을 믿고 그 의미를 찾는 설교자나 주석자가, 본문 연구에 들이는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깊은 의미와 교훈을 깨달을 것이지만, 본문 을 피상적으로 읽는다 해도 기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찾 을 수 있을 것이다.

(가)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은 오천 명이나 되는 굶주린 영혼들의 배를 넉 넉히 채워 주실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또 양식을 위해 고 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열 두 광주리가 차도록 남기시는 분이다.

(나) 예수님은 무에서도 유를 만들 수 있는 분이지만, 주 앞에 내어놓은 적은 것이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허기져서 기진할 것을 염려 하여 양식을 베푸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그러나 적어도 이 본문을 위와 같이 조금 더 깊이 연구하게 되면 별로 생 각지 않았던 교훈들이 추가로 얻어지며 이 사건이 이천 년 전의 예수 당시 의 사건만이 아닌 오늘 우리의 사건이 되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성서 연구는 꼭 필요하며 하면 할 수록 교인들은 신선한 설교에 감동을 받 을 것이다).

(가) 하나님은 사랑에 감사하고 그것을 나눌 줄 아는 공동체를 원하시며 거기에 그의 놀라운 능력이 구체적으로 임하게 된다.

(나) 12광주리의 12는 민족 공동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며 이스라엘, 더 나아가 민족 공동체 전체에게 양식을 주시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다) 예수 공동체는 우선 내부의 문제를 공동체 내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 기초해서 왜 열두 광주리인가 하는 제목으로 하나의 설교를 만들 어 보았다

첫째 열 두 광주리는 나눌 줄 아는 공동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의 구체 적 증거다. 우리는 때로 오늘날 어디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구 체적인 증거를 찾을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매우 신비하게 나타난다. 특히 나누는 공동체에 나타나는 것을 경험한 사람만이 알 것이다. 적은 것이지만 나누려는 공동체에 이미 하나님은 그의 비밀스 런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God starts to activate his miraculous power when people begin to share what they have.). 한국의 그리스도인 들이 가진 것을 나누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한국 그리스도인 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우리는 국제 기구나 국제 선교를 통 해서도 베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원의 유출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역사하심을 뜻한다. 자원이 넘치면 나눠주고 없으면 못 나눠준다 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눌 줄 아 는 공동체를 찾으신다.¡ 둘째 열 두 광주리는 배고파하는 동족을 배려하라는 것을 상징한다.

1995년은 우리 나라가 일제로부터 독립한지 반세기를 맞는 해로서 우리 민 족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아직도 한국은 분단되어있고 동족의 반은 북한 땅에서 물질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다. 여러 자료나 보도를 통해 보도되는 사실을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판단해 볼 때 심각한 식량난 속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은 상당한 경제적 발전을 이 뤄 풍족히 먹고 낭비하면서도, 상당수 사람들은 양식 문제로 고통받는 북 쪽의 동족들을 외면하고 있거나,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생각하며 의식적으 로 무의식적으로 방관하고 있는 상황에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물론 그 래야겠지만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최소한 민족 공동체 의식을 발휘하 여 우리가 가진 양식을 나눌 수 있고, 기독교인에게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르자고 권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풍족하게 주어진 양식을 아껴서 감사히 먹기는커녕 낭비 하고 먹다 버린 음식으로 기르는 가축이 굶주린 동포보다 더 잘먹는 세상 이 되어간다는 것은 인간 생명을 가장 중시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 시하고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충분히 먹고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고 모아 열두 광주리에 모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바로 사용하는 것이요 배고 픈 동족을 생각하는 이웃사랑과 공동체 의식의 구체적 표현인 것이다. 우 리가 충분히 먹고 남는 자원은 나눠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눔이라면 우리도 나눠야 한다.

셋째 본문에 나타난 바대로 열 두 광주리는 공동체의 문제를 공동체 내부 에서 해결하라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문제 중의 하나가 우리 내부의 문제를 우리끼리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 니라 다른 민족의 힘이나 영향력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 왔고 오 늘까지 지속되고 있다는데 있다고 보았다. 핵 문제가 그렇고 외교 문제가 그렇고 통일의 문제가 그렇다. 이제는 남한과 북한이 그런 자세를 버리고 서로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끌어안고 우리끼리 해결하려는 노력을 함께 할 때다. 필자는 특히 지난 삼 년간 북한의 식량문제를 놓고 한사람의 그 리스도인으로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이 문제에 관한 성서의 말씀을 찾고자 애쓰는 가운데 이 본문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고 시간 나는 대로 묵상하 면서 나름대로 시간을 쪼개어 해석하고자 했다. 필자는 한국 통일의 물꼬 는 분명히 북한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데서 트이며,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계심을 알고 우리 그리스도인들 은 적극적으로 북한의 동포들이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물질적 으로 사회적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고 분명히 믿는다.

 이제 배고픈 동포들이 있는 북한 땅을 향해 쌀을 가득 실은 배가 떠나가고 있다. 크고 작은 문제는 계속해서 있을 것이고 해결되어야 할 것이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통일로 가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장벽도 어떠한 갈등도 결국 사랑으로 무너지고 사랑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주는 자가 승 리하고 사랑하는 자가 승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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