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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머무는 생활(1) (요일 0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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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정과 사랑이라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크게 문제되는 모든 일들의 그 원인은 가정에서부터 탄생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사라믈 만나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분이 말하기를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원인은 그 교회나 사회에 있지 아니하고 실질적으로는 그 가정 안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깨어진 가정이나 금이 간 가정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가정에서의 모든 문제가 발산되는 곳은 교회이며 직장이며 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988년 이 한해, 우리들 생활의 가장 중요한 강조점을 우리의 가정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예식을 할 때 언제나 빠뜨리지 않는 말이 있는데, 신랑과 신부에게 가정에 성공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꼭 합니다.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모든 기쁨과 슬픔은 전부 가정에서 탄생되는 것입니다. 가정에 성공하는 사람은 인생에 성공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정에 성공하지 못하면 비록 상업에 성공하고 지위와 명예를 얻을지라도 인생은 실패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성공하는 비결은 가정에 성공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몇 번에 걸쳐 어떻게 하면 가정 생활에서 사랑에 머물러 사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말씀을 하려고 합니다.

흔히 우리는 사랑하고 살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가치관이요 가장 중요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랑하자"는 말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쥐들이 자꾸 고양이에게 잡혀 먹히니까 모여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다른 길이 없고 고양이 목에다가 방울을 달면, 그 방울소리를 듣고 도망가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이론은 좋지만 과연 어느 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과연 누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고 사느냐 하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는 사랑하기를 원하고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쉽게 사랑하고 사랑을 베풀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에 머무는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참 사랑의 삶을 사는 몇가지 기본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첫번째 사람은 사랑을 주고 베풀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하기보다는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동물은 태어나면 며칠되지 않아서 움직이고 자기 마음대로 다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나서 1년간은 누군가가 먹여 주어야 하고 그 뒤를 다 봐 주어야 합니다. 1년이 지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는 어린대로, 국민학교 다닐 때는 국민학생대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어른이 되어도 끊임없이 사랑을 받아야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랑을 베푼다는 문제보다도 사랑을 받고 싶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인 것입니다.

두번째 사람은 사랑을 받고 싶고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므로 사랑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랑을 받고 싶은 욕먕은, 다른 말로 하면 살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존재하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살아가고 또한 어려운 인생을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느냐 하면 사랑을 받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중의 하나는 앞으로 사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하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금 우리들 중에 "나는 그 누구로부터도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 누구도 지금 나를 사랑하지 않고, 앞으로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자살은 사랑받기를 소망하고 원하지만 아무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자살은 곧 사랑을 받고 싶다는 절규요,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는 데 대한 한탄입니다.

세번째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좋은 음식을 받아들일 때 건강한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정신은
사랑을 받아야 건전한 정신, 건전한 인격을 가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어린이들은 결국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킵니다.

고양이와 개의 차이점을 한번 생각해 보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개는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어느정도 사랑하는 편입니다. 어릴 때부터 강아지 목에 끈을 매어 같이 놀고, 뛰어 다니고, 안아주고 먹을 것을 주며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고양이는 영물이라고 해서 싫어합니다. 그래서 고양이가 가까이 오면 걷어차고 때립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고 자란 개는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동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저 멀리서 걸어와도 주인임을 알고 좋다고 펄쩍 펄쩍 뛰면서 사랑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고양이는 사람을 언제나 경계하며 두려워 합니다. 주인이 오라고 해도 덥썩 주인의 품에 안기지 아니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만이 참 사랑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만 참 사람이 됩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대부분은 알고 보면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보이지 않는 삶의 배경이 그 인생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네번째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아니한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는 우리의 삶은 백지의 상태입니다. 우리의 지능도 낮고 생각하는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이 거의 백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밖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음으로써 그의 인생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백지 상태인 사람이 밖으로부터 받는 사랑의 양을 우리의 삶속에 얼마나 축적하느냐에 따라서 일평생 사랑을 베풀며 너그럽게 사는 삶이 되느냐 아니면 그렇게 되지 못하느냐가 판가름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자라는 과정 가운데서 깊은 사랑을 받은 사람일수록 그만큼 깊이 사랑하고 그만큼 깊이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누가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줄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지만 일찍부터 부모를 여윈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기 원하지만 남편이 세상을 떠난 외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자식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지만 자식이 없는 가정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풀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은 참 묘합니다. 갓난 애기일 때는 아버지 어머니 사랑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서너살이 되면 부모의 사랑만으로는 부족을 느끼게 되어 다른 사랑을 요구하게 되는데 친구의 사랑입니다. 자기 친구만 있으면 엄마 아빠가 어디를 가자고 해도 따라나서지 않고 친구하고 놀기를 원
합니다.

어린애들이 자라서 사춘기가 되면 친구의 사랑 가지고도 부족합니다. 남학생은 여학생을 곁눈질하고 여학생은 남학생을 곁눈질해 봅니다. 청년이 되면 이성의 사랑을 원해서 결혼을 합니다. 결혼하고 처음에는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으면 족합니다.

그러나 결혼생활 1,2년만 지나면 또다른 사랑을 구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대상을 구하여 자식 갖기를 원합니다. 나이가 50이 되고 60이 되어 노인이 되면 무슨 사랑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노인은 노인대로 또 다른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요, 사랑을 받아야 살 수 있고, 사랑을 받아야 사람이 되고,사랑을 받은 양만큼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데 누구로부터 이 사랑을 맏을 수가 있습니까

부모의 사랑으로 만족할 수 없고, 친구의 사랑으로 만족할 수 없고, 이성의 사랑으로 만족할 수 없고, 자식의 사랑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고 싶지만 사랑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 세상의 탄식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사랑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참 사랑을 가지신 분,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요한1서 4:7 이하의 말씀은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참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우리에게 참 사랑을 베풀어 줄 수 있습니까 어디서 만족한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참으로 사랑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큰 용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큰 자비를 경험한 사람은 참 사람으로써 살아 갈 수 있고, 또 사랑의 사람으로써 살아 갈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것은 기술입니다.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줄 아는 기술을 가진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본체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인간은 언제나 사물을 판단할 때 윤리적으로 판단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때에도 윤리적으로 하나님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착하고 선할 때에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잘못하고 실수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의 본체이심을 알지 못하고, 윤리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윤리적인 눈으로 사람을 보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실 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습니다. 어떤 목자가 양을 백마리 가지고 있었는데 그 백마리의 양 가운데 아흔아홉마리는 목사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해서 하루의 모든 일을 마치고 양우리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의 양은 목자의 말과 음성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아니하고 멋대로 다니다가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고 평가한다면 그 한 마리의 양은 버림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왜 너는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고 순종하지 않았느냐 너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 마땅하고,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너에게 마땅한 벌이다"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순종한 아흔 아홉마리의 양도 중요하지만, 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사랑하시는 것이 목자입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을 가리지 아니하고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기술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서 길 잃은 그 양을 찾아 안고는 기뻐합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한 형편 가운데서도 인간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람이 정죄하는 세리를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이 정죄하는 창기를 사랑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정되하고 돌을 던져야 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하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고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능력과 사랑의 기술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사랑에 굶주린 우리들의 영혼에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요한1서 4:10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나타난 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

요한 1서 3:16말씀을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예
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 1서 4:19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바꾸면 "네가 나의 사랑을 받은 분량만큼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하며, 사랑을 받아야 살아갈 수가 있고, 사랑을 받아야 사람이 되며,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 사랑은 사랑의 본체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사랑의 확신을 가지는 순간부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넓으신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입고 이 땅에서 사랑으로서 살고, 이 땅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인격을 갖추어서 살며,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경험하며,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인생을 우리 모두 살아가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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